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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재건 투쟁에 나선 고구려 유민들[박경순의 고구려사] 고구려 재건 투쟁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9.08.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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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고구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고구려 영토를 먹어 삼키려던 야욕은 고구려 유민들의 격렬한 반당나라 투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민족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가 붙었던 신라와도 대범하게 연대했다. 그 결과 고구려 백제의 땅뿐만 아니라 신라의 땅까지도 먹어 삼키려던 당나라는 고구려 신라 연합투쟁으로 우리 민족의 삶터를 장악 지배하려던 야욕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쫓겨나고 말았다. 고구려 유민들은 항쟁의 초기에는 무너져버린 고구려 왕조를 복원하는 방향에서 투쟁을 펼쳤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각기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위나암성 성벽에서 바라본 산성하 무덤떼

검모잠, 한성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국’을 세우다

당나라의 고구려 땅 강점 책동을 저지하려는 고구려 유민들의 항쟁은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벌어졌다. 적들에게 강점당하지 않은 성들의 민중들은 말할 것 없고 피난 갔던 성들의 민중들도 투쟁에 떨쳐나섰다.

668년말~669년 초 수림성 출신 무인 대형 검모잠은 궁모성(위치불명: 최초 활동 지역인 궁모성은 현재 경기도 연천시 연천읍 공목달현으로 비정하기도 하나 대동강 북안의 평양 인근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궁모성을 서해의 수군 기지로 보고 고려시대에 궁구문이라 불리던 평안북도 의주로 비정하려는 견해도 있다. 검모잠이 평양을 탈환하고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역사기록을 볼 때 평양 이북지역일 가능성이 높다)을 거점으로 고구려 유민들을 조직해 당나라에 항전하는 투쟁을 개시했다. 기록에는 정확히 기록돼 있지 않았으나,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우리들의 상상 이상으로 각지에서 당나라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전민항쟁을 일으켰다. 검모잠부대는 그러한 민중 항쟁부대의 하나였다.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으로 설인귀의 안동도호부는 669년 여름경 평양성을 포기하고 신성(오늘의 신민 료빈탑지역)으로 도망갔다.

검모잠 항쟁부대는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669년 여름 대동강 남쪽지역에서 당나라의 관리들과 중 법안을 처단했다. 그리고 대동강 이남 지역을 기본 활동 무대로 삼았다. 검모잠은 처음 안승과 함께 고구려국의 재건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안승을 한성으로 데려와 국왕으로 내세우자,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항쟁군들은 안승을 중심으로 결집했으며, 반당나라 투쟁에 나선 신라와 협동작전 태세도 갖추었다. 670년 3월 고구려의 태대형 고연무가 지휘하는 정예 부대 1만명을 신라의 사찬 설오유가 지휘하는 정예부대 1만명과 함께 공동작전을 벌여 당나라 군대를 추격해 압록강을 건너 옥골(오골성- 수암)로 진출했다. 4월 4일 고구려- 신라 연합군은 옥골에서 적들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뒀다. 이후 당나라측은 지원부대를 증강하였고, 고구려-신라 연합군은 역량 관계상 전술적 후퇴를 단행해 백성(위치 불명, 압록강계선)계선을 지켰다.

670년 4월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임명된 당나라의 고간은 671년 7월 말갈군대를 앞세워 고구려 땅으로 쳐들어와 안시성(고구려 유민들이 장악하고 있던 성)을 격파하고, 9월에는 4만명의 무력으로 평양까지 침입했다. 그리고 해자를 깊이 파고 토루(토성)를 높이 쌓고 장기전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남쪽으로 진출해 오늘의 황해도 지역까지 밀고 왔다. 고구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역공을 펼쳤다. 이때 고간은 압록강 북쪽까지 쫓겨 났다. 한편 당 고종은 670년 8월 설인귀를 앞세워 수군을 지휘해 바다로 가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싸우도록 명령했다. 설인귀는 고구려 사람들의 용맹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감히 육지로 상륙하지 못하고 해안을 빙빙 돌면서 외교적 방법으로 신라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던 중 670~671년 정주 등지의 앞바다로 침공했다가 신라 수군에게 패전했다.

672년 7월 고간은 당나라 군대 1만명과 이근행의 말갈군 3만명을 이끌고 평양에 침입해 8개 군영을 짓고 주둔했다. 8월에는 한시성(위치불명) 마읍성(평양 서남방에 있는 마읍산에 쌓은 성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을 공격 함락시키고 남쪽으로 나와 백수성(위치불명) 앞 500보 지점에 군영을 만들었다. 고구려- 신라 협동군은 이들의 맞받아쳐 적병 수천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의 당나라군은 퇴각해 매복전을 펼쳤는데, 자만심에 빠진 고구려- 신라 협동군은 매복에 걸려 많은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이후 전선은 교착되었고, 당나라 군대는 계속 보강됐다. 이 틈에 고구려군은 계속 밀리면서 서해안일대에서 많은 땅을 빼앗겼다. 상황이 이처럼 불리하게 돌아가자, 673년 3월 안승은 끝까지 고구려 땅에 남아 항전을 계속하자는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 땅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해 5월 고구려군은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호로하(임진강) 서쪽에서 큰 싸움을 벌였으나 수적 열세로 밀렸다. 그 후 9월에 신라군과 함께 일대 반격전으로 넘어가 당나라 군대와 그 방패 역할을 했던 거란족 말갈족 군대와 9차례나 싸워 크게 이기고 적병 2,000여명을 소멸시켰다. 이해 겨울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우잠성(황해도 금천)을 함락시켰으며, 말갈군은 대양성(강원도 남양구), 동자성(경기도 김포시 군하리)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고구려 신라의 연합군은 좌절하지 않고 완강하게 싸워 적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적들은 다시 임진강 이북으로 쫓겨 갔다.

이렇게 되자 당 고종은 다시 674년 초 유인궤를 계림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20여만명의 대군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치게 했다. 이들은 몇 달 동안 출전 준비를 마치고 그해 가을 요동으로 나왔다. 당시 신라는 백제 옛 땅을 다 차지하였으며, 고구려 남부지역도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 지배층들은 674년 9월 안승을 금마저(익산)로 보내고 보덕왕으로 부르게 했다. 이는 안승을 왕으로 추어주어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 명칭을 없애 고구려국의 복구를 막아보려는 교활한 술책이기도 했다. 675년 초에 대대적으로 침입해 온 유인궤는 2월 칠중성(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크게 싸웠고, 한편으로는 말갈족 군대를 시켜 신라 남부지방으로 침범하도록 했다. 이후 유인궤는 본국으로 소환되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로 당나라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그는 매초성(경기도 양주시 고읍동에 위치)에 주둔하면서 당나라 군대를 지휘했다. 675년 9월에 적장 설인귀는 풍훈을 길잡이로 천성(위치불명)을 포위 공격하다 반격을 받아 1,400명의 유생역량을 잃어버리고 1,000필의 군마, 40척의 배를 잃고 달아났다. 9월 29일 고구려군과 신라군은 매초성에 있던 이근행 휘하의 당나라 20만 대군을 들이쳐 그들을 물리치고 3만 380필의 군마와 그에 맞먹는 병장기들을 노획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당나라 군대는 예성강 이북으로 퇴각했다. 이후에도 당나라 군대는 예성강 이남으로 수시로 침입했으나 그때마다 고구려군과 신라 반격에 부딪혔다.

677년 이후 당나라 침략군은 다시는 압록강 이남으로 침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요동지방과 백두산 지방을 비롯한 고구려 옛 땅 도처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무력항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압록강 남쪽으로 내려올 수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신라의 지배층들이 당나라 침략군들을 고구려 옛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겨레와 국토를 통합할 지향이 있었다면 고구려군과 요동지방을 비롯한 압록강 두만강 이북 각지와 항쟁역량과 손잡고 당나라 침략군을 고구려 땅에서 완전히 몰아냈어야 했고, 그렇게 노력했다면 능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 지배층들은 협소한 계급적 이해에 매몰되어 고구려 땅에서 당나라 침략군들을 완전히 몰아내며, 그 땅을 완전히 통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나라와의 비밀협약대로 대동강 이남만을 확보하는데 만족하고, 더 이상의 투쟁을 중단했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안승의 고구려국을 말살하고 말았다.

검모잠의 안승을 중심으로 고구려국 재건투쟁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들의 투쟁으로 당나라 침략자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남쪽 옛 고구려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그 이북지역으로 쫓겨나고 이 땅을 다른 민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 산성하 무덤떼에서 바라본 위나암성

압록강 지역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국을 세우다

압록강 남쪽지역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과 함께 압록강 유역과 그 북쪽 지역에서도 당나라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중항쟁이 광범히 벌어졌다. 이 때문에 당나라 침략세력들은 자기들의 통치단위들을 제대로 설치할 수조차 없었다. 당나라는 초기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수도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각지에는 9개 도독부와 42개 주, 100개 현을 설치하려고 계획했었다.

하지만 669년 2월 현재 당나라가 압록강 북쪽지역에서 요동반도와 그 부근지역들에 설치하려고 했던 4개 도독부(신성주 도독부, 요성주 도독부, 가물주 도독부, 건안주 도독부)가운데 가물주 도독부 하나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42개 주 대부분도 설치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 통치배들의 지배는 사실상 지상공론으로 되고 말았다. 원래 당나라는 평양성 함락에 기본 목적으로 두었기 때문에 진격해 나가는 길에 있었던 일부 성들만 차지하고 평양성으로 직행했다. 그 결과 수도성이 함락되고 왕조는 멸망했지만 광활한 고구려 영토는 여전히 고구려 유민들의 손에 있었다. 당나라는 669년 중엽 이후 비로소 이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지만(그 이전에는 평양성의 함락과 고수에 발이 묶여 있었다) 본래 계획했던 9개 도독부, 42개 주를 전부 설치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680년대 초까지 4개 도독부(계획; 9개 도독부)를, 10개 주(계획; 42개주)밖에 설치하지 못했다. 결국 당나라는 오늘날 중국동북지역의 무순, 심양, 본계, 요양, 봉성, 개현(건안성)과 그 주변의 일부 지역만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것들도 얼마가지 못했다. 고구려 유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도독부와 주를 설치했던 요동지역에서도 통치단위를 제대로 설치하지 못했고 680년대에 이르게 되면 요동지역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지배층들은 저들의 고구려 영토강점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677년 2월에 기미정책(형식적으로 얽매어 두는 정책)으로 넘어가서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군왕으로 임명해 요동성에 나가 있게 하고, 연남생은 안동도호로 삼아 신성(요빈탑)에 나가 있게 했다. 보장왕은 요동성에 나와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 의지에 고무되어 고구려 재건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다시 연행되어 갔다. 이때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아예 요서지방으로 후퇴시켰다. 이처럼 당나라의 고구려 점령지배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압록강 유역일대에서 활동하던 고구려 유민세력들은 처음에는 안승의 고구려국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한 후 신라 지배층들이 683년 안승을 신라수도로 데려가 신라왕족으로 편입시켜버리자 이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후 그들은 자기들끼리 독자적으로 고구려(고려)국을 세웠다. 그 고구려국의 중심지는 오늘날 신의주시 송안동에 있는 서린동 고성으로 비정된다. 그들은 그 성을 국내성이라고 불렀다. 이 고구려(고려)국은 발해국의 후국으로 포섭됐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요동반도와 오늘의 평안남북도의 대부분지역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구려(고려)라고 불렀다.

압록강 북쪽지역에서 반당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인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개의 소국들을 세웠는데, 그중에서 백두산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요동지역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대중상(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가 세운 진국도 있었다. 진국은 의주 중심의 고구려(고려)국과 함께 당나라 지배세력을 요동지역에서 몰아내는 데서 큰 역할을 했으며 훗날 발해대왕국으로 성장발전해 나갔다.

당나라는 각지에서 거세게 타오르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의 항전의 불길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멸망시켰지만, 고구려 땅을 집어삼키려던 야욕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의 한계를 인정하고 680년대 초에는 요서지역으로 도망갔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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