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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인 선생, 살아 있는 큰 바위 얼굴[심장에 남는 사람]대접 원치 않고 늘 현장에 청년처럼 서있던 선생님
인생의 길에는 많은 인연이 이어졌다가도 끊어진다. 헤어짐이 못내 안타깝고 슬픈 건 인연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겠다. 하물며 돌이킬 수 없는 사별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할까. 잊을 수 없는 사람. ‘심장에 남는 사람’으로 추억해 본다.[편집자]
  
▲ 2011년 4월 현충원 벚꽃놀이에서.[사진 : 류경완 담쟁이기자]
▲ 2011년 범민련 남측본부 12차 공동의장단회의에서.[사진제공 : 유치자]

며칠 전 류종인 선생님(1938~2016)이 홀연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달 29일 저녁 7시에 열린 추도식에는 선생님을 보내는 애통한 조사와 함께 양심수후원회 회원들의 추모 공연이 이어졌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노래와 살풀이춤으로 추모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곡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갑작스런 비보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생님이 회원들과 애틋한 정을 나누고 각별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도 선생님과 자주 만났다. 양심수후원회 후원모임인 ‘옴시롱감시롱’이 준비한 문학기행에도 사모님과 빠지지 않고 나오셨고 가끔 가족들과 어울려 백담사나 동해바다를 구경하기도 했다. 일상에서는 생신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자주 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피곤하다고 먼저 방에 들어가는 법이 없고 건강을 핑계로 술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뇌출혈로 쓰러지기 하루 전에도 강건하게 후배들과 저녁을 들고 2차도 가셨다.

그래서인지 선생님께는 술친구가 많았다.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고민을 들어주고 그 두툼한 손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이를 불문하고 아저씨로, 애인으로, 선생으로, 술친구로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통일정세를 읽어낼 때는 누구보다도 정확했지만 선생님은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고 늘 현장에 청년처럼 서 있었다. 향년 79세. 할아버지나 노인으로서 서 있을 법하지만 선생님은 물리적인 나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 2011년 10월 소백산 마구령에서 장기수 강담, 양원진, 박희성 선생과 함께. [사진 : 류경완 담쟁이기자]
▲ 2013년 5월 남도 역사기행에서 진도 필자의 집을 방문했을 때.[사진 : 류경완 담쟁이기자]
▲ 2011년 11월 역사기행에서.[사진 : 류경완 담쟁이기자]

그런 선생님이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설 때가 있었다. 엄마들이 예닐곱 살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하는 것을 보면 아이 앞에 무의식적으로 달려가 그 큰 체구를 납작 엎드리고 두 손으로 아이의 팔을 붙잡으며 ‘너 몇 살이니?’ 묻는 것이었다. 아이의 대답을 듣고서는 맥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는 선생님.

20년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선생님이 보이는 이 기이한 행동에는 아픈 가족사가 숨어 있다. 71년 중정에 끌려갈 당시 선생님께는 여섯 살이던 큰아들 성수, 성준(4살), 성재(2살)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다. 선생님의 시계는 여섯 살 아이와 헤어지던 그 순간에 멈춘 것이다. 아이들은 10년 옥바라지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엄마와 함께 선생님의 삶에서 흔적을 감췄다.

▲ 73년 엄마를 따라 도미한 후 영영 만나지 못한 세 아들 성수, 성준, 성재의 어릴 적 모습.[사진제공 : 유치자]

선생님이 아이들과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면에는 또 다른 가족사가 있다. 선생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전후에는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다가 전쟁 시기에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젊은 시절 일본 기계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일로 일본 출장을 자주 가던 차에 전쟁 때 헤어졌던 부친이 북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70년 평양에 가서 부친을 상봉한다.

부모자식 간의 만남은 어떤 이념과 사상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것임에도, 4개월간의 불법 구금과 잔혹한 고문으로 ‘일본거점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매제와 남동생 등도 함께였다. 5년을 복역하고 먼저 출소한 남동생은 사건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생님은 도미한 부인의 마지막 면회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만난 대가치고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불행한 가족사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독일작가 페터 한트케가 ‘소망 없는 불행’이라는 작품에서 어머니의 불행한 삶을 기록하면서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객관화시켰듯이 선생님 또한 아픈 가족사를 껴안으며 대범하게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몸은 오랜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맘 속에도 휴전선이 몇 겹으로 그어졌으나 한 번도 고통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당신의 고통을 객관화시켜 분단의 사슬을 걷어내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을 뿐이다.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선생님의 생이 가슴 아파 많이 울었다. 어엿하게 성장했을 자식들과 한 번 만나지도 못했고, 평생 고문 후유증으로 심장에 박동기를 달고 여러 질환에 시달린 점도 안타까웠다. 16년을 함께 한, 다정했던 사모님이 홀로 남게 된 점도. 하지만 선생님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막 야단을 칠 것이다. 당신은 그 한계를 훌쩍 넘어 살아간 것을!

▲ 2001년 새 연을 맺은 유치자 사모님과 2015년 4월 역사기행 때의 단란한 모습. [사진 : 류경완 담쟁이기자]

혹자는 선생님 삶을 이렇게 기억한다. ‘큰 바위 얼굴처럼 우리에게 큰 그늘이 되어준 분’이라고. 나는 선생님이 고난을 이겨내고 의연하게 살다간 기상 때문이라고 여긴다. 선생님의 장례를 치를 때 ‘선생님의 사랑을 특별하게 받았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그랬다. 선생님은 큰 품을 열어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기억’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선생님과 악수를 해본 사람은 반가움에 악수를 청하던 다부진 손, 그 손에서 느껴지던 힘을 기억할 것이다. 등을 토닥거리던 그 위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양심수후원회 회의시 역할이 버겁다고 마다할 때면 ‘한 번 더 해야지’ 하고 어개를 툭 치던, 거역하지 못하고 순순히 따르게 되던 스승의 손길. 그래서 선생님의 부재가 더욱 아쉽고 그립다.

▲ 2014 5월 지리산 역사기행, 이현상 사령이 최후를 맞은 빗점골에서.[사진 : 류경완 담쟁이기자]
▲ 2010년 3월 ‘금강산 관광 재개 기원 올레걷기’에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 전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함께.[사진제공 : 유치자]
▲ 2011년 6월 만남의 집에서 민가협 어머니, 양심수후원회 회원들과 함께.[사진제공 : 유치자]

김혜순 담쟁이기자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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