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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동의 신간서평]서양을 앞서간 관리 등용문과거(科擧)_중국의 시험지옥

과거(科擧)_중국의 시험지옥

지은이 미야자키 이치사다/ 옮긴이 전혜선/ 출판사 역사비평사/ 정가 14,800원

 

옛이야기 속 선비와 과거

어릴 적, 옛날이야기를 읽다보면 꼭 과거 보러 가는 선비 얘기가 나온다. 날이 어두워져 길을 잃고 헤매다가,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따라가니 오두막 한 채가 나타나고, 소복 입은 여인네가 선비의 사정을 듣고는 마지못해 하룻밤 묵는 것을 허락한다.

곧이어 정성 가득한 상을 내오고, 피곤에 절어 깊은 잠에 빠진 선비가 수상한 인기척에 눈을 떠보면 소복 입은 여인네가 칼을 들고 있거나 눈물을 흘린다.

칼을 든 여인네는 대개 사람이 되려는 백년 묵은 여우고, 우는 여인네는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다. 여우의 경우엔 해치우고 억울한 귀신은 해원을 해준 뒤에, 간신히 시험장에 도착해서도 거뜬히 장원급제를 하는 선비. 눈에 시리도록 읽기도 했지만 귀가 닳도록 듣기도 했던, 뭐 이런 얘기다.

또 있다. 등장만 하면 생원이고 진사다. 그냥 붙이는 별호 같지는 않은데 뭘 어떻게 해서 땄는지는 그 내막을 몰라도 옛이야기를 읽는 데는 별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인물의 캐릭터로 보아 생원은 간신 수염 정도 붙여야 어울릴 것 같이 좀 찌질하고, 진사는 덥수룩한 수염에 장죽 정도는 물어줘야 어울릴 무게감이 있어 보인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장똘뱅이 허 생원에, <시집가는 날>의 최 진사 때문에 생긴 선입견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원이나 진사란 게 큰 과거든 작은 과거든 과거에 합격해야 얻는 호칭이라는 정도는 초딩이 되기 전에도 알았다.

아, 과거 얘기가 나온 김에 과거(過去) 얘기 한 마디 더 붙이자. 내가 초딩시절인 1970년대에는 ‘자유교양 경시대회’란 게 있었다. 전국의 초딩 3~6학년들에게 몇 권의 책을 지정해주고 시험을 치르게 했다.

학교대표를 뽑아 시군대회와 도대회, 전국대회까지 치르던 일종의 독서경연대회다.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일이야 누가 뭐랄까마는, 그걸로 시험을 치르고 순위를 매기는 아주 코미디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학교의 명예니 시군의 명예니 해서 대표로 뽑힌 어린 애들을 밤늦게까지 붙들어놓고 지정된 몇 권의 책을 달달 외우다시피 하게 했으니, 이를 지도한 선생님도 참 못할 짓이었을 테다.

후주의 '쌍기' 그리고 고려 광종 

4학년 때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내가 읽은 책 중에 <강감찬 장군>이 있었는데, 여기에 과거제도가 나온다. 고려의 4대 왕인 광종 9년 958년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처음 실시했다는 내용이다.

2년 전인 956년에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민으로 풀어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왕권강화를 위해서였단다. 시험에 잘 나오는 문제여서 밑줄 빡빡 긋고 똥글뱅이도 무진장 쳐두었던 기억이 난다. 

▲ 강감찬 장군 영정 [사진 출처 : 다음백과]

심지어 고려의 대표적 외교관인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 끝에 얻어낸 ‘강동6주’가 흥화진, 용주, 통주, 귀주, 곽주, 철주요, 여기에 등장하는 귀주는 강감찬 장군이 세 번째 침입을 강행한 거란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귀주대첩 장소다.

이때 고려의 국경은 청천강 유역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의 국경이 된 것은 최윤덕 장군에 의해 4군이, 김종서 장군에 의해 6진이 설치된 조선 세종 때에나 되어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 쓰잘머리 없는 것까지 외웠다 싶지만, 그땐 이런 것도 시험에 나왔다. 정작 강감찬 장군에 대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별이 떨어지고 그 길로 장군이 죽었다는 서울대 옆 낙성대뿐이다.

에고, 이게 도대체 웬 횡설수설이냐. 아무튼 과거 얘긴데, 이렇듯 수박 겉핥기식에 시험대비용으로만 외웠던 과거를 아예 단행본으로 묶어냈대서 단박에 집어 들었다. 역사비평사의 신간 <과거_중국의 시험지옥>이다. 제목부터 씨익 웃음이 나왔다. 시험은 요즘만 지옥인 줄 알았는데 그 옛날에도 똑같이 지옥이었던 모양이니 말이다.

시험지옥인 건 그때도 마찬가지

책을 펼치면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일단 시험의 종류가 그야말로 줄줄이 사탕이다. 우선 시험이란 게 관리가 되려고 치르는 것인데, 관리가 되려면 우선 태학이나 국자감 같은 국립학교의 학생이어야 했다.

국립학교의 학생이 되면 일정한 주기에 따라 시험을 치러 실력을 확인하고 우수한 학생은 곧바로 관리로 등용했는데, 이를 세시라고 한다. 학교교육을 통해서 관리가 되는 유일한 방법인데, 등용문이 좁아서 대부분의 생원들은 과거시(科擧試)를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려면 입학시험부터 치러야 한다. 이를 학교시(學校試)라 부른다. 한번 읊어보자. 첫 번째 단계가 현에서 치러지는 현시, 두 번째가 부에서 치러지는 부시, 세 번째가 본시험이랄 수 있는 원시다. 이를 통과해야 비로소 국립학교 학생 자격을 얻게 되고, ‘생원’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생원이란 국자감의 학생을 감생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했다. 

과거시는 과시로부터 시작한다. 일종의 관리 등용 예비고사인 셈인데 경쟁률이 1대100 정도다. 과시를 통과하면 3년에 한 번씩 각 성에서 치러지는 향시에 응할 수 있다. 향시는 시험장에 입장해서 한 차례에 2박3일씩, 모두 세 차례의 시험을 보게 된다. 시험 중에는 한발짝도 시험장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향시 합격자들은 거인복시에 응할 자격이 생긴다. 거인복시부터는 북경에서 시험이 치러지고, 이 시험을 통과하면 회시가 기다린다. 회시는 향시와 마찬가지로 2박3일씩 세 차례에 걸쳐 치르며 합격자는 다시 회시복시에 응할 자격이 생긴다. 

▲ 김홍도 풍속화 '서당도'

거인복시를 패스하면 비로소 천자가 주관하는 전시를 치를 수 있고, 전시의 합격자는 비로소 성적에 따라 중앙이든 지방이든 관리에 등용되었다. 전시에 1등으로 합격한 자를 장원이라 하고, 전시 합격자를 일러 ‘진사’라고 불렀다.

또 전시의 성적우수자들은 대개 황실의 비서실 격인 한림원에 배속되었는데, 이들을 상대로 한림원 잔류 여부를 가리는 조고라는 시험도 있었고, 한림원 졸업시험이랄 수 있는 산관고시도 있었다.

여기에 정식시험이랄 수는 없지만 이를 준비하기 위해 다섯 살 무렵부터 배우기 시작한 <천자문>에 <몽구(蒙求_당나라 때 이한이 지은 아동용 교재로 중국의 역대 위인의 행적을 운문으로 기록한 책)>, 사서오경까지 익히고 훈장님 앞에서 치른 시험마저 보탠다면, 시험지옥이라는 책의 제목이 결코 과장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진보적 관리 등용문이었으나

과거제도는 수나라 초대 황제인 문제 때 처음 실시되었다. 이전까지 관리란 귀족에 의해 세습되어오던 권세였는데, 내란을 평정하면서 힘을 얻은 수나라 문제가 귀족정치에 브레이크를 걸고 천자의 독재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시행했다. 귀족들은 관리가 되려면 과거를 치러야 한다는 황제의 뜻에 반발하고 맞섰지만, 점차 과거를 통해 등용된 진사그룹이 힘을 얻으면서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과거의 응시자격에, 부계조상 3대 안에 창관(娼館_창녀나 창기를 두고 손님을 맞아 영업하는 집)이나 기루(妓樓_기생이 있는 술집이나 유흥업소)를 경영한 적이 없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나이도 직업도 제한이 없어서 귀족을 제외한 세간의 지지를 얻은 것도 귀족의 항복에 한몫을 보탰다. 이 시기가 지금부터 1400년 전. 유럽에서는 봉건제도가 겨우 틀을 잡아가던 시기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아주 진보한 제도요 뛰어난 이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차이가 있기 마련. 오랜 기간 연속해서 치러야 하는데다가 경쟁도 심해서 2, 30대에 진사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따라서 공부를 계속하려면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수적인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처럼 시험에 전형료를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향시를 보려면 성의 도읍까지 나가야 하고 거인복시부터는 수도까지 올라가야 했다. 오가는 여비며 숙박비, 시험관에게 줄 사례비, 담당 관리에게 줄 축의금, 연회비와 교제비까지 포함하면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명대 후반인 16세기에 이 비용이 대략 은 600냥이었단다. 은 1냥으로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니 시험 한 번 보려면 쌀 6백 가마니가 들었다는 얘기다.

어디 이뿐이랴. 공정성을 기한다고는 했지만 초기와는 달리 뒤로 갈수록 부정이 판을 치고, 인사적체가 심해서 진사가 되고도 허드렛일을 하거나 공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또 경전 위주의 시험이다 보니 사람의 됨됨이는 판단할 길이 없어 생기는 부작용도 잇따랐다.

심지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부류들은 불평분자가 되어 반란군의 지도자나 가담자로 정권에 타격을 가하는 일도 벌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황소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주인공들이 그런 이들이다.

▲ 김홍도 풍속화 중 '과거장 풍경'

신문물, 신교육에 밀린 과거

청나라 말기, 유럽과의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하면서 신문물과 신기술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과거제도는 급속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신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여럿 세우고 ‘학당’이라고 이름 붙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화단 사건(1900년 6월, 북경에서 외세배척을 내걸고 교회 습격과 외국인 박해를 일삼던 의화단을 청나라 정부가 지지하고 서구 열강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다가, 미국을 비롯한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북경을 점령당하고 의화단이 진압된 사건)에서 고배를 마신 뒤 전국적으로 신교육제도를 반포했다. 이에 따라 1904년 5월의 과거를 마지막으로 1300년의 역사를 지닌 과거제도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

아, 과거란 이름에 대해 말하는 걸 빼먹었다. 처음에 중국에서는 이런 관리 등용 체계를 ‘선거(選擧)’라고 불렀다. 우리가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이름과 같다. 그런데 시험에 여러 종류의 과목(科目)이 있어서 ‘과목에 따른 선거’를 줄여 부른 이름이 ‘과거’다. 이 이름이 정착된 것은 당나라 때였고, 이후 송나라부터는 과목이 하나로 좁혀졌지만 이 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여전히 과거로 불렸다.

과거, 참 복잡하다. 책을 읽다 보면 시험지옥인 우리 현실과 자꾸만 오버랩 되는 사례들이 하도 많아서 더욱 그렇다. 책 뒷부분엔 저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이 시험지옥 탈출법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생략이다. 독자의 몫도 남겨줘야 하니까.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년 일본 나가노 현에서 태어나 1995년 타계했다. 일본의 동양사학자로, 중국의 사회·경제·제도사에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교토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졸업논문으로 「남송 말의 재상, 가사도(南宋末の宰相賈似道)」를 썼다. 같은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평생 교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와 집필을 계속했다. 

1960~1965년에는 파리·하버드·함부르크 대학에 객원교수로 초빙되기도 했으며, 1965년 정년퇴직 후에는 함부르크 대학의 명예 객원교수가 되었다. 특히 정년퇴직 뒤 많은 독자가 중국사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문장에 심혈을 기울인 대중 역사서를 펴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구품관인법 연구(九品官人法の硏究)>, <아시아사연구(アジア史硏究)>(전 5권), <과거 : 중국의 시험지옥(科挙:中国の試験地獄)>, <논어의 신연구(論語の新硏究)>, <수호전 : 허구 속 사실(水滸伝:虚構のなかの史実)>, <옹정제(雍正帝)> 등 다수가 있으며, 1991년에는 그의 모든 저작을 한 데 모은 <미야자키이치사다 전집(宮崎市定全集)>(전 24권)이 간행되었다.

전혜선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한일통역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동대학원에서 통역번역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국제회의통역사로 활동하면서 번역을 하고 있다. 역서로는 <역로>, <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2>, <수양제>, <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3>이 있다.

 

이규동 청소년 인문교양 매거진 ‘유레카’ 편집주간

 

이규동 주간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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