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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계속된 당나라 침략을 물리치고...고구려 - 당 645년 전쟁 그 세 번째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9.05.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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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고구려- 당 전쟁에서 참패한 당 태종은 분통이 터져 고구려를 다시 침략할 궁량만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병 치료 핑계로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고구려 재침공만을 꿈꾸었다. 그는 고구려 침략전쟁에서 당한 곤욕에 대해 신하 이정에게 “내가 천하 사람들을 가지고서도 조그마한 이족(고구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이정은 발뺌을 하며 “그것은 이도종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태종의 질문에 이도종은 안시성 전투얘기를 했다. 그때 자신이 비어있는 평양성을 치면 이긴다고 제기했던 사실을 태종에게 상기시켰다. 기분이 나빠진 태종은 “당시는 너무 바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당 태종이 새로운 침략전쟁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자료들임에는 분명하다.

▲ 박작성터에서 바라본 압록강- 멀리보이는 곳이 북녘땅

647년 고구려- 당 전쟁

고구려 재침략을 꿈꾸던 당태종은 드디어 647년 2월 문부백관을 모아놓고 고구려 재침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그 때 당나라 관료들은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쌓고 있으므로 공격해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소규모 병력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자주 공격하자는 새로운 전략을 제기했다. 그렇게 하면 성에 들어가 지키느라고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될 것이며, 이렇게 몇 해 계속하면 민심이 이탈해 싸우지 않고도 압록강 이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 태종은 이 의견을 좇아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를 내보내기로 했다.

647년 3월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 당태종의 휘하 이세적은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신성, 남소성으로 나가게 했다. 고구려군은 다 성에서 나와 그들을 쳐 물리쳤다. 적들은 성주변의 낟가리들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7월에 우진달의 수군은 요동반도로 침공해 100여 번이나 고구려군과 싸웠으며, 적리성(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성) 밑에 이르러 고구려군 1만명과 싸웠다. 그들은 싸움마다 이겼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작은 성 하나 파괴했을 뿐이고 전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숱한 손실을 낸 것이 분명하다. 647년 침공 무력도 결코 작은 역량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구려군민들은 적이 별의별 방법으로 침공해 와도 멸적의 기세로 싸워 이겼다. 결국 647년 침략전쟁도 당나라군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수륙 두 방면으로 침략군을 내보내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해보려 했으나 별 효력이 없었다.

648년 고구려 – 당 전쟁

▲ 박작성터에서 바라본 애하-북평양성 곁을 흐르는 강물

648년 1월 25일 당 태종은 설만철을 대장으로 하는 3만명의 침략군을 수백 척의 누선, 전함들에 태워 산동 반도에서 출발해 압록강 하구로 해 고구려를 치게 했다. 한편 그들이 떠나기에 앞서 4월 14일에 오호진 진장 고신감에게 바다건너 요동반도로 침공하도록 했다. 고구려는 보병, 기병 5000명을 내보내 역산에서 싸워 적군을 격파했다. 그날 밤 1만명으로 증강된 고구려군은 바다로 달아나려고 배에 타고 있던 적들을 향해 야간 습격을 단행했다. 습격 받은 적들은 더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6월 초경에 설만철이 지휘하는 당나라 침략군 본대가 압록강 하구로 침입해 들어왔다. 설만철의 침략군은 먼저 대행성 (667~668년도 전쟁 당시에도 나오는 성으로 압록강 하구 북쪽에 있었던 장성형태의 성)을 공격했다. 그 때 박작성(고구려의 성 중의 하나로, 현재 단둥 시에서 20km 떨어진 호산에 있는 성)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 장수 소부손은 보병 기병 1만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대행성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적군 숫자가 너무 많아 전투에서 매우 불리했다. 소부손은 대행성 전투가 불리하다고 판단해 스스로 퇴각해서 박작성을 지키는 전술로 선회했다. 박작성은 압록강을 자연해자로 험산 산세를 이용해 쌓은 성으로 방어력이 매우 강한 성이었다. 박작성을 두고 고구려군과 침략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그때 고구려 장군 고문이 오골성(수암), 안지성(봉황성)의 군사 3만여명을 이끌고 와 두 방면에 진을 치고 당나라 군대를 포위 공격했다. 당나라군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설만철은 형세가 다급해지자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당 태종을 원망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버티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드센 공격 앞에 도저히 더는 버틸 수 없어, 8월에 숱한 주검을 남긴 채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5일 귀국한 설만철은 전쟁패배의 책임에다 당태종에 대한 원망죄까지 덧씌워 삭탈관직 당하고 상주지방으로 귀양 갔다. 이로서 이 전쟁의 승패를 명확히 알 수 있다. 648년 고구려- 당 전쟁도 고구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661~662년 고구려- 당 전쟁

당태종은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침략야욕을 굽히지 않았다. 새로운 대규모 침략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중에 649년 4월 졸지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는 죽으면서 ‘요동의 역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을 이어받은 당 고종 역시 고구려에 대한 침략야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650년대에는 당나라의 침략으로 크고 작은 전투들이 계속됐다. 하지만 당나라의 침략기도는 번번이 고구려에 막혀 별다른 활로를 찾지 못했다. 당 고종을 비롯한 당나라 지배층들은 당나라 단독공격으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전략으로 고안해 낸 것이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침략전쟁이다. 당 고종은 이러한 전략에 따라 신라와 합동으로 먼저 손쉬운 백제부터 치고, 그 다음 남북 두 방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했다.

신라와의 연합으로 손쉽게 백제를 강점한 당나라 고종은 전승에 도취돼 즉시 고구려 침공을 시도했다. 660년 12월 16일에 당 고종은 설필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유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정명진을 누방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각기 지정된 길을 따라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침략전쟁 당시 고구려에 대한 침략부대는 백제를 침략할 때보다 몇 배나 큰 규모로 편성했다. 당나라 측은 661년 정월 19일 하남, 하북, 회남지방의 67개주들에서 4만 4,646명의 군사들을 모집해 유백영 부대에 편입시켰다. 또 며칠 후에는 홍여경 소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위구르 등지의 군대들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공하게 했다. 이 밖에 방효대를 옥저도행군총관으로 임명했다.

4월 16일에는 부대편성을 바꿔 해전경험이 있는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설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병부상서 임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각각 임명해 총 35개 군단을 이끌고 바다와 육지로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했다. 612년 고구려- 수나라 전쟁 때에도 수양제의 친위부대까지 합해 30개 군단이었다. 이점을 생각하면 661년 당나라가 보낸 35개 군단의 침략무력이 얼마나 대규모인지 충분히 짐작된다. 심지어 당고종 자신도 6개군을 이끌고 출전하겠다고 하다 신하들이 말려 도중에 그만둘 정도였으니, 당나라는 이 전쟁에 자기나라의 모든 군사적 역량을 총동원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나라 침략군의 주력은 요동지방으로 침략했다. 수백만 대군을 맞아 고구려군은 요동지방에서 적들의 침공을 수개월동안 저지시켰다. 그러나 적들은 지난날의 패배를 교훈 삼는다고 하면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고구려성들을 함락시키는데 시간과 병력을 소모시키지 않고 직접 고구려의 수도를 향해 뚫고 나가는 전법을 쓰려고 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압록강 가까이까지 침입했다. 고구려는 연남생이 거느리는 정예군 수만명을 압록강 계선에 배치하고 그쪽으로 쳐들어오는 당나라 침략군들을 막기 위한 방어를 강화했다. 당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강한 반격에 부딪혀 압록강 계선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한편 소정방, 임아상, 방효태 등은 수백척의 함선을 타고 산동에서 떠나 평양서북에 있는 위도(청천강 대령강 하구에 있던 섬으로 지금으로 육지로 되어 평북 박천군 단산리의 한 부분으로 됨)에서 고구려군과 격전을 치르고 계속 남하해 8월에는 패강(대동강)하구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평양성 근처까지 들어온 적군은 마운산을 점령하고 평양성을 포위하려 했다.

원래 작전계획에는 신라와의 남북 합동작전으로 고구려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라군은 백제유민들의 항전을 제압하느라 북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660년 10월~11월에 백제유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한 적이 있었던 고구려군은 661년 5월 9일 장군 뇌음신, 말갈인부대 장군 생해의 지휘 밑에 신라의 술천성(경기도 여주)을 치고 이어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포차를 늘여 놓고 돌을 날려 신라의 방어시설들을 파괴하면서 연속 공격을 들이댔으나 신라군의 완강한 방어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북한산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술천성 북한산성 공격 전투는 당나라와 신라의 남북 합동작전을 저지 파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압록강 일대에서는 12월에 들어서자 날씨가 몹시 추워지면서 강물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적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얼음을 타고 물밀 듯이 밀려와 고구려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압록강 남쪽의 방어진에 튼튼히 의거해 적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고구려군이 압록강 계선을 완강히 고수했고, 적들은 이 계선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결국 쫓겨 가고 말았다. 중국 측 기록들(신, 구 〈당서〉, 〈자치통감〉)에는 이 때 설필하력의 군대가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수십리 추격해 3만여명을 죽였으며 연남생은 겨우 도망갔으며, 고종의 명에 의해 자진 철수한 듯이 써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날조이다. 자신들 역사책인〈구당서〉고려전에는 임아상, 소정방, 설필하력 등이 고구려를 쳤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왔다고 밝혀져 있다. 만일 3만명이 아니라 3천명만 죽였어도 그들은 대서특필해 크게 이겼다고 써놓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들이 침입할 때에도 퇴각할 때에도 요동지방 각지에 있었던 고구려성의 군사들의 반격을 받아 막대한 손실만을 내고 도망갔다.

고구려는 남쪽과 북쪽 전선을 일정하게 수습한 다음 많은 병력을 수도에 집결시켰다. 고구려군이 평양으로 집결하자 소정방의 군대는 도리어 포위당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하고 군량마저 다 떨어져가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소정방은 신라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식량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신라는 661년 12월 10일에 김유신, 김인문, 김진복, 김량도 등 9명의 장군을 시켜 2000여대의 수레에 쌀 4,000섬과 조 2만 2,250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했다. 그들은 고구려군의 방어진을 겨우 뚫고 662년 2월 1일 장새성(수안)까지 도착했는데, 평양까지는 아직도 3만 6천보(약 30km)가 남아 있었다. 김유신등은 보기감 열기 등을 시켜 식량을 전달하기 위한 대책을 취하게 했으며 2월 6일에 김양도 등은 양오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식량과 은 세 포 우황 등을 전달했다. 소정방의 당나라 침략군은 신라의 도움으로 겨우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2월 18일 고구려군은 사수(보통강)벌에서 당나라 군영을 습격해 옥저도총관 방효태를 포함한 많은 당나라 병사들을 살상했다. 방효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소정방은 겁을 먹고 황급히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위에다는 평양에 눈이 많이 와서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소정방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해안가에 정박해 있던 수군함선으로 도망가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그를 따르던 당나라 군사들 대부분은 도중에 전멸 당하다시피 했다. 고구려군은 또한 군량 전달을 마치고 돌아가던 신라군도 맹렬히 추격했다. 많은 손실을 내면서 퇴각하던 김유신은 임진강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라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로서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침략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661~662년 수백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일거에 강점해보려 했던 당나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구려군은 이번에도 나라의 자주권을 영예롭게 지켜냈다. 661년~662년 전쟁은 전쟁 규모 면에서 612년 고구려- 수전쟁이나, 645년 고구려- 당전쟁 보다도 훨씬 더 큰 전쟁이었다. 그리고 고구려로서도 대항하기 더욱 힘든 싸움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남북 양쪽에서 쳐들어온 전쟁이었기 때문에 매우 불리한 정황 속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명장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고구려 영웅적인 군민들은 결사항전을 펼쳐 적군을 물리쳤으며,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영웅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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