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연재 박경순 우리역사
당 태종 고구려에 굴복하다고구려 - 당 645년 전쟁 그 두 번째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9.04.17 10:44
  • 댓글 0

당나라 침략군들은 백암성이 함락된 이후 곧바로 남쪽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쪽으로는 길이 험한데다가 고구려의 크고 견고한 성들이 여러 개 있고 고구려 지휘부에서 많은 군사를 보내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당나라 군대는 다시 방향을 바꿔 요동성으로 해서 안시성, 건안성 쪽으로 나왔다. 이 때 당 태종은 안시성이 험준하고 그 군사가 용감하며, 그 성주 또한 재능 있는 용장이라 하니, 건안성을 먼저 치자고 제기했다. 그런데 이세적이 이를 반대했다. 그는 식량은 요동성에 있는데 서쪽으로 건안성을 친다면 고구려군이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막을 수 있으니 안시성을 먼저 치는 것만 못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란 끝에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 안시성(영성자산성) 입구모습

고구려 안시성 지원군의 패배

당나라 침략군의 주력이 안시성을 주요 공격목표로 정하자, 그리 크지 않은 이 성(둘레가 2,472m)이 역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했다. 고구려가 이 성을 ‘지켜내느냐, 못 지켜내느냐’에 따라 전쟁의 운명이 판가름 나게 되었다. 안시성은 신성, 요동성, 건안성과 함께 요하하류 동쪽에 있는 기본 방어선 상에 있는 기둥 성 중의 하나였다. 이 성을 빼앗기면 적들이 천산산맥을 넘어 오골성(수암), 환도성(봉황성)을 거쳐 압록강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반대로 신성 건안성에 아직도 고구려군 10만여 명이 건재해 있는 조건에서 안시성을 잘 지켜내면 적의 침공 기도는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을 비롯한 고구려군 지휘부는 안시성 방어에 커다란 전략적 의의를 두고 있었다.

6월 11일 요동성을 떠난 당태종은 선발대를 보내 안시성을 포위케 하고 6월 19일 안시성에 도착했다. 당태종의 도착과 함께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됐다. 고구려에서는 안시성 방어에 커다란 전략적 의의를 부여하고 북부녹살 고연수와 남부녹살 고혜진을 지휘관으로 하는 고구려인 부대 14만6천명과 말갈인 부대 약 5,000명을 지원부대로 파견했다. 당나라침략군들은 안시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지원부대와 먼저 싸워야했다. 이 때 고구려군 부대 안에는 나이도 많고 지략도 있는 고정의가 참모로 참전하고 있었다. 그는 고연수에게 “우리는 군사들을 정돈하고 싸우지 말고 오래 끌면서 별동대를 내보내 적의 양곡운반도로를 끊어놓으면 적들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갈려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 그 때야말로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건의했다. 고정의의 제안은 당시 전쟁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전술이었다. 당태종도 이점을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고연수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고정의의 제안을 묵살하고 무모하게 전진해 안시성 40리 밖에 까지 왔다. 당 태종은 고구려군을 유인할 목적으로 좌위 대장군 아사나사이(당나라에 투항한 돌궐의 장수)로 하여금 돌궐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나가 싸우는 척 하게 했다. 그는 앞장에서 싸우다 고구려군에게 화살을 맞았으나 개의치 않고 전진해 고구려군과 싸웠다. 하지만 본래 유인전술이었기 때문에 싸우는 척 하다 마지못해 지는 것처럼 퇴각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원래 돌궐 군대가 강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만심에 빠져 돌궐부대를 추격해 안시성 동남쪽 8리 지점까지 와 진을 쳤다.

당 태종은 사람을 고연수의 진영에 보내 거짓말을 하기를 “나는 너희 나라 강신이 왕을 죽였기에 그 죄를 물으려고 왔다. 그러니 싸우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에 들어와 몇 개 성을 함락한 것은 식량과 마초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갖추게 되면 잃은 것을 곧 돌려주겠다”라고 했다. 고연수는 본래 연개소문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태종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싸울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당 태종은 밤중에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전투전략을 토의한 끝에, 이세적으로 보병 기병 1만 5천명을 거느리고 서쪽 산위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는 정예병 1만 1,000명을 별동대로 삼아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고구려군의 뒤를 치게 했으며, 당 태종 자신은 4,000명의 보병 기병을 데리고 북소리 나팔소리를 내지 않고 기발들을 눕힌 채 북산에 올라가기로 했다. 그리고 북소리 나팔 소리가 울리면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6월 22일 고연수가 바라보니 이세적이 진을 치고 있는 것만이 보였다. 그래서 그와 싸우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고구려군 배후에서 나타났다. 바로 이 때 나팔소리. 북소리가 울리면서 적군이 여러 방향에서 불시에 고구려군 진영에 들이닥쳤다.

고연수는 그제야 적의 계략에 속았다는 것을 알고 군사들을 갈라서 방어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고구려군의 진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통일적인 지휘를 받지 못하게 된 고구려군은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고연수는 남은 병력으로 산에 의지해 싸워보려고 했으나 적군은 그를 둘러싸고 공격해왔다. 또한 적들이 부근 일대의 다리들을 다 허물어버려 고구려군대가 되돌아갈 길을 막았고 새 지원부대가 오는 길도 차단해 버렸다. 이 때 고연수 고혜진은 마땅히 진을 굳게 치고 안시성안의 고구려군과 서로 호응하면서 반격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경험도 없어 군사에 어둡던 고연수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비겁하게도 남은 군사를 데리고 투항하고 말았다.

▲ 안시성 내부 모습

안시성 군민의 영웅적 성 방위투쟁

고연수 고혜진 부대의 패배와 투항으로 안시성 군민들은 일시적으로 동요했다. 하지만 안시성 안의 군민들은 다시 결연한 투쟁의지와 투쟁태세를 구축하고 장기 항전의 길에 들어섰다. 당나라 침략군들은 며칠 동안 대오를 수습하고 성 밖 전투 뒤처리를 한 후 안시성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고 대규모 공세에 달라붙었다. 적들은 포차( 성을 공격할 때 돌을 쏘아 날려 보내는 무기로, 바퀴를 달아 끌고 다녔다.)를 늘어놓고 마구 쏘아댔으며, 당차(아름드리 통나무로 성문을 부수는 바퀴 달린 공성무기 )로 성벽을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그 때마다 적절한 반격을 가해 당나라 침략군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었다. 7월 14일에는 당태종이 직접 안시성 동쪽 산 능선에 올라가서 전투를 지휘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당나라 침략군들은 초조해졌다. 이 때 반역자 고연수, 고혜진은 오골성 녹살은 늙어서 굳건히 지키지 못할 것이니, 당나라 군사를 거기로 보내 오골성을 공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오골성만 함락시키면 평양성을 능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떠벌였다. 여러 당나라 관료들과 장수들도 이 제안을 지지했다. 당 태종이 그 말을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은 “황제가 직접 나선 싸움은 여느 장수들과 달리 위험한 고비를 타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된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군이 10만명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일 오골성으로 향하면 그들이 우리 뒤를 따라 올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이것이 만전을 기하는 방책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그리하여 당나라 침략군은 안시성 함락에 사활적으로 매달렸다.

7월 15일부터 강하군왕 이도종은 안시성 동남 모서리에 흙산을 쌓기 시작했다. 적군이 흙산을 쌓아올리면 고구려군도 성벽을 더욱 높이 쌓아올렸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 장군은 당태종이 친위병까지 동원해 하루에 6~7차례씩 집중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활 쇠뇌로 대응사격을 해 물리쳐버렸다. 적군이 돌을 날려 다락과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를 부수면 안시성 방위자들은 곧 나무울타리를 만들어 막아버리고, 때로는 야간 습격전을 벌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당태종은 성안에서 닭이나 돼지 우는 소리가 나면 이것은 필시 병사들을 잘 먹여 싸우러 나가게 하려는 것이니 오늘밤은 야습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방어대책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8월 10일 당 태종은 다시 안시성 남쪽으로 공격방향을 옮기고 부하장수들에게 빨리 치라고 독촉했다. 고구려 군은 당 태종의 기발이 나타나면 모두 성벽 위에 올라가 북을 치면서 욕을 퍼부었다. 당 태종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노발대발하니 이세적은 성이 함락되면 성안의 사람들을 모두 생매장해 죽이자고 했다. 사로잡은 적병들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안시성 사람들은 더욱 분발해 원수들과 싸웠다. 침략군은 온갖 공성무기들을 다 동원하고 갖은 방법을 다 써가면서 매일 여러 차례 공격해 왔으나 고구려 군은 완강하게 맞서 싸워 매번 물리쳤다. 침략군은 인원수가 많은 것을 이용해 계속 흙산을 쌓아올렸다. 밤낮으로 60일동안이나 흙산을 쌓아올렸다. 그리하여 9월 14일에는 흙산 꼭대기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공격하게 됐다. 강하군왕 도종은 부하인 과위도위 부복애에게 흙산을 지키게 했는데 흙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마침 그때 고구려 군사 수백명이 성이 터진 틈으로 나와서 흙산의 적군을 공격해 그곳을 장악해버렸다. 흙산을 점령한 고구려군은 흙산을 깎아 절벽으로 만들어 당나라군대가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당 태종은 노발대발해 부복애를 참형에 처하고 그 머리를 군부대로 돌렸다. 강하군왕 도종이 맨발로 태종앞에 가서 죄를 청했다. 태종은 그가 자기의 6촌 동생이고 신성전투에서 공로가 있다 해서 사형을 면제해주었다. 당 태종은 흙산을 다시 점령하도록 공격명령을 내렸으나 고구려 군의 결사적인 방어로 끝내 점령할 수 없었다.

▲ 안시성 성벽(토성) 모습, 오른쪽 끝 부분이 흙산이 있었던 곳

안시성전투의 빛나는 승리

안시성 점령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보니 벌써 때는 9월 18일이라 마침 찬바람이 불면서 요동반도에서 풀들이 다 말라버리고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으며 식량도 거의 다 떨어져 갔다. 당 태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당태종이 총퇴각 명령을 내려 줄행랑을 놓자, 연개소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로 추격전을 펼쳐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까지 진출했다. 지금도 베이징 북방 30리 지점인 베이징시 순의현에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을 때 만들어졌다는 군영자리가 남아 있다.

9월 18일 당태종의 총퇴각명령으로 90일간의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의 빛나는 승리로 마무리됐다. 안시성 전투 승리는 살수대첩이후 고구려가 거둔 역사적인 대 승리로 기록된다. 안시성 군민들은 고연수, 고혜진의 지원부대가 패한 어려운 조건에서도 불굴의 투지와 기개를 잃지 않고 높은 애국심으로 일치단결해서 대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적의 대병력과 맞서 용감히 투쟁했으며,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안시성 전투의 승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애국명장 양만춘 장군의 역할이다. 90일동안 막대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의 수십만 대군과 맞서 싸워 기필코 빛나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뛰어난 군사적 지략과 임기웅변의 전술을 능란하게 구사해 승리를 쟁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시성 싸움 승리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또한 고구려 수군의 역할이다. 당나라 침략자들이 퇴각하게 된 데는 고구려 수군의 적극적인 적후 교란활동으로 식량공급이 막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구려 수군은 산동 반도 부근의 옛 대인성에 저축해두었던 식량을 나르는 적의 식량수송선들과 함선들을 수많이 파괴하고 불살라 적의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당태종이 9월 18일 총퇴각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식량공급 문제 외에도 퇴로차단에 대한 심각한 우려도 작용했다. 당시 고구려군은 연개소문 장군의 지휘 밑에 이세적이 처음 침공한 통정진- 현도성간의 길과 통정진에서 대릉하로 통하는 길을 모두 봉쇄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시간이 갈수록 고구려의 포위진이 좁혀지고 있어 자칫 퇴로가 막힐까봐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당태종이 총퇴각을 결심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고구려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으로 당나라 북방에 있었던 설연타의 우두머리인 진주극한과의 비밀협약을 맺어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올 때 북방에서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했었다. 진주극한은 당나라가 두려워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9월 초 진주극한이 죽고 그 아들 다미극한이 왕이 되자 고구려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당태종이 없는 틈을 타서 하남(황하이남)으로 쳐들어갔다. 이것 역시 당태종에게는 새로운 근심으로 됐다.

기본전선인 안시성 전투에서 곤경에 빠져 있던 당나라 침략군들은 고구려 수군부대의 활동과 연개소문 장군의 외교 군사활동으로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전멸적인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직감하고 서둘러 총퇴각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리하여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돌아가고,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쟁취했다.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그야말로 참패를 당했다. 그들은 전과를 과장해 자신들의 참패상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당나라 측의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당 태종은 이번 원정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645년 고구려- 당전쟁은 당태종의 오랜 준비와 소위 신통한 전략전술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조국방위전쟁에 떨쳐나선 고구려 군민들의 결사항전으로 당나라의 참패로 막을 내렸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