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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당나라, 고구려 영토 차지 실패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9.07.2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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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성 남문

고구려 옛땅을 차지하려 당나라의 흉계

왕조의 종말은 곧 투쟁의 종말이 아니다. 고구려 왕조는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로 당나라의 침략에 굴복하고 종말을 맞았다. 하지만 고구려 민중들은 당나라 침략자들에 맞서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고국을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민중들이 당나라의 지배와 강점 야욕에 맞서 투쟁에 떨쳐 나선 것은 지배계급(왕실 귀족들)의 강요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는 곧 자신들의 삶터와 자주적인 삶을 무참히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고, 삶터를 지키고, 자주적인 삶을 지키려고 투쟁에 나선다.

당나라 침략자들은 고구려 땅을 자기들 영토의 일부분으로 삼으려고 온갖 술수를 다 펼쳤다. 원래 당나라는 신라와 싸우지 말라는 자신들의 권고를 무시한 데에 대한 징벌이며, 순수하게 신라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떠벌렸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를 패망시킨 후 곧장 제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땅을 말할 것도 없이 신라 땅마저 빼앗으려 했다. 원래 당나라와 신라는 648년 비밀협약을 맺어 대동강 이남 땅은 신라 쪽에 넘겨주기로 했었다. 당나라는 이 비밀협약마저 무시하고, 고구려 5부 176개성을 모두 차지하려 했을 뿐 아니라 백제와 신라 땅마저 차지하려 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군사통치기구로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고 2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고구려 멸망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 옛 땅에 9개 도독부, 42개 주, 100개 현을 두고 고구려 사람(투항변절자)들을 그 장관인 도독, 자사, 현령으로 임명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나라 관리들을 ‘참리(통치에 참가시키는 것)’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당나라 관리들이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라는 나라 자체를 아예 없애고, 그 땅을 직할지로 만들려고 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나라 침략자들이 두려 했던 9개 도독부, 42개 주란 어디를 가리키며, 이러한 계획들이 제대로 관철됐는가? 당나라가 설치하려 했던 9개 도독부의 명칭이 〈신당서〉에 나오는데, 그 이름을 보면 ① 신성주(무순을 중심으로 한 요녕성 북부) 도독부 ② 요성주(요양을 중심으로한 요녕성 중부) 도독부 ③ 가물주 도독부 ④ 위락주(해족 거주지역으로 로합하 영금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 도독부 ⑤ 사리주(거란족 거주지역으로 내몽골 동부 길림성 서부) 도독부 ⑥ 거소주(거란족 및 지두우족 거주지역으로 내몽골 대홍안령 산줄기 중부, 동부지역) 도독부 ⑦ 월희주(부여 및 실위족 혼혈 눈강 중상류지역) 도독부 ⑧ 거단주(거란족 거주지역으로 내몽골 시라무렌강 중상류 유역) 도독부 ⑨ 건안주(개주시를 중심으로 한 요녕성 중부) 도독부이다. 이 중 〈구당서〉에 나오는 것은 ①, ②, ③, ⑨ 4개뿐이다. 이 4개 도독부는 대체로 요하계선 동쪽 옛 고구려 영역 안에 있는 요동반도와 그 부근에 있었고, 실제로 도독부가 설치됐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④, ⑤, ⑥, ⑦, ⑧ 5개 도독부는 대체로 해족, 거란족 거주지역으로 고구려의 속령지역에 속했던 곳인데, 이곳에 두려 계획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설치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당나라 침략자들이 설치하려 했던 42개 주들 가운데 〈신당서〉지리지에 보이는 것은 ① 남소주 ② 개모주 ③ 대나주 ④ 창암주 ⑤ 마미주 ⑥ 적리주 ⑦ 여산주 ⑧ 연진주 ⑨ 목저주 ⑩ 안시주 ⑪ 제북주 ⑫ 식리주 ⑬ 불녈주 ⑭ 배한주 14개주 뿐이다. 그 가운데서 〈구당서〉에도 보이는 것은 ① ~ ⑩ 까지 이며 ⑪ ~ ⑭는 설치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볼 때 당나라 침략자들이 원래 설치하려 했던 9개 도독부, 42개주는 제대로 설치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고구려 유민들의 격렬한 투쟁 때문이었다.

주, 군, 현을 설치하려 했던 당나라의 흉계는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으로 파탄 났다.

당나라 침략자들은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을 무릎 쓰고 669년 2월에 도독부, 주, 군, 현을 설치하려 했다. 이때 이적과 연남생이 협의해 앞으로 주, 군, 현을 설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열거했던 대상지들은 다음과 같다.

아직 정복되지 않은 성들 ① 북부여성주( 농안을 중심으로 눈강하류, 북류 송화강 하류, 동류송화강 하류유역 서부) ② 절성 ③ 풍부성 ④ 신성주(무순 고이산성을 중심으로 한 요녕성 북부) ⑤ 도성 ⑥ 대두산성 ⑦ 요동성주(요양 요동성을 중심으로 한 요녕성 중부) ⑧ 옥성주(수암 오골성을 중심으로 한 천산산줄기- 봉성일대) ⑨ 백석성 ⑩다벌악주(백두산 주변 중국 길림성 동남부, 북한의 양강도) ⑪ 안시성(환도성)(부수도 북평양성)

주민이 피난가고 비어있는 성들 ① 연성 ② 면악성 ③ 아악성 ④ 취악성 ⑤ 적리성 ⑥ 목은성 ⑦이산성

이미 투항한 성들 ① 양암성 ② 목저성 ③ 수구성 ④ 남소성 ⑤ 감물주성 ⑥ 능전곡성 ⑦ 심악성 ⑧ 국내주 ⑨ 설부루성 ⑩ 후악성 ⑪ 자목성

당나라 군대가 공격 점령한 성들 ① 혈성 ② 은성 ③ 사성

이적과 연남생이 협의해 주, 군, 현을 설치할 대상지들의 명단을 보면 특이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압록강 이북의 주와 성들만이 언급돼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압록강 이남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주, 군, 현을 설치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압록강 이북에서만 주, 군, 현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적과 연남생이 협의했던 대상지들과 당나라 침략자들이 실제로 설치했을 수도 있는 〈신당서〉지리지에 보이는 14개 주와 많은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아직 점령하지 못한 성들 이름에 신성주(무순 고이산성을 중심으로 한 요녕성 북부), 요동성주(요양 요동성을 중심으로 한 요녕성 중부), 안시성(환도성)(부수도 북평양성)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성들은 〈신당서〉지리지에 보이는 14개 주에 포함돼 있다. 이 중에서 신성주는 무순 고이산성 부근에 있던 신성이 아니라, 요서지방 요빈탑 근처에 설치됐던 신성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원래 고구려 패망 직전 신성이 점령당했었는데, 이적과 연남생의 보고서에는 아직 점령하지 못한 성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그 후 고구려 유민들이 재탈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점령하지 못한 성 중에서 14개 주에 포함된 다른 성들은 670년 이후 고구려 유민들과 당나라 군대와의 치열한 대결전과정에서 당나라가 다시 점령했던 지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적 연남생의 보고서에서는 이미 투항한 성에 속했던 국내성이 14개 주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이것은 국내성군사들이 연남생을 따라 당나라에 투항했기 때문에 그렇게 포함해 놓았지만, 그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이 투쟁에 떨쳐나서서 당나라 지배야욕을 물리치고 그 성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순의 신성(고이산성)

이처럼 압록강 이북지역에서도 고구려 왕조 멸망 이후에도 당나라 군대와 고구려 유민들과의 일진일퇴의 치열한 대결전이 계속됐다. 당나라 지배층들은 고구려 유민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땅을 강점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들은 670년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군대를 보내 압록강 이북 만주 땅을 강점하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러한 시도는 고구려 유민들의 격렬한 투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나라는 군사력을 앞세운 강점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677년 2월 당나라 관리들을 철수시키고 보장왕(고구려의 마지막 왕)을 ‘요동주도독 조선국왕’으로 임명하고 당나라에 연행되어 갔던 일부 고구려 사람들을 보내 요동성(요양)을 중심지로 하는 괴뢰국가를 세워 고구려 사람들을 무마하려는 술책을 부렸다. 동시에 연남생을 ‘안동도호’로 삼아 신성(오늘의 신민 북쪽 료빈탑)에 보내 보장왕을 감독하게 했다.

고구려 땅에서 완전히 쫓겨난 당나라

요동성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나라투쟁에 고무돼 고구려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그는 고구려 유민들과 은밀히 연계를 맺고 나라를 다시 세우려다 당나라 측에 발각됐다. 681년 그는 당나라에 다시 붙들려 갔으며 공주(사천성 공래현)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682년에 사망했다. 이처럼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 침략자들을 쫓아내기 위한 반침략투쟁을 완강하게 펼쳐 얼마 후 신성(오늘의 신민 북쪽 요빈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몰아내고 자기 고장에서 침략자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당나라의 강점 지배 책동을 완전히 분쇄해 버렸다.

당나라 침략자들은 고구려 옛 땅에서 완전히 쫓겨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재침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686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임명했고, 698년에는 다시 ‘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으로 삼아 요동에 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임명했다.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는 그 후도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서 동방침략의 거점으로 책원지로 악용됐다. 705년 안동도독부는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으나 요서지방으로 나오지 못했고, 714년에 평주에 가 있다가 743년에 요서군 고성(하북성 청룡일대)으로 나왔다. 안동도호부는 지덕년간(756~757년)에 최종적으로 폐지됐다. 그것은 요하계선의 동쪽지역은 이미 오래전에 발해 땅으로 됐고, 732~733년 발해- 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한 후에는 다시 요동지방으로 안동도호부를 되돌려 보낼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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