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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5.15 09:06
  • 댓글 2
▲ 이덕인 열사 시신[사진 : 필자 제공]

1. 인천의 연수구에 위치한 작은 섬 아암도

아암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마 섬이었을까 싶을 이곳은 매립 이전에는 송도유원지 후문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작은 섬이었다. 개펄 위로 겨우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돌다리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바닷물이 빠진 개펄 위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바닷물이 빠지면 돌다리로 인해 홍해를 연상케 하는 길이 열렸고, 송도유원지를 찾은 시민들은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줄지어 아암도로 향했다. 그리곤 손바닥만한 섬에 올라앉아 바다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러나 면적 1천8백32평에 불과한 작은 바위섬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였는지 인천시가 발간한 안내 책자에서조차 섬 취급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섬이다. 그리고 왜 똥섬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아암도를 "똥섬"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잊혀진 작은 섬, 그 섬에서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 장애인 노점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덕인(남, 당시 29세)이다.

1995년 11월 28일 몹시도 추운 겨울날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다들 인천의 "아암도"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 중인 노점상들이 걱정되어서인지 그날따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노점상 단체의 여성부의장 유희 씨의 입담으로 분위기가 다소 활기차졌다.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지 이 싸움이 끝날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말이 씨가 되지."
"삐삐 왔네, 확인하고 올께…."
"뭐라고? 누가 죽었다고?"

인천 연수구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사자는 덕인이었다. 망루에서 내려간 뒤 행방불명되었던 그는 상반신이 벗겨진 채 온몸에 밧줄이 감겨 아암도 근처 갯벌 위로 떠 오른 것이다. 우리는 인천으로 달려가 곧바로 "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여 사인에 대한 규명에 나서기 시작했다.

2. 눈 맑은 청년 이덕인

최정환 열사 투쟁이 끝나고 장애인과 노점상은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직업을 얻지 못한 이들과 노점상 그리고 장애인이 모여 청계천과 인천 아암도에 새로운 생계 터전을 일구어 나간다. 하지만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단속과 탄압으로 이어진다. 청계천에서만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소속 5명의 장애인과 노점상이 구속되었다.

한편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는 여름부터 인천의 아암도에 노점 좌판을 깔기 시작한다.
바닷물을 만질 수 있고 갯벌에 뛰어다니는 망둥이와 게를 볼 수 있어 인천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아암도는 송도유원지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인해 일대를 3개 지구로 나눠 56만4천 평을 메운다. 아암도 바로 앞 갯벌까지 송도 3지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해안선 백사장에서 돌출한 형태의 작은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1994년 7월 개통된 폭 40m의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아암도 근처에 노점상이 하나둘씩 들어서게 된다.

덕인이와 첫 번째 만남은 1995년 같은 해 3월 장애인으로 강남역에서 장사하다 분신자살한 최정환 열사" 투쟁 후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이를 계기로 몇몇 활동가들이 장애인 운동과 노점상 운동을 병행하게 된다. 청계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 출소한 김종상씨와 함께 인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덕인은 나보다 한 살이 어리다. 턱수염을 기르고 말이 없어서 처음에는 나이가 한참 더 먹었거니 생각하였다. 그도 내가 작아서 자기보다 서너 살 어린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살 많으니 내가 형이네" 했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또 웃었다. 첫 만남부터 시원시원했다. 강해 보이는 인상 속에 맑은 눈을 가진 이였다. 어디서든 그는 눈에 띄었다. 정열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쉽게 눈에 밟혔는지 모른다. 집회 때는 선봉에 서서 구호를 외치거나 언제나 깃발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목소리가 컸고 웃음이 많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일기장에는 가족과 장애인인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일기장에 쓰여 있는 한 구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할지라도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래의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지금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1995년 3월 인천시와 군부대가 용현 갯골수로에서 아암도까지 설치된 군 철책선을 철거하기로 합의 각서를 체결한 뒤, 같은 해 6월 아암도를 중심으로 4백여 미터 구간의 철책선을 철거했다. 그리고 아암도를 하와이 와이키키형 관광위락단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일대에 모래를 부어 인공 백사장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인공 백사장은 사실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얼마 안 가 모래는 바닷물에 휩쓸려 다 없어졌고, 예산만 낭비한 것이 됐다. 더욱이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와 이권 문제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후 이에 관련된 공무원들이 오히려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인천시는 철책선 철거 후 새로 발생한 노점상 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과 대안을 수립하지 않고 공권력과 철거 용역반원들을 투입하여 강제 철거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이 모든 것은 금전적 손실뿐만 아니라 행정력 낭비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었던 것으로 기획단계부터 과욕이 앞섰다. 인천시의 뜨거운 감자였던 아암도는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철거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와 의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암도는 행정기관의 단속뿐만 아니라 지역의 조직 폭력배들과 싸움 또한 만만치 않았다. 95년 9월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 인천의 폭력조직인 소위 '꼴망파'라 불리는 폭력배들이 개입하여 장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좌판을 깔기 시작하면 이들과 싸움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당시 총무국장을 맡고 있던 이덕인은 장애인이지만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었기에 이들과 충돌에서도 언제나 앞장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금품을 갈취하려는 건달들과 맞섰다. 한번은 꼴망파 행동대원들이 아암도 장사 현장에 들이닥쳐 노점 좌판과 포장을 걷어치우기 시작했는데, 덕인은 끝까지 이들과 맞붙어서 돌려보냈다. 폭력배들도 끈질긴 저항에 기가 질려 그가 버티고 있으면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인천시와 연수구청에 단속이었다. 그들은 도로를 뚫고 바다를 메꾸었지만, 정작 노점상에게는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장사를 허가하지 않고 단속을 반복하였다.

그해 10월 나는 인천 새날 청년회 회원과 함께 아암도를 방문하였다. 인천시는 노점상에 대한 행정 대집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이에 대응하고자 망루를 만드는 것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망루는 울산의 현대중공업 농성자들이 거대한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하던 골리앗 투쟁이라 불리던 것을 철거민이 개발지역에서 전술로 응용하였는데, 노점상이 용역 깡패의 단속에 맞서 생존권을 방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등 투쟁은 격렬하고 희생이 컸다. 그날은 늦가을 날씨답지 않게 더웠다. 덕인이와 나는 마침 바닷가까지 차오르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개를 구워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덕인씨? 망루를 세우기로 하였다는데 잘돼?"
"네, 아직은 판단이 잘 서지 않네!"
"사람들 의견은 어떤데?"
"사실 이곳은 동떨어진 해안가이기에 농성자들이 망루 안에 고립될 수 있지. 그리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지 않아서 과연 선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

덕인은 망루를 세우고 단속에 맞서는 것에 대하여 자신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의를 통하여 조직이 결정한다면 따라야 하지 않겠냐며 술을 한잔 털어 넣었다. 그날 아암도 근처는 때마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노을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몇 잔의 술기운 때문인지 덕인의 얼굴도 붉게 타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 인천 아암도의 망루와 철거모습[사진 : 필자 제공]

3. 죽음을 부른 인천 아암도

'인천 장애인 자립추진위'는 물리적인 힘으로 저들의 강제 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심 끝에 1995년 10월경 약 10m 가까운 (망루)을 건설하기로 결의를 모았다.
언제 공권력이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겨울을 맞이한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4시 30분경 며칠 사이 떨어진 기온을 이기기 위하여 농성자들이 전날 피워놓은 장작더미가 거의 타들어가 재로 변할 즈음이었다. 시청과 구청에 동태를 살피던 노점상 회원들에게 연락이 왔다. 포크 레인과 전경 버스 30대, 철거 용역 깡패들이 타고 있던 서우관광 버스 4대가 연수구 일대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애인과 노점상 40여 명은 즉시 총회를 개최하여 망루에 올라가 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노점상 25명은 망루에 올라가 대기하였고, 나머지 20명은 아암도 주차장에서 상황을 보거나 싸움에 대응하였다.

새벽 6시,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병력 8대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 악명을 떨치던 무창용역 소속 철거용역깡패 300명이 푸른색 청카바를 입고 나타났다. 구청 직원 50여 명, 타이탄 트럭 15대, 덤프트럭 5대, 포크레인 3대, 물 대포용 소방차 3대가 아암도에 속속 도착하였다. 다시 한 시간 후 철거 병력 총 1400명이 아암도 현장에 도착하였다.

새벽 7시, 하늘은 이제 막 어둠이 걷히고 인천 앞바다는 서서히 푸르른 빛으로 제 모습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그날따라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 대었다. 바다로 통하는 어통소에서 아암도 방향으로 노점 설치물에 대하여 포크레인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포크레인은 새벽의 정적을 가르며 포장마차와 좌판들을 하나둘씩 찍어 눌렀다. 상인들의 생계수단은 조각조각 뜯겨 아스팔트위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주차창 근처 노점상들은 손 쓸 틈도 없이 흩어져 철거되는 포장마차와 좌판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소방차는 망루 위로 물대포를 마구 쏘아대자 한겨울 바닷바람에 힘이 실려 망루 상층을 흔들어 댔다.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저항을 했지만,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과 노점상에게 물대포는 살인적인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대포 쏘기가 끝나자 포장마차와 좌판을 철거하던 포크레인이 망루 지지대를 찍었다. 높이 10미터가량의 망루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위에 있던 농성자들은 극도의 위협을 느꼈다. 계속 포크레인에 찍힌 지지대를 여러 차례 흔들어대자 조금씩 기울어졌다. 위기감에 처한 망루 위의 농성자들은 인분과 화염병을 망루 아래로 던졌다. 그러나 위협용으로 제작된 인분과 화염병은 곧 바닥이 났다. 농성자들은 죽음의 위협과 싸웠다. 계속된 공권력 앞에 마지막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흩어져 있는 물건과 집기, 심지어는 먹으려고 갖고 있던 무와 감자 등의 식료품을 던지며 필사적인 저항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시간 남짓 시간이 흐르자 포장마차 2개를 제외한 모든 좌판이 철거가 완료되었다. 오전 8시 30분경 사다리가 달린 소방차가 망루에 도착하였다. 경찰은 방송을 통해 농성자들을 상대로 해산하라며 협박을 하였다. 서로 대치된 상태에서 긴장과 함께 시간이 흘렀다. 위협적인 철거가 진행되고 중단하기를 반복하다가 오후 4시, 잠시 조용해진 듯싶더니 동시에 3단의 원형 철조망을 망루 주변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망루 농성자의 탈출을 막으려 했다.

싸움은 밖에서도 이루어졌다. 근처에서 서성이던 한동열의 형 한동일(남)과 이석근의 형 이회근(남)이가 동생 신변을 확인하려고 1t 트럭을 타고 가다 주차장 차도에서 용역 철거반 20여 명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슬 퍼런 눈빛의 철거반들은 이들마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저 새끼들도 한통속이다."라며 달려들어 집중적으로 구타하였고 아암도에서 끌고 나왔다.
부근엔 경찰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외면하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가족 50여 명은 오후 3시경 인천 시청을 항의 방문해 울부짖었다. 시청 측에서는 국장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한 후 전경을 동원해 강제로 시청 밖으로 끌어내었다. 이 과정에서 2명은 실신한다. 인천 시청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50여 명의 가족과 장애인 노점상은 오후 7시경 아암도로 진입을 시도한다. 경찰은 이미 송도 삼거리와 아암도 주변의 약 2km의 거리를 바리케이드로 완전히 막고 모든 차량과 사람의 왕래를 봉쇄하였다. 일부 가족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아암도에 진입하려다 연행된다. 이들은 남편과 자식을 살리려고 경찰과 악에 받친 싸움을 한다. 이 와중에 전투경찰에게 걷어차여 배미옥(여), 박길림(여) 씨가 다치어 인천 시립병원에 실려 가기도 한다. 오후 7시 30분, 이제 인천의 아암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물대포를 맞아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권순희(여)와 한은미(여)는 탈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고자 망루에서 내려오자 경찰은 연행하였다. 권순희(여)의 증언에 따르면 망루 위에는 28명의 농성자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상황으로 총 연행자는 모두 15명으로 늘어나고 면회조차 거부당한다. 쏘아대는 물대포와 돌 세례를 맞아 이미 탈진의 지경에 이른 농성자들에게 공포와 추위 못지않게 허기진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공권력에 의해 일체의 식수와 음식물을 차단 당한 채 뜬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덕인이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다고 기억한다. 대부분 탈진 상태에 빠져 있어도 그는 선봉에 서서

"장애인 생존권을 쟁취하자",
"노점단속 자행하는 김영삼 정권 퇴진하라"
고 구호를 외쳐댔다. 그리고 모여있는 농성자들을 위로하며,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무엇이 됐냐, 우리 가족 먹여 살리려 노점상이 되었단다"
하며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이때 빨간 츄리닝을 입고 선동하던 덕인 이를 경찰은 주동자로 주목하게 된다. 망루 아래의 용역은 "빨간 츄리닝! 내려와, 죽여버린다!"라는 욕설과 협박을 당한다. 11월 25일 오후 1시경 박흥수(남)가 경찰과 협의 하에 망루 위로 올라갔다. 박흥수는 덕인이에게 '빨간 츄리닝이 경찰의 눈에 띄니 옷을 바꿔입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 골덴 바지를 덕인이와 바꿔 입은 후 보급품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약속을 하였다. 망루 밖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경찰을 상대로 집회와 인천 남부경찰서에 항의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및 종교인을 중심으로 안전을 보장토록 촉구를 하였다. 농성자가 먹을 물과 담요 그리고 하루 두 끼의 음식을 올려 줄 것에 대해 요구를 했지만, 경찰은 무시하였다. 남부 경찰서 관계자들은 "죽을 지경이면 내려온다"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오후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노점상과 장애인 등 80여 명이 망루에 있는 농성자들에게 의약품과 물, 빵을 전달하기 위해 망루에서 150m 거리까지 진입하여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제지당하였다. 이어 당뇨병, 폐결핵 환자를 비롯해 부상자에게 전달할 구급약품이라도 전달하고자 노점상 배미옥 씨가 지원하여 재진입을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팔이 뒤로 꺾이는 등 폭행과 폭언을 들으며 구급약 전달은 또 실패하게 된다. 이때 경찰병력은 도로에 전경들이 있었고, 어통소 포장마차 주변에는 백골단과 체포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농성자 중 황재안(남)이는 당뇨 환자라 경찰측에 약품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소변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음식과 의약품을 구하러 망루를 내려간 덕인이는 사라지고 소식이 없었다.

사태의 심각함이 더해지자 이석근은 바닷가 쪽 아래로 밧줄을 내려놓고 보급품이 전달되기를 기다렸다. 26일 오후 11시 15분경 보급품을 찾으려 윤태열이 망루에서 내려왔지만 역시 곧바로 남부서로 연행되었다. 보급품을 찾으러 간 사람은 경찰에 의해 하나둘씩 연행되거나 지쳐나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망루에 있었던 노점상은 '물대포를 맞아 몹시 춥다. 배고프다.' 며 고통을 큰소리로 호소했지만, 절규의 목소리만 바닷가를 맴돌았다. 농성자들은 살인적인 추위와 물대포 세례 속에서 28일까지 5일 동안 죽음과 같은 상황을 견뎌야 했다. 11월 28일 아침 해안가에 한 구의 시신이 포승줄에 포박되고 상의가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덕인이었다. 다시 공권력은 서둘러 망루를 무력적으로 철거하였다. 농성자들은 덕인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의를 상실하고 농성을 해제한다. 그들은 곧 전원 인천남부경찰서로 연행된다.

** 이덕인 열사의 투쟁과 몇 가지 의문을 중심으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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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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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도현 2019-05-15 12:06:23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시절 저들의 눈엔 농성자들은 사람이 아니었죠. 언제 이걸 갚을 날이 올련지..   삭제

    • 박혜연 2019-05-15 10:09:42

      태극기보수우파집안에서 태어난 저도 고 이덕인열사를 추모합니다~!!!! ㅠㅠㅠㅠ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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