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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멸로 끝난 수나라의 고구려 1차 침공[박경순의 고구려사](24) 민족의 기상을 드높게 떨친 고구려–수나라 전쟁1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9.01.0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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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사에서 영웅적 투쟁과 위대한 승리의 기록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첫손을 꼽으라면 살수대첩으로 표상되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다. 여기에서 보여준 고구려 사람들의 영웅적 투쟁과 승리처럼 감동적인 드라마는 없다. 고구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을 익히고 단련했으며, 높은 민족적 긍지와 씩씩한 기상을 자랑했다. 고구려 사람들의 높은 민족자존심과 상무적 기풍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워 나라의 자주권을 튼튼히 지키고, 빼앗긴 겨레의 강토를 되찾아 강대한 나라로 만드는 원동력으로 되었다.

6세기말~7세기 초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수십, 수백만 대군을 앞세워 수차례 침공해 왔으나, 침략자들에게 만회할 수 없는 커다란 타격을 주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특히 612년 수나라 30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 군민의 투쟁은 세계적으로 볼 때 고대, 중세의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승리로 기록돼 있다. 지금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전쟁의 기록들을 상세히 살펴보려 한다.

▲고구려- 수나라 전쟁 시 전선사령부가 있었던 고구려 부수도 북평양성

전쟁 전야의 정세

양건(수나라 문제)은 581년 북주의 정권을 차지하고 수나라를 세웠다. 수나라는 초기에는 고구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로서는 내부 통합과 돌궐문제가 더욱 시급했다. 수나라 건국초기 북방에서는 돌궐족의 침습이 그치지 않았고, 동북방에서는 북제의 잔여세력인 고보녕 등이 일부 폭동군과 합세하거나 돌궐 군대를 끌어들이기도 하면서 수나라 변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방에서는 진나라와 맞서고 있었으며, 서남방에서는 토욕혼의 침입으로 곤경을 치르고 있었다. 또한 정권 공고화를 위한 내부 수습이 선결되어야 했다. 새 법률을 제정하며 관료들의 등급을 정하는 등 자체 내부의 새 제도 질서를 세워 나가야 했다.

수나라는 583년 돌궐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다. 이 공격은 수나라에게 승리를 안겨줬고, 동북방의 골칫거리였던 고보녕도 유주군대와 싸움에서 패해 거란 쪽으로 달아나다 피살됐다. 수나라의 북방정세는 일정정도 안정됐고, 고구려와도 국경을 직접 맞대었다. 수나라 지배층은 이 무렵부터 고구려 침략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었던 거란족들을 끌어당기려고 획책했다. 수나라가 돌궐을 물리치고 고보녕 세력마저 꺾어버리자, 강자의 편에 서는 습성이 몸에 밴 거란족들은 수나라의 유인정책에 넘어가 584~585년 경 장성부근에 가서 수나라와 무역관계를 맺었다. 수나라는 589년 남방에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고구려는 새로 등장한 수나라를 구체적으로 요해하고 중국대륙의 새로운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581년~584년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 사신들은 수나라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향후 수나라의 대고구려 정책을 알아보려 했다. 그 결과 수나라가 장차 고구려를 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하고 590년까지 국교를 단절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다 591년, 592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폈다. 한편 수나라는 590년대 중엽에 이르러 경제, 군사 역량이 급속히 강화됐다. 또한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던 거란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데서도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수나라는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합했을 뿐 아니라 주변 지역 종족들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해 주변에서는 고구려만이 큰 강국으로 남아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 양자의 대립은 날로 첨예해졌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자신의 영향 하에 있었던 거란족을 빼내가고, 고구려 침략의 전초기지로서 영주총관을 설치하자, 정식 외교 관계를 중단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그러다 597년 수나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수나라 문제는 이 사절단에게 국서를 보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그동안 수나라 침공에 대비한 고구려의 조치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 국서에는 “말갈을 강박해 내몰았고, 거란을 굳이 금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고구려가 말갈족 부대들을 동원해 수나라의 변방을 쳤으며, 자기 영향 하에 있는 거란족들이 수나라에 가 붙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단속했다는 것이다. 국서에는 또한 “전년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들을 꾀였으며 사사로이 쇠뇌기술자들을 데리고 제 나라로 달아났다”고 했으며, 사신이 고구려로 가면 “빈 객관에 앉혀놓고 엄격하게 지켜 사신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막았으며”, 또 “자주 기마병들을 보내 변방사람들을 살해했다”라고도 했고, “늘 사신을 보내 가만히 소식을 알아냈다”고 밝혀져 있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가 자신의 무장장비 개선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적군의 무기 성능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해 강경 외교정책을 쓰면서 수나라 사신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고구려 내정을 탐지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수나라의 침략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군사들을 보내 수나라 변방을 치기도 했고, 수나라 동정을 살피기 위해 정찰을 강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점장대에서 바라본 북평양성 내부

1차 고구려 - 수 전쟁(598년)

위에서 언급한 수 문제의 국서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문이었다. 수나라는 그 국서에서 고구려왕을 내쫓고 다른 관리를 보내겠다는 망발을 하는가 하면, 장군 한 명을 보내면 고구려를 능히 멸망시킬 수 있다고 위협 공갈했다. 또 ‘요수의 너비가 장강에 비하면 어떠하다고 생각하며, 고구려의 인구가 진(陳,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 때 남조의 맨 마지막 왕조로서 수나라에 의해 멸망)나라의 인구와 비하면 어느 쪽이 많다고 생각하느냐’는 등 진나라를 멸망시킨 수나라의 강대성을 내세워 고구려의 굴복을 강압했다.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선전포고문(국서)을 받은 고구려의 영양왕(재위기간 590년~618년)은 598년 초에 자신이 직접 고구려 부대와 말갈인 부대 1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영주(요서지역의 중심지로 대략적으로 오늘날의 조양근처)를 들이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이것은 수나라가 먼저 선전포고한 조건에서 선제적 예방 타격작전이었다.

패전 소식(〈수서〉고려전에는 이 때 영주총관이 반격해 격퇴시켰다고 썼으나 그것은 엉터리없는 기사다)을 들은 수 문제는 한왕 량(수 문제의 다섯째 아들 양량)과 왕세적을 행군원수로 임명하고 수륙군 100만 명을 출동시켜 고구려를 치러 떠나게 했다. 영주 패전소식을 듣자마자 고구려를 침공한 것은 이미 전부터 고구려 침략전쟁을 다 준비하고 해당 무력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 때 한왕 량, 왕세적의 휘하에는 행군총관으로서 원포, 한승수, 두언, 우문필, 장윤 등이 있었고, 이밖에 수군총관으로서 주라후, 마군총관으로서 이경 등이 있었다. 한 개 군단의 병력수가 612년처럼 4만 명이라면 7개 군단의 총수는 30만 명이며, 후방부대가 전투부대의 2배였으므로 60만 명의 후방부대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합 100만에 달하는 군대가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침략군들은 598년 4~5월 수나라 수도(장안으로 현재의 산서성 시안시)를 출발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6월에 임유관(산해관부근)을 넘어 유성(오늘의 조양서쪽)으로 진출했다. 수군들은 수백척의 함선들로 묶어진 함대를 편성해 고구려의 북평양성을 향해 떠났다. 화려하게 출발한 100만 대군이 어떻게 전쟁을 벌였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게 없다. 〈수서〉고려전이나〈자치통감〉에는 육군은 장마로 후방공급이 끊어진 데다 전염병까지 창궐해 숱한 군사들이 죽고 겨우 요수(요하)에 이르렀으나, 더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수군은 폭풍을 만나 많은 함선들이 침몰했고, 또 고구려가 정전을 요구했기 때문에 9월 기축일(11일)에 되돌아 왔다고 한다. 또한 이 때 죽은 자가 열중에 여덟, 아홉이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자연재해 탓에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을까? 전투는 전혀 없었을까? 장마나 풍랑 같은 자연 재해는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불리한 조건일 뿐이다. 물론 침략한 쪽에 조금 더 불리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자연재해 때문에 열에 아홉이 죽은 일은 없다. 이것은 패전을 감추기 위한 전형적인 수법이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패전은 축소하거나 숨기는 것을 어길 수 없는 필법으로 삼고 있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이러하다. 침략군들은 요서지방과 요하계선에서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숱한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으며, 수군은 고구려 수군의 반격을 받아 숱한 배를 잃고 장성계선까지 쫓겨 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백만대군이 출전해서 열에 여덟, 아홉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매우 큰 전쟁에서 대패 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598년 수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고구려 군민들의 투쟁은 고구려의 거대한 승리로 끝났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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