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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과 살수대첩수나라 2차 전쟁 그 두번째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9.02.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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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에 막혀 더 전진을 하지 못하자 조바심이 난 수양제는 특단의 대책을 새롭게 세웠다. 그것은 별동대를 꾸려 우회해서 곧바로 평양성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수양제는 병력을 떼 내 9개 군단을 따로 편성해 요동성 쪽을 피해서 요동반도 남쪽으로 나가 수군무력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도록 조치했다. 지금까지는 평양성을 아무런 의심 없이 오늘의 평양으로 봤다. 하지만 당시 전쟁지휘부는 수도 평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수도 북평양에 있었다. 부수도 북평양성은 처음 요동성(요사지리지에서는 요양성을 평양성이라고 써놓았다)에 설치됐다가, 4세기말 5세기 초에 봉황산성으로 옮겼다. 이 북평양성은 고구려 말기에 환도성, 안지성, 북평양성으로 불렸다. 수도 평양과 요동성 사이의 거리는 천리나 떨어져 있고, 또한 수많은 방어계선이 쳐져 있으며, 압록강 청천강 등 큰 강들이 있다. 이런 조건에서 수도 평양성 공격 전술을 군사학적으로 보면 도저히 나올 수 없다.

▲ 북평양성에 있던 봉황산성

평양성(북평양성) 전투승리

평양성공격 전략으로 수양제가 채택한 수륙 협공 전략은 고조선- 한나라 전쟁 당시 한무제에 의해 처음 채택됐던 전략으로 한나라군의 참패로 끝났었다. 수륙협공 전략의 가장 큰 약점은 당시의 조건에서 효율적인 협공을 전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수양제는 협공 전략을 고수했다. 그는 수군 대장 내호아에게 수군무력 10만명을 먼저 평양성(북평양성) 부근에 진출시켜 교두보를 만들고 있다가 육군이 도착하면 연합해 총공격을 가해 평양성을 함락시키도록 지시했다. 내호아가 거느린 수군은 6월초 경 북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패수(압록강)어귀에 도착했다. 수군 대장 내호아는 기본 무력이 다 전선으로 나간 조건에서 후방에는 병력이 얼마 없을 것이라고 타산했다. 단독 공격으로 평양성(북평양성)을 함락시켜 공을 가로채자는 욕심이 생겼다. 내호아는 10만 명의 수군 무력 중에 4만명을 선발해 평양성(북평양성) 단독 공격 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평양성(북평양성)은 왕의 아우인 고건무(훗날의 영류왕)가 지휘하는 얼마되지 않은 무력 밖에 없었다. 고건무는 유인전술로 적의 공격을 무너뜨리려는 계책을 사용했다. 그는 북평양성의 외성을 일부러 비워놓고 내성(봉황성) 으로 후퇴하면서 빈 절간에 수백 명의 군대를 매복시켜 놓았다. 수나라 수군은 매복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외성 안으로 들어와 노략질에 여념이 없었다. 바로 그 때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일제히 나타나 적군들을 들이쳤다. 그와 동시에 내성에 있던 군사들도 문을 열고 나와 합세했다. 노략질에 여념이 없던 적군들을 황망히 도망쳤으나, 고구려군에 의해 완전히 섬멸되고, 일부 소수의 병력만이 황망히 도망쳤다. 고구려군은 도망자들을 추격해 선창가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적의 부총관 주법상이 대오를 정비하고 진을 치고 있어, 고구려군은 더 이상의 추격을 중단하고 되돌아왔다.

평양성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적 수군 4만 명 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천여 명에 불과했으니, 하나의 전투치고는 어마어마한 대승이었다. 적 수군은 고구려군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으며, 고구려의 수군이 공격해 올까 두려워 멀리 요동반도 남단쪽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내호아의 수군이 먼저 패전해 퇴각하지 않았더라면 우문술 등의 9군과 서로 돕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하면서 살수대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양성 전투 승리는 요동성 전투 승리, 살수대첩과 함께 612년 수나라 양제의 침략에 대해 고구려의 3대첩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데, 고구려군대의 기묘한 전술과 대담성, 용감성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동반도 수암 근처의 소자하(초자하)

수양제의 지시로 별동대로 조직된 수나라 9군은 30만 5천 명으로 구성됐다. 적 9군은 회원진과 노하진에 가서 식량과 무기를 새로 보급 받았다. 그들은 식량 100일분, 갑옷, 방패, 창삭, 옷가지, 천막 등을 다 각자가 가지고 떠나도록 명령을 하달 받았는데, 한사람이 도저히 지고 갈 수 없는 무게였다. 9군 병사들은 숙영지 천막 안에서 몰래 땅을 파고 식량부터 묻어버렸다. 수나라 별동대 9군은 6월말 7월초 노하진 회원진을 출발했다. 노하진 회원진을 출발한 수나라 별동대는 요하하류를 건너 오렬수(오늘의 태자하)로 나왔다. 식량을 땅에 다 파 묻어버리고 출발한 적 9군은 오렬수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식량부족으로 굶주리게 됐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책들에서는 수나라 9군이 회원진을 떠나 집결한 오렬수(오늘의 태자하)를 압록수로 잘못 기재하고, 압록수를 오늘의 압록강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수나라 별동대 9군의 목표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보고, 압록수(압록수)- 살수(청천강)- 평양 경로로 진격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살수가 청천강이라면 심각한 모순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수서〉양제기,〈자치통감〉등에 따르면 수나라 대군이 살수에서 대패한 것이 7월 임인일(24일)이었는데, 요동성 부근에 있던 수 양제가 패보를 받고 너무 급한 나머지 총퇴각명령을 내린 것은 그 이튿날인 계묘일(25일)이었다. 만일 살수가 청천강이라면 거기에서 패배한 수나라 군대가 정신없이 하루 밤 하루 낮 사이에 450리를 뛰어 압록강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압록강에서 요동성까지는 다시 600리 이상이나 남아 있다. 극도로 피로한 수나라 패잔병들이 다시 죽음을 무릎 쓰고 뛰어갔다 하더라도 그 이튿날까지 수양제가 있던 요동성 서쪽까지 도착할 수는 없다. 청천강에서 요동성까지는 적어도 2~3일은 족히 걸릴 수밖에 없다.

수양제가 살수에서 고구려 군대에 대패한 바로 이튿날 전투결과를 보고받고 총퇴각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여러 역사책들에서 확인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살수에서 450리 죽자 사자 뛰어서 도착했던 압록수가 요동성에서 600리 이상 떨어진 압록강이 아니라는 것을 확증해준다. 그 압록수는 수양제가 머물었던 요동성 서쪽으로부터 몇시 간이면 갈 수 있는 200리 이내에 있는 그런 강일 수밖에 없는 강인데, 그런 강으로서는 오렬수(태자하) 밖에 없다. 오렬수를 압록수로 잘못 기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요동성으로부터 살수까지의 거리는 천리이상 떨어져 있을 수 없고, 수백 리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청천강은 요동성으로부터 천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살수일 수가 없다.

살수대첩에 등장하는 압록수는 오늘의 압록강이 아니라 오렬수(오늘의 태자하)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나라 별동대 9군이 집결한 압록수 서쪽은 오늘의 우장지역으로 비정된다. 그렇다면 살수는 그곳으로부터 450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강일 수밖에 없고, 그런 강은 오늘의 수암 근처에 있는 소자하(초자하 哨子河)이다.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동반도 동남부를 흐르는 대양하의 큰 지류인 소자하이다. 소자하의 사리채 부근에서 수암 해성을 거쳐 요하 동쪽의 우장까지의 거리는 수나라 리수로 450리가 된다. 또 소자하라는 강 이름과 살수라는 강 이름은 발음상 서로 통하며, 소자하는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므로 수나라 군대가 살수를 동쪽으로 건넜다는 역사서의 기록에도 부합된다.

살수의 위치 문제에서 이러한 혼란이 발생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나라 군대의 행동경로로서 압록수- 살수- 평양의 큰 경로만 보았지, 고구려- 수 전쟁을 기록해 놓은 역사서들에 나오는 오골성, 백석산, 환도성 등에 대해서는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또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서 언제 싸웠고 언제 되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따져보지 못했다. 즉 오골성이 오늘날 수암 지역에 있었고, 백석산이 수암- 해성 사이에 있었으며, 평양성이 환도성으로도 묘사되어 있는 기록(〈수서〉권 4, 대업 10년 2월 신묘)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오골성을 봉황성으로 잘못 비정했고, 그 결과 수나라 군대의 행동경로를 잘못 보았던 것이다.

▲ 유유히 흐르는 살수(소자하)

살수 대첩

우중문이 지휘하는 수나라 별동대 30만명은 오렬수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식량이 바닥나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새로운 방면으로 수나라 대군이 밀려온다는 정보를 접한 고구려군 지휘부는 강화담판교섭 명목으로 을지문덕 장군을 적진에 보냈다. 을지문덕 장군은 적진에 들어가 우중문 우문술과 강화담판을 벌였다. 고구려 측의 의도는 실제로 강화 담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진에 직접 들어가 적의 허실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9군 지휘권을 가진 우중문은 수양제로부터 을지문덕이나 고구려왕이 나타나면 사로잡으라는 밀명을 받은 터라 을지문덕 장군을 구금하려 했다. 그 때 위무사 유사룡이 그렇게 하면 고구려 측의 항복을 받을 수 없다며 만류했다. 우중문은 우사룡의 만류로 을지문덕 장군을 구금하지 못하고 놓아주었다. 대담하게 적진 속에 들어가 적정을 내탐해 수나라 군대가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을지문덕 장군은 되돌아서 강을 건넜다. 그 때 우중문은 수양제의 비밀지시를 집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급히 사람을 강가로 보내 더 할 말이 있으니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으나, 을지문덕 장군은 돌아보지도 않고 강을 건너 돌아와 버렸다.

식량이 바닥나고 병사들이 굶주리자 수나라 진영에서는 동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문술은 식량이 다 떨어졌으니 돌아가자고 고집했으나, 우중문은 계속 공격을 주장했다. 우중문에게 총 지휘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문술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우중문을 따라 강을 건너 을지문덕 장군 부대를 추격했다.

을지문덕 장군은 적군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을 피로하게 만드는 전략을 썼다. 그리하여 하루에 일곱 번 싸워 그 때마다 패하는 척 하면서 후퇴했다. 그러자 적군은 고구려군이 약해서 패하는 줄로 착각하고 의기양양해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고구려군은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철저한 청야전술로 적군이 식량 한 톨도 구할 수 없도록 마을과 들판을 텅텅 비워 놓게 했다. 적군이 오골성을 지났을 때 고구려군이 갑자기 나타나 수나라군대의 후방 치중부대를 급습해 식량과 군수기자재를 못 쓰게 만들어 놓았다. 우중문이 군대를 돌려 반격하니, 고구려군은 또 지는 척 하고 물러났다. 적군은 드디어 살수(소자하)를 건너 7월 17일 경에는 평양성(북평양성) 서쪽 30리 지점까지 들어 왔다. 당시 우중문의 30만 대군은 오렬수(역사서들에서는 압록수로 잘못 기재됨) - 오골성 – 살수 – 평양성의 경로로 을지문덕 군대를 추격해 왔다. 여기에서 오골성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정확히 하는 것은 살수의 위치를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오골성을 오늘의 봉황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정은 틀렸다. 612년 전쟁 당시 봉황성은 고구려의 제2환도성으로 북평양성으로도 불렸으며, 고구려의 전선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봉황성은 오골성으로 될 수 없다. 오골성은 고구려 오골성주 소재지로서 오늘의 수암부근에 있었다.

우중문의 군대가 평양성(북평양성) 서쪽 30리 지점에 도착했을 때 고구려 전선사령부에서는 적을 더욱 굶주리게 할 요량으로 휴전을 제의했다. 그런데 닷새가 지나도록 고구려 진영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닷새가 지나자 을지문덕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그만하면 전공을 세웠으니, 되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야유하는 시 한수를 보내고, 당신들은 수군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수군은 이미 평양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달아난 지 오래니 공연히 기다리지 말라고 조롱했다. 우중문의 수나라 군대는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가면서도 손실을 적게 내려고 방진대형을 짓고 달아났으나, 각지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사방에서 수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7월 24일(임인일)에 적군은 살수에 이르러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적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뒤에서 추격해 오던 고구려군대와 살수 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가 일제히 떨쳐 일어나 총공격을 개시했다. 살수의 동쪽에서는 적군이 도하를 준비하느라고 무질서하게 돌아치고 있었고 살수의 서쪽에서는 막 강을 건넌 적군이 미쳐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대가 총공격을 개시하니, 적군은 미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했으며, 강 동쪽에서는 수나라 9군의 우둔위 장군 신세웅이 얻어맞아 죽었다. 이렇게 되자 적군들은 더욱 당황해 대혼란상태에 빠져들어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강 서쪽에서는 고구려군의 대부대가 적군을 향해 돌격하니, 적군은 완전히 와해돼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중에서 적장 설세웅의 부대는 백석산까지 갔으나 고구려군의 포위에 빠져들어 거의 다 섬멸됐고, 설세웅은 겨우 200여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포위진을 뚫고 달아날 수 있었다. 7월 24일 살수 전투에서 적 9군 30만 5,000명 가운데 압록수(오렬수; 태자하)까지 하루사이에 450리를 뛰어 달아난 사람은 겨우 2,000여명에 불과했다. 적군가운데 10만명은 죽고, 20만명은 포로로 잡혔다.

겨우 살아 돌아온 자들을 통해 패전보고를 받은 수양제는 대경실색하여 살수싸움 다음날인 7월 25일(계묘일)에 총퇴각 명령을 내리고 황급히 철수했다. 요동성 부근에 있었던 수나라 군대는 가지고 갔던 군수기자재들을 모두 버리고 황황히 퇴각했다. 요동성 근처에서 싸우던 고구려 군대는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쫓아가 수많은 적군을 무찔렀다. 황급히 퇴각한 수양제는 9군 장수들에게 살수전투에서 대참패의 책임을 물었다. 우문술은 사돈벌이 되므로 죽이지는 못하고 평민으로 내치고, 위무사 유사홍은 참형에 처했다. 우중문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었다.

살수대첩은 전 세계적으로 중세 역사에서 보기 드문 대승이었다. 특히 한 개의 전투지역에서 그것도 넓지도 않고 좁은 지역에서 하루사이에 30만명의 대군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대 승리는 고구려 군사들이 얼마나 용감했으며, 고구려군 지휘부가 얼마나 신출귀몰한 전략전술을 구사했는가를 잘 웅변해주고 있다. 살수대첩의 승리로 612년 고구려- 수나라 제2차 전쟁은 중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록되면서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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