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라이프 북 리뷰
[서평] 제3세계 민중의 희망을 짓밟다<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Killing Hope -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
▲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윌리엄 브럼 저, 2003, 녹두

중고등 학생 시절,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상 깊은 사진은 미군의 ‘네이팜 탄’에 공격받은 후 울면서 뛰어가는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미국 국무성 외교관이었던 저자는, 미군이 베트남전쟁 이전에 ‘네이팜 탄’을 투하한 지역은 코리아였다고 증언한다.

“미국이 한국전쟁의 잔인성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한 가지 방법은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무렵 그리스에서 사용되었지만 한국전 참전 병사들에게는 거의 처음이었던 무기, ‘네이팜탄’을 도입함으로써였다.

‘3-4일 전 중국군에 의해 진격이 지연되자 네이팜탄으로 공격했다. 마을에는 죽은 사람들을 묻을 만한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마을과 들판에 있던 주민들이 붙잡혀 사살당하고, 네이팜탄을 투하하자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죽었다. 한 남자는 자전거를 타려는 자세로 죽어 있었다. 고아원에 있던 50명의 소년·소녀들은 놀고 있는 그 자세로 죽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약 200명이나 되었다.’”(234쪽)

윌리엄 브럼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반대하여 외교관이 되려는 꿈을 접고 1967년 미국 국무성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워싱턴에서 최초의 대안언론인 <워싱턴 자유언론>의 설립자 겸 편집자가 되었다.

1969년 그는 CIA의 200명 이상 되는 직원의 이름과 주소를 편집한 <CIA의 폭로>라는 글을 쓰고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 유럽, 남아메리카에서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는 윌리엄 브럼이 1986년 출간한 것을 다시 개정하여 1995년에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희망 죽이기(Killing Hope -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이다.

미국의 정부기구 중 가장 많은 예산을 소모하면서 그 내용 자체가 금기시되는 정보기관들, 특히 CIA는 과연 미국 의회와 국민들의 합리적인 감시 아래 놓여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브럼은 그런 의문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처럼 대다수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은 ‘나치 대학살’이 실제로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20세기에 미국 정부가 저지른 대학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한국, 미국, 캐나다, 일본, 유럽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0.01%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 브럼은 ‘미국 정부가 저지른 대학살’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발간했던 것이다.

"나는 (미국 지식인들이) 미국이 저지른 대학살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지 궁금하며, 이에 대해 부인하는 것은 나치 대학살을 부인하는 것과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대학살에 대한 부인의 정도가 너무 커서 부인하는 당사자들은 대학살에 대한 주장이나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의 대학살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1940년대 중국과 그리스에서,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개입의 결과로 불행과 고통의 삶을 살았다."(5쪽)

윌리엄 브럼은 이 책에서 1940년대부터 최근(1990년대 중반)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세계 각국에 개입한 사실들을 다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중국에서부터 이란,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한국, 그리스, 이탈리아, 그리스, 과테말라, 볼리비아, 쿠바, 니카라과, 파나마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까지, 미군과 CIA를 통하여 정부 전복, 선거개입, 암살, 테러, 매수, 선전선동, 심지어 직접적인 무력 침략으로 미국의 이익을 실현시키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미국이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집단인가를 묻고 있다.

또한 김구, 김일성, 주은래를 포함한 미국정부가 기획한 50여 명의 암살 대상자 명단을 공개하고 있으며, CIA가 스파이와 친미 인사로 만들기 위해, 언론, 학교, 여성, 종교 등의 단체와 개인에게 비밀자금을 어떻게 살포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들은 저자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의회도서관에서 찾은 자료와 기밀 해제된 각종 문서를 참고하여 19개 국가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개 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윌리엄 브럼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사실(fact)이다.

그러나 그걸 읽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한 가지는 잘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갑자기 세상 모든 일이 미국과 CIA의 공작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윌리엄 브럼은 194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 정부와 정보기관이 17개 국가에서 취한 각종 범죄 행위가 겉으로는 ‘평화’와 ‘안정’, ‘반공’과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미국 내 자본과 기득권자, 그리고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정치집단의 이익이 목적이었음을 고발한다.

미국 정부로부터 ‘공산주의’라고 지목받았던 제3세계 정부의 정책은 토지개혁, 문맹타파, 여성평등 또는 경제개혁을 추진한다거나 교육 및 의료 시설을 늘린다든가 혹은 (미국 편에 서지 않고)중립주의를 표방하는 걸 뜻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중립주의와 사악함을 구분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와 CIA는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에 대항하여 연합군 동맹으로 전쟁을 치른 중국 공산당을 공격했다. 자국민을 공격한 일본과 싸우기보다는 자국민을 공격한 적이 없는 중국 공산당 군대를 일본과 함께 공격한 것이다.

“미군은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정기적으로 정찰기를 띄워 적군의 위치를 파악했다. 공산당은 미군의 전투기가 빈번하게 그들의 군대에 폭격을 퍼붓고 있으며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마을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느 범위 내에서 이러한 미국의 공격이 이루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공격 중에 많은 미국 전투기들이 추락했으며, 생존자들도 존재했다. 놀랍게도 공산당들은 계속 생존자들을 구출했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으며 그들을 미군기지로 되돌려보내 주었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기에는 여전히 미국이라는 나라의 신비성은 전 세계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이든 국민당이든 중국의 농민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전쟁 중에 중국 공산당은 많은 수의 미국인 비행사들을 구출해 주었으며, 일본군을 통해 안전하게 되돌려 보내 주었다.”(137쪽)

“1954년 중국 정부는 1953년 1월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에 특수 요원을 침투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하여 11명의 미국인 조종사를 억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들 조종사는 2년 6개월 만에 중국의 억류로부터 풀려났다.

또한 베이징 정부는 1951년과 1954년 사이에 중국으로 침투하려던 106명의 미국과 대만요원을 사살했고, 124명을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서류상으로 CIA의 이러한 게릴라 부대활동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러한 작전이 최소한 1960년도까지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144쪽)

2016년 6월 두테르테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지 필리핀은 한국 못지 않은 미국의 ‘가장 오랜 동맹국’이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1899년부터 2016년까지 장장 100년이 넘도록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동맹국가’로 인정받은 필리핀 민중들의 ‘피의 역사’를 모른다.

“1898년 미국과 필리핀 국민들의 공동군사작전으로 스페인이 필리핀으로부터 물러가자 미국은 스페인으보부터 2,000만 달러에 필리핀을 양도받았다. 하지만 이미 자신들만의 독립 공화국을 선언한 필리핀인들은 미국이 자신들의 나라를 단지 한 구획의 부동산 정도로 여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필리핀에 5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일련의 절차(학살과 파괴)를 밟아나갔다. 이리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또한 가장 유명한 식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세기 후 미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는 민족주의자들을 색출해 내기 위해서 다시 한번 필리핀에 상륙했다. 1945년, 미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필리핀의 항일 대항군인 Huks(Hukbalahap의 줄임말, 따갈로그어로 일본군에 대항한 시민군을 뜻함)를 진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강구했다. 미군은 많은 Huks의 부대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한편, 필리핀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많은 Huks의 고위직 인사들을 체포하여 투옥했다. 극동지역에 배치된 미군과 일본에 동조했던 필리핀 군인들로 구성되어 미군 장교의 지휘를 받는 게릴라 부대는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는 Huks와 그 Huks의 동조자들에 대한 공포정치의 형태로 나타났다.”(164쪽)

1961년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미군과 CIA의 지원을 통해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군과 CIA는 4년 후, 인도네시아에서 ‘가짜 쿠테타’와 ‘진짜 구테타’를 배후조종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군사쿠테타를 일으키고 실권을 잡은 놈(수하르토) 역시 박정희처럼 제국주의(네덜란드와 일본) 편에 섰던 장교였다.

CIA는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를 앞세워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거꾸로 썼다. 수하르토는 쿠테타 후 인도네시아 인민들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역시 대학살의 핑계는 ‘빨갱이’ ‘공산주의자’였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거짓과 선동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을 동반했다.

“하급장교들의 반란은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 장군의 지시로 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과 일본 침략자들 밑에서 군에 복무했던 수하르토와 그의 동료들은 하급장교들의 '쿠데타 시도 배후에는 다수의 유력한 PKI(필리핀 공산당) 당원들이 있으며, 그리고 이 공산당의 배후에는 중국이 있다'고 비난했다. 승리에 도취한 군은 작전을 벌여 정권을 강탈했고, 수카르노의 권한을 제한했으며(머지않아 그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에 불과하게 됨), 그리고 모든 PKI 당원들을 일거에 제거하기 위해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반공주의 단체들과 반공주의자들, 특히 회교도들은 PKI 동조자라고 여겨지는 사람의 살해에 가담하도록 종용받았다. 인도네시아 화교들 역시 광적인 열성분자들에게 회생되었다.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을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대학살 중 하나’라고 정의했고, <라이프>지는 ‘미치광이, 피에 굶주린, 사술에 홀린 듯한’ 폭력이었다고 묘사했다.

“25년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외교관들은 최상위 계급에서부터 마을 간부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공산주의’ 스파이 명단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5,000명이나 되는 명단을 인도네시아 군에 인도했으며, 인도네시아 군은 해당되는 사람들을 추적해서 처형했다고 밝혔다. 그 후 미국측은 처형당하거나 제보된 사람의 이름을 명부에서 삭제했다.”(187쪽)

그리스는 한국과 아주 유사한 현대사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저항운동을 하던 그리스의 좌익 게릴라와 민족주의 성향의 게릴라들은, 미군과 미국이 후원하는 나치 협조자들에게 철저하게 학살당했다. 미군과 CIA에게 쿠테타와 고문을 교육받은 군 장교들이 수 차례 군사쿠테타를 반복하면서 자국민들을 수십 년간 학살했다.

“‘페리클레스 이래 가장 골치 아픈 정부’. 이것은 미국의 어느 장군이 한 말이었다. 이 고위 장성이 그렇게도 못마땅하게 여겼던 정부는 1967년 4월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대령들의 임시정부였다. 이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검열, 체포, 구타 및 사형을 집행했다. 그 희생자는 집권 첫 1개월 동안 약 8,000명에 달했다. 임시정부는 뒤이어 이 모든 작전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권력 탈취를 막기 위해서 실시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스 국민들 사이에 부패하고 파괴적인 요소들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소들 가운데는 미니스커트, 장발 및 외국 신문 구독 금지도 포함되었다. 젊은이들은 교회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했다. 탄압은 너무도 잔인하고 거침없이 진행되었으므로 9월경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및 네덜란드는 유럽인권위원회에 이 위원회의 협약 대부분을 위반한 그리스를 고발했다. 그 해가 끝나기 전, 국제사면위원회는 이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그리스에 대표자들을 파견했다. 이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비밀경찰과 헌병대가 앞장서서 계획적이고 상습적으로 고문을 자행’했다.

쿠데타는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이틀 전에 발생했다. 이 선거에서는 자유주의 지도자 조지 파판드레오우가 수상으로 재선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파판드레오우는 1964년 2월 현대 그리스 선거 역사상 유일하게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곧 그를 축출하고자 하는 음모가 뒤따랐고, 이 음모는 왕실, 그리스군, 그리스 주둔 미군, 그리고 CIA 지부의 공동 노력에 힘입어 성공적이었다.

쿠데타를 주도했던 파파도풀로스는 약 15년 동안 CIA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파파도풀로스 대령의 제2차 세계대전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군이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파파도풀로스는 그리스의 저항세력을 추적하는 것이 업무인 나치 보안군 대위로 복무했다. ”(256쪽)

“고문은 그리스 국민에게 지울 수 없는 7년 간의 악몽이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그리스에 파견한 미국 변호사 제임스 벡킷은 1969년 12월 자신의 책에서 고문받은 사람의 수가 줄잡아 2,000명은 된다고 밝혔다. 벡킷이 몇 명의 희생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래와 같은 견디기 힘든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단지 정권을 비난하는 전단지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한편으로는 가혹하고 잔인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좌절과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고문을 당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 고문당했더라도 그 여파는 오래 갈 것이다.’

벡킷은 고문을 가했던 사람들이 죄수들에게 어떤 ‘고문 장비들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 형태로 반입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고했다.”(263쪽)

1980년대 콰테말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레이건과 미국 정부에게 '자유'는 '미국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기준이었다.

"1981년 8월 19일 정체불명의 총을 든 남자들이 콰테말라의 산미구엘 아카탄 시청을 점령해서 시장에게 학교 건립기금을 제공한 모는 사람들의 명단을 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 명단에서 시장의 자녀 3명을 포함한 15명을 골라 이들에게 자신들의 무덤을 파게 한 다음 총살했다.

24개월 후, 전(前) CIA 부국장 버넌 월터즈 장군은 헤이그의 특사로 과테말라에 방문해서 미국은 과테말라 정부가 ‘평화와 자유’를 수호할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기간 동안에만 과테말라 보안군은 공식적 및 비공식적으로 적어도 2,000명의 농민들을 학살했고(물론 통상적인 고문, 팔다리 절단 및 목 자르기가 동반되었음), 여러 마을을 파괴했으며, 그리고 76명의 야당 기민당 당원, 수십 명의 노동조합원 및 적어도 6명의 천주교 사제를 암살했다.

1982년 3월에 발생한 쿠테타에 뒤이어 ‘거듭난 기독교인’ 에프라인 리오스 몽트 장군이 집권했다. 1개월 후 레이건 행정부는 이 나라의 인권 개선 징후를 감지했다고 발표하면서 군사원조물자 선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회로 삼았다. 7월 1일 리오스 몽트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계엄령은 8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그의 집권 초기 6개월 동안 2,600명의 인디오와 농민들이 학살되었으며, 그의 17개월 재임기간 동안 400개 이상의 마을이 처참하게 지도에서 사라졌다.”(286쪽)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하면, 1966년 10월부터 1968년 3월까지 약 3,000~8,000명의 과테말라인이 경찰, 군 및 우익 암살단에 의해서 죽었는데, 종종 민간인 복장을 한 경찰이나 군이 너무 잔인한 만행을 저질러서 정부가 스스로의 소행으로 인정할 수조차 없었다.

또한 선별된 민간인 반공주의 자경단들도 이러한 행위에 가담했다. 1972년 무렵에는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1만 3,000명으로 추정되었다. 4년 후에는 죽거나 흔적도 없이 실종된 사람의 수가 2만 명을 넘어섰다.”(275쪽)

이처럼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일들이 1940년대 이전부터 1990년대 이후까지 미국 정부와 CIA에 의해 이란,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한국, 이탈리아, 볼리비아, 쿠바, 니카라과, 파나마에서도 벌어졌다.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네덜란드와 일본의 군대에 복무한 후 미군과 CIA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테타를 저지른 수하르토,
그리스를 침략한 독일 나치 보안군 대위 출신으로 CIA에 15년간 근무한 후 군사 쿠테타를 저지른 파파도풀로스 대령,
CIA의 협력자와 자금으로 이란의 반정부 시위를 조작해내고 군 장교들을 이용해 정부를 전복한 (나치와 협력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헤디 장군,
아프카니스탄 인민민주당의 당수를 쫒아내고 자리를 차지한 후 개혁을 후퇴시키면서 소련군의 아프칸 출동을 성사시킨 CIA 첩자 아민,
캄보디아를 중립주의로 이끌던 시아누크 국왕을 쿠테타로 축출한 후 캄보디아를 미군의 대 베트남 전쟁의 전쟁터로 탈바꿈시킨 CIA에 매수된 론놀,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 시절 25세의 나이에 프랑스 식민 지방군의 대장을 맡은 후 미군과 CIA에 의해 남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총통으로 오른 응고딘 디 엠,

2차 세계대전 전후 반파시스트 투쟁을 거친 후 농업개혁과 경제개혁을 주장한 이탈리아 공산당과 사회당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무솔리니 파시즘과 군주제에 동조한 기독교민주당과 우익정당을 지원한 미국 정부와 CIA,

미국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선거로 집권한 콰테말라 정부를 (미군과 CIA의 지원을 업고) 군사 쿠테타로 전복한 리오스 몽트 장군,
미군과 CIA의 지도 하에 미국 군사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에 의해 숫 차례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후 수 만명이 구금, 폭력, 강간, 고문, 강제 처형된 볼리비아,
미국 정부의 도움으로 국가수비대를 넘겨 받아 43년간 니카라과에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한 소모사,
미군과 CIA에 의해 훈련받은 장교들과 연이은 군사 쿠테타에 참여하면서 정보사령관으로 온갖 만행과 암살을 저지른 후 1983년 파나마의 군 사령관으로 정권을 장악한 노리에가(그러나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쓸모가 없게 되자 1989년 미군의 침공으로 몰락)

위와 같은 제3세계의 사례를 접하면, 1948년 이승만 정권의 등장부터 1992년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집권한 군인들과 정치인, 그리고 그 정권들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범죄 행위와 인권유린 행위의 배후에 미군과 CIA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는 한국인들 대다수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미 동맹’을 근본적으로 다시 되돌아 보게 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정부와 정보기관은 왜 세계 각지에서 대학살을 저질렀을까?

그 이유에 대해 윌리엄 브럼은 “20. 냉전의 역사”에서 미국의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분야의 권력자들이 “반공주의”라는 무게에 짓눌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즐겨 내세웠던 국제 친선과 신뢰라는 말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점차 희미해진 이야기가 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를 재건하고, 평화와 번영과 정의의 기초를 세울 기회는 무시무시한 반공주의라는 무게에 눌러 무너졌다.”(372쪽)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여름까지 약 1만3천 명의 미군이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 와 있었다. 2년이 흐르고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후에 미군은 소련을 떠났다.

이 때, 처칠은 반혁명 세력인 ‘백군’ 편에서 싸우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및 기타 여러 나라들로 구성된 연합군의 소련 침략을 지휘했다. 몇 년 후, 처칠은 저서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연합군이 소련과 전쟁을 했는가? 그건 틀림없이 아니지만 그들은 러시아인들을 보이는 대로 사살했다. 그들은 소련 영토에서 침략자로 행세했다. 그들은 소련의 반정부 단체에 무기를 지원했다. 그들은 소련 항구를 봉쇄했고 전함을 침몰시켰다. 그들은 소련의 몰락을 간절히 염원하고 계획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충격적이었고 내정간섭은 수치였다. 소련이 자국의 내부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자신들은 관심 밖이라고 그들은 거듭 말했다. 그들은 절대 공명정대하지 않았다.”(373쪽)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을 그토록 놀라게 한 이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연합국은 무엇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싸웠고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던 이 나라를 침략했는가?

"소련은 겁도 없이 독일과 개별적으로 화해를 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적이며, 어떤 식으로도 자국과는 관련이 없는 전쟁에서 발을 빼고, 지치고 황폐화된 러시아를 재건하고자 했다. 나아가 소련은 자본주의 봉건제도를 전복하고 세계사에서 첫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인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소련의 이러한 행위는 연합군의 눈에는 당연히 응징해야 할 범죄였으며, 자국 국민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근절시켜야 할 바이러스였다.”(374쪽)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은 소련과 공정하고 합리적인 경쟁을 원하지 않았다. 소련이 스스로 선택한 체제를 발전할 수 있도록 놓아두지도 않았고, 소련의 정치경제적 결함을 망각할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동시에 소련에 대한 정확한 사실도 정보도 주지 않았다.

반공주의 선전 캠페인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개입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1918년 말, ‘공산주의 위협’, ‘소련의 문명에 대한 공격’, ‘공산주의에 의한 세계 위협’ 등의 표현이 미국 의회의 공식석상에서 발언되거나 <뉴욕타임즈>의 지면을 장식하는 일이 허다했다.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치게 조작되어, 유별나고, 기괴하고, 혹은 왜곡되어 출판될 수도 없고 받아들여질 수도 없었다. 여성들을 국유화하고 영아들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국유재산, 의무결혼, ‘프리섹스’ 등의 온갖 부정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1천여 개 채널을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되었다. 이것은 미국인의 마음에 소련 공산주의자들을 변태적인 범죄자로 각인시키도록 했다. 이런 이야기는 1978년까지 기록되어 있다.”(375쪽)

1920년대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1950년대 매카시즘을 거쳐 1980년대 레이건의 ‘악의 제국 타도’ 운동에 이르기까지 미 국민은 혹독한 반공주의 사상교육을 받아왔다. 반공주의 교육은 미국을 거쳐 한국에까지 전파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친일파와 권력자들에 의해 한국인들의 반공주의는 극단으로까지 치달았다.

미국 시민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식과 소련식 중에서 오직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북이냐, 남이냐”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듯.

이것이 미국과 한국 시민들에게 비친 반공주의의 실상이다. 지식인들 역시 일반 시민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소련과 동구권이 사라진 이후에도 ‘반공주의’가 의미하는 위협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적이 출현했고 만들어졌다. ‘악의 축’이 등장했고 ‘테러집단’이 등장했다. 쿠바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여전히 반공주의의 대상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 이란과 시리아는 ‘미국을 위협하는 적국’이다.

1994~1999 회계연도 ‘국방부 지침’에 담겨 있는 문장은 아래와 같다.

"우리의 첫 목표는 구 소련이나 그 밖의 지역에서 과거 소련과 같은 새로운 라이벌이 다시 출현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도력에 도전하거나 기존의 정치· 경제 질서를 전복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선진공업국들의 이익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우리는 잠재적 경쟁자들이 보다 큰 지역적 혹은 국제적 역할에 대한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이러한 방위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미국이나 한국의 권력자들(정치권력, 군산복합체, 자본권력, 언론권력, 문화권력, 사법권력)이 시민들에게 ‘반공주의’와 ‘악의 축’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적인 이익 때문이다. 권력과 돈과 지배력 때문이다.

냉전이 사라진 1990년대 후반 이후 서구 국가와 제3세계 민중들에게 더 나은 삶이 보장되었는가?

“냉전 후 새로운 세계 질서가 군·산·정보 복합체와 그들의 세계적인 파트너들인 세계은행 및 국제통화기금에게 더욱 유리한 조건을 부여하고 있다. 이들은 나프타와 세계무역기구를 인수했다. 또한 이들은 제3세계와 동유럽의 경제, 정치 및 사회 발전을 지배하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은 이제 이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지난 15년 간 준비중이었던 '유엔의 다국적 기업에 관한 행동규칙'은 사문화되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규제 폐지와 민영화뿐이다. 자본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래로 누려보지 못한 자유 속에 약탈을 위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이들은 마찰도 없고 신중할 필요도 없는 자유를 즐기고 있다. 세계는 다국적 기업에게 더욱 안전한 곳이 되었다.”(19쪽)

윌리엄 브럼은 미국에게 제3세계 민중 학살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사과조차도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독일은 이스라엘과 폴란드에게 사과했다. 소련 역시 폴란드에게 사과했으며, 일본에게는 포로 학대에 대해 사과했다. 심지어 소련 공산당은 ‘서방에게 긴장을 고조시킨’ 외교정책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동독 텔레비전 뉴스캐스터는 시청자들에게 몇 년 동안 거짓 보도를 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일본은 형식적으로나마 중국과 한국에 사과했으며, 또한 미국과 외교적 관계를 파기하지도 않은 채 진주만을 공격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일본이 이미 항복할 준비가 된 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에 대해 언제 사과할 것인가? 소련,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칠레,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 제3세계 국가들에 언제 사과할 것인가? 그리고 FBI와 CIA는 소련의 KGB와 동독의 슈타지(Stasi, 국가정보기관)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 공개적인 해명을 할 것인가?”(20쪽)

[ 2019년 8월 6일]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이장수 운영위원  webmaster@minplus.or.kr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장수 운영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정광연 2019-08-07 01:26:45

    6.25전쟁전 4.3제주학살3만여명 여순항쟁때의 만여명학살 6.25전후로 민간인학살
    도합 민간인만 100만명 경찰과 군인에의해서 김종원 권준옥 박진경 김창용
    백선엽 백인엽 거의전부가 살인에연루된 한국군부. 경찰. 빨치산에게는 네이팜 소이탄.재귀열 세균전등
    그리고 배후에cia 특무대 cic 대표적인 미국인 제임스 하우스만
    내가 수소탄발사버튼 자격이 있다면 바로실행할것임   삭제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