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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분열 없는 한,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구려 멸망의 원인과 교훈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9.07.0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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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당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던 명장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했다. 연개소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죽기 전에 세 아들에게 형제간 화목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귀족들의 농간과 이에 놀아난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서로 반목 대립하면서 권력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큰 아들 남생이 지방순회를 하고 있을 때 동생 남건은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왕명을 내려 남생을 평양으로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남생은 평양으로 가면 죽을 것이라고 예단하고, 반역의 길로 들어서더니, 급기야는 나라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해버렸다.

666년 남생의 아들 연현성이 당나라로 가서 고구려를 치는 길잡이로 나서겠다고 하자, 당 고종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고 쾌재를 부르며 설필하력을 요동도 안무대사로 삼아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했다. 666년 9월에는 연남생에게 ‘특진 평양도행군대총관 겸 사지절 안무대사’라는 벼슬을 줘 고구려계 군사들을 거느리도록 했으며 설필하력과 함께 고구려를 치도록 했다. 설필하력 밑의 행군총관으로서는 방도신, 고간을 임명하였고, 또 설인귀와 이근행으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후원부대를 지휘하게 했다. 당나라군의 선봉장 방동선은 666년 9월에 고구려 땅에 이르러 고구려의 전방방어선을 돌파했다. 이것은 연남생의 투항으로 고구려군의 지휘체계가 마비됐고 특히 서북지방의 거란족, 말갈족 부대의 일부가 남생의 편에 서서 당나라 군대와 싸우지 않아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요동지방에서는 고구려군의 강한 방어로 더 깊이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666년 12월에 당 고종은 고구려에 대한 본격적인 대규모 침공을 위해 당나라 군대를 재편성했다.

666년 12월 연정토(연개소문의 동생)는 자기 관할 하의 12개성의 763호 주민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연정토의 투항으로 고구려의 남동부 지방의 방어력에 크게 약화됐다. 667년 연남생은 당나라 본토로 갔다. 그때 당 고종은 그에게 이미 준 벼슬 외에 ‘사지절 요동대도독상주국 현도군 개국공’이라는 벼슬을 달아주었다. 666년~668년 당나라 침략군의 총수가 나와 있는 역사자료는 없다. 하지만 설필하력 휘하의 군대수만 해도 50여만 명이었으니, 총 무력은 100만명을 훨씬 넘었을 것이다. 또 이 기간에 신라가 보낸 병력 수는 20만명이었다.

신성전투

이세적이 거느린 당나라 침략군은 667년 2월 고구려의 서북방 요충지인 신성에 도착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세적은 부하장수들에게 “신성은 고구려 서쪽의 진성으로서 으뜸가는 요새로 되는 곳이니 이 성부터 깨지 못한다면 다른 성들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역대로 신성이 차지하고 있던 군사전략상 중요한 지위를 적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세적 자신이 647년 전쟁 때에 함락시키지 못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성부터 치자고 했다. 이세적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각오하고 신성 서남쪽에 나무울타리 성을 만들었으며, 공격도 하고 방어를 하면서 오랫동안 싸움을 계속했다. 고구려군은 때때로 성문을 열고 나가서 야간습격전도 벌렸다. 장기간의 포위전 끝에 성안에서는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외부와의 연계도 끊어졌다. 이 어려운 고비에 신성 안에서 반역자가 나타났다. 9월 14일(신미일)에 사부구라는 놈이 불시에 성주를 결박해 성문을 열고 적군에 투항해버렸다. 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그래도 용감히 싸웠으나 7개월 남짓한 기간 버티었던 신성은 드디어 함락되고 말았다. 연남건은 신성함락의 보고를 받고 15만명의 군대를 요수방면으로 보내 신성을 탈환하고 척후도 교란하도록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 남소성에 말갈인부대 3만명을 보내 성을 차지하고 방어토록 했다.

부여성 전투

적장 고간은 667년 10월~11월 경 금산(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으나, 신당서의 기록 순서로 볼 때에는 신성에서 남소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듯함. 〈중국고금 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요녕성 강평현에 있다고 함)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크게 패전했다. 고구려군은 이긴 기세로 북을 울리면서 진격했는데, 설인귀 원군이 나타나 전세가 뒤바뀌고 고구려군이 후퇴했다. 금산전투가 있은 후 668년 초에 설인귀는 부여성(길림성 사평시 일면성) 공격을 개시해, 2월 28일에 성을 함락시켰다. 부여성 공격은 후방의 우환을 없애려 한 것이다. 고구려부 지휘부는 부여성이 함락되기 전에 5만명의 지원병을 보냈었는데, 668년 2월 8일 있었던 설하수(오늘의 개원부근을 흐르는 청하로 비정됨) 전투에서 패배해 부여성을 구원할 수 없었다. 부여성 함락이후 부여주 일대 30~40개 성이 당나라에 투항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부여주의 이 성들은 669년 초에는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성으로 기록돼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를 추론하면 일시적으로 당나라 측으로 넘어갔다가 고구려군들에 의해 다시 수복됐다고 볼 수 있다.

압록강 전투

부여성을 함락시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당나라 침략군 주력은 압록강 쪽으로 밀려왔다. 그들은 도중에 있는 고구려성들은 그냥 두고 곧바로 평양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는 한편 후방의 안전을 위해 설인귀를 시켜 요동반도 해안지대로 돌아 나와 고구려군이 집결되지 못하게 견제하도록 했다. 668년 4월 이후 당나라군의 주력은 압록강으로 밀려들었다. 당시 고구려군은 연남생의 반역으로 지휘체계가 이완되고 역량이 분산돼, 금산전투, 부여성전투, 설하수전투에서 패배해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고구려군은 용감히 싸워 당나라 침략군에게 지속적인 타격을 가했다. 당나라군은 도중에 있는 고구려성들을 거의 대부분 함락시키지도 못한 채 겨우 압록강 북쪽의 대행성을 함락시킨 후 압록강 북안에 총집결했다.

압록강 남쪽에는 고구려 군대가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당나라 군대의 도강을 저지하고 있었다. 당나라의 압록강 도강 작전 저지를 책임진 고구려군의 장수는 연남산이었다. 그는 압록강 이남의 나무울타리 성을 보강하고 방어를 강화했으며, 적들의 압록강 도강을 오랫동안 저지했다. 그로 인해 당나라 군대는 수개월 동안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 채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당나라 침략군은 7월 초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압록강 남쪽의 고구려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그들은 얼마 후 욕이성(오늘의 평북 가산부근)을 함락시키고 8월에는 평양성으로 접근해 영류산(평양북쪽 20리)에 이르러 진을 쳤다.

평양의 보통문

평양 함락

한편 667년 8월 수도 왕경을 출발한 신라군은 당나라군이 빨리 남하할 것을 기대하면서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나라의 독촉을 받고 667년 11월 11일에는 장새(수안)까지 갔으나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서고 말았다. 당시 신라로서는 단독으로 고구려를 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고구려 공격전에서 큰 진전이 없자 668년 정월 당 고종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경험이 많은 유인궤를 고구려 남방에 있는 침략 무력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6월 12일에 유인궤는 당항진에 와서 신라에게 빨리 군대를 내보내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이후 그는 천강으로 가서, 우물거리면서 잘 진격하지 않고 있었던 웅진도독부의 장수 유인원을 강하게 질타했다. 유인궤의 재촉을 받은 신라는 김유신을 대총관으로 임명하고 20만명의 대부대를 조직해 고구려와의 싸움마당에 출동시켰다. 고구려군이 압록강계선에서 당나라군과 혈전을 펼치고 있던 668년 6월 22일에 남쪽에서는 대곡성(황해도 평산), 한성(황해도 신원)의 12개 성 무력이 당나라 장수 유인원에 투항했다. 이것은 신라군의 대규모 출동과 함께 고구려 남방방어에서 대위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6월 29일 대오 정비를 끝내고 출발한 신라군은 평산 안변계선까지 아무런 전투도 없이 북상했다. 이리하여 남부계선에서도 신라- 당 연합군이 평양성 가까이 침입했다.

7월말 ~ 8월 초 신라의 비열성주 김문영이 이끄는 선봉군은 평양성 밑에 도착해 사수벌(보통벌)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이세적 등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합세해 평양성을 포위했다. 평양성은 고립무원 상태에 놓였다. 평양성을 지키던 고구려 군민들은 이러한 악조건에도 신심을 잃지 않고 용감히 싸웠으나, 포위가 한 달 이상 계속되자 지배층 내부에서 동요가 발생했다. 보장왕을 비롯한 귀족관료들은 투항을 결정하고 연남산 이하 귀족관료들을 뽑아 당나라 군영에 보냈다. 연남건은 이를 반대하면서 끝까지 성을 고수하려고 분투했다. 그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를 강화했으며, 자주 성밖으로 군사들을 내보내 적들을 기습했다. 그런데 연남건이 가장 신임하고 군사지휘권을 맡겼던 중 신성이 그를 배반했다. 신성은 은밀히 소장 오사 등을 적진에 보내 몰래 응할 것을 약속하였고, 닷새 후에는 성문을 열어주었다. 평양성 대문, 북문, 평양소성 대문 등으로는 신라군이 선봉이 돼 일시에 적들이 밀고 들어왔다. 고구려의 장수들은 적과 결사적으로 맞서 끝까지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적군이 성안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져 오래 견디지 못하고 성은 함락됐다. 연남건은 자살하려고 검으로 찔렀으나 죽지 못하고 포로가 됐다. 이리하여 근 1000여년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동방의 대 강국으로 거연하게 솟아 있었던 대고구려 봉건국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과 교훈

천년 가까운 역사에서 수십 차례에 걸친 외래 침략세력들을 그때마다 격파 분쇄하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굳건히 지켜오던 고구려가 이처럼 어이없이 자기 존재를 끝마치게 된 것은 심각한 역사적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그것은 내부의 단결이 파괴되고 역량이 분산되면 승리할 수 없다는 것, 특히 내부에서 반역자가 나와 적들과 내통하게 된다면 아무리 많은 무력이 있고, 금성철벽으로 꾸려 놓은 요새 성곽 방위체계가 있어도 제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고구려의 종말과정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심각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계속된 전쟁으로 국가역량이 고갈돼 나당연합군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허무주의적 견해를 광범하게 유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과학적이지 못하며, 패배주의 허무주의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사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의 고갈은 공격하는 측이나 수비하는 측이나 동일하다. 어쩌면 침략하는 쪽이 더욱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와 수십 년 동안 투쟁을 벌여 승리만을 구가해 왔다. 따라서 인적 물적 손실은 고구려보다 수나라 당나라 쪽이 훨씬 심했을 것이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린 것은 인적 물적 자원의 고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신라의 민족 배신적 책동의 결과인 것이다. 내부의 단결이 무너지고, 국가의 역량이 분산되면, 아무리 풍부한 인적 물적 역량을 갖고 있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연개소문 장군이 죽은 후 그 세 아들 사이의 불신과 불화가 고구려 패망의 단초였으며, 여기에는 고구려 귀족 지배층 내부의 권력다툼이 깊숙이 작동하고 있었다. 고구려 귀족층들은 제각각 남생파, 남건 남산파로 갈라져서 분열됐고, 그러다보니 남생은 국가를 배신하고 적에게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고구려 국가 비밀을 송두리째 파악하고 있던 남생이 길잡이가 되어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또한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의 군사적 지휘체계와 방위체계가 마비 상태에 빠져, 당나라 침략에 대해 통일적으로 대응을 벌일 수 없었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고구려의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장기간 전쟁으로 상당정도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661~662년 대규모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연개소문 장군 때인 663 ~665년 사이에 거의 다 수습되고 회복됐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내부 단결을 확고히 보장됐더라면 그 어떤 대적 강적이 덤벼들어도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인적 물적 손실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 분열에 있었다. 투쟁대오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하고 특히 최고통치층 내에서 투항자가 발생한 조건에서 고구려의 군사력은 분산되고 각계 격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존재했던 거의 대다수의 나라들에의 마지막 비극적 운명은 거의 예외 없이 내부의 분열, 단결의 파괴에 의해 초래됐다는 점을 반드시 교훈을 삼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외래 침략세력과 결탁하고 그 앞잡이로 전락해 나라를 망하게 하고 겨레와 민족을 참화 속에 몰아넣은 자들은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범했다는 점을 명백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고구려 내부의 반역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협소한 계급적 이익에 사로잡혀 민족의 이익을 저버린 신라지배세력들의 외세의존 정책 역시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 받아야 마땅하다. 신라의 외세의존 정책의 후과는 그 시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운명에 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부에서는 그 당시에는 민족이 채 형성되기 이전 단계이기 때문에 민족적 관점에서 평가할 수 없다는 견해를 공공연히 떠벌이고 있는데, 그것은 민족의 역사와 현실을 외면하는 주관적 독단에 불과하다. 그 누가 보더라고 고구려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가 한반도로 축소됐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

당시 우리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과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와 맞서 단결해서 투쟁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신라의 배신적 행동으로 당나라 침략자들에 의해 고구려 백제 땅이 강점되었으며, 파괴 약탈당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침략책동에 의해 전 민족적 재난이 계속됐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구려를 비롯한 세 나라의 민중들은 고구려 멸망이후 30년 동안이나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간고한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기간 전쟁과정에 국토는 황폐해지고 경제는 파괴됐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 재산을 잃고 모진 고통을 강요당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적들에게 강제 연행돼 노예로, 천민으로 돼 인간 이하의 천대와 굴욕을 당했다.

또한 오랜 역사적 기간에 이룩해 놓은 고귀한 문화재들이 전면적으로 파괴 약탈당했다. 외세의 강점 하에 놓였던 많은 지역에서 고구려의 수많은 고분들이 도굴대상으로 됐고 1000년이라는 오랜 기간 축적된 기술문화적 진보의 산물인 역사유적 유물들이 파괴 약탈당했다. 당나라의 침략과 신라의 반민족적 행동은 고구려 사람들 뿐 아니라 백제 신라의 민중들에게까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발전에 막대한 부정적 후과를 미쳤다.

그동안 민플러스에 연재했던 글들을 토대로 도서출판 알라딘에서 <새로쓰는 고구려 역사>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북측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인식을 소개함으로서 역사학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사학을 확립하는데 일조하자는 취지에서 집필했습니다. [집필자]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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