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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북진에 반격한 고구려, 삼국통일 향한 남진정책을 밀어붙이다[박경순의 고구려사](23)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8.12.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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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에 조성된 새로운 정세는 고구려의 삼국통일 정책 수행에서 커다란 장애로 됐다. 백제는 성왕을 시해한 신라를 원수로 대했지만 고구려에 대한 적대적 태도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한데 이어 동해안에서 멀리 북진함으로써 고구려에 매우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고구려는 이러한 불리한 정세에도 자기의 삼국통일 정책을 고수하면서 완강하게 투쟁을 벌였다. 6세기 중엽이후 고구려는 삼국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598년, 607년 백제에 대한 공격을 포함해 8차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삼국통일 실현을 위해 고구려가 펼친 활약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550년대 이후 삼국관계가 교착된 듯이 알려져 있거나, 신라 주도의 삼국통일 정책이 추진된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삼국통일 정책과 의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북진정책에 대한 고구려의 반격, 고구려의 강력한 삼국통일 정책 추진과정을 잘 알아야 한다.

신라의 북진에 곧바로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펼치다(1차 남진, 568년)

고구려는 550~568년 기간에 빼앗긴 동해안 지역을 되찾기 위한 비상행동을 벌였다. 신라의 진흥왕이 황초령, 마운령 일대까지 새로 점령한 지역을 순시하면서 순수비를 세운 것이 568년 8월인데 그해 가을 고구려는 대대적인 반공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568년 가을에 고구려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신라는 568년 10월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경기도 이천)를 두었으며, 비렬홀주(안변)를 폐지하고 달홀주(강원도 고성지방)을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변동은 고구려의 반격으로 땅을 빼앗겼기 때문일 뿐 그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 안변(비렬홀)에서 고성(달홀)까지, 서울(북한산)에서 이천(남천)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신라가 주소재지들을 그만큼 후퇴시켰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한산과 비렬홀 가까운 곳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또 신라가 572년에 전사한 군사들을 위해 7일간이나 위령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위령제의 의미는 무엇일까? 572년 이전 몇 해 동안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당시 백제와는 1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이러한 제반 사실들로 볼 때 신라가 마운령, 황초령까지 진출했지만 그 땅을 채 차지하기도 전에 곧바로 반격을 당해 강원도 북부계선까지 다시 쫓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흥왕 순수비로 인해 신라가 오랫동안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는 착시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6세기 말엽 고구려의 1, 2차 남진약도>

온달 장군, 소백산 줄기 계선까지 진격하다(2차 남진, 590년대)

고구려는 568년 1차 남진이후 새 평양성 건설공사, 수나라 등장으로 인한 서북방 방어 강화, 말갈족 정벌 등에 힘을 써야했으므로 남방 진출은 한동안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590년 영양왕(재위기간 590~618년 ) 즉위 직후 신라가 점령한 남부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일대 진공작전을 펼쳤다. 〈삼국사기〉권45 온달전에 의하면 온달 장군은 양강왕(영양왕을 가리킴)이 즉위하자 “신라가 우리의 한강이북 땅을 저들의 군현으로 삼고 있으니 백성들이 통절하게 한탄하고 있으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군사를 맡겨주면 나가서 꼭 우리 땅을 되찾겠다고 했다. 왕이 그리하라고 허락하니 온달은 떠나기에 앞서 “계립령, 죽령이서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신라군과 아단성(충북 단양군 영천면)에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단양군 영춘면 소재지에 온달산성이 있는데, 이 산성은 온달 장군의 지휘아래 쌓은 성이라고 한다(발굴 결과 이 산성은 신라가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기 때문에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서울 아차산성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설이 있다. 어떤 설이 맞는가는 더 검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시의 제반 정세로 볼 때 온달 장군이 온달산성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설이 더욱 합리적이다). 단양군 영춘면은 죽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이때 고구려군은 다시 소백산 줄기 계선까지 밀고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백제와 신라에 대한 타격전을 펼치다( 3차 남진, 603~608년)

7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백제와 신라가 여전히 고구려에 맞섰다. 그러자 고구려는 양국을 동시에 타격하는 전략으로 나왔다. 603년 고구려의 장군 고승은 서남방면으로 다시 진출하기 위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신라 진평왕이 1만의 병력을 이끌고 북한산성을 지원하려 오자, 역량상 타산이 없다고 보고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고구려는 607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이 노골화되자 후방의 안전을 보장할 목적으로 해상 기동작전을 벌여 백제의 송산성을 치고 그것이 함락되지 않자 그 이웃에 있는 석두성을 쳐 3000여명의 주민들을 붙잡아왔다. 608년 신라의 지배층은 수양제에게 고구려를 쳐달라고 청원하는 글을 수나라에 보냈다. 고구려는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608년 2월 출병해 신라의 북변을 치고 8000명을 포로로 잡아왔으며, 4월에는 신라의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수 전쟁 때 신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다(4차 남진, 620년대)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해 신라는 다시 고구려 남부지역을 침공해 죽령, 계립령 이북 500리 땅을 공격해 550년대 북상시기와 거의 같은 지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613년과 614년에도 수나라의 침공이 있었기 때문에 남방에 힘을 돌리지 못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는 한숨 돌릴 수 있었으므로 620년 초엽부터 신라가 빼앗아간 땅을 도로 되찾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신라, 백제-신라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고 밝히면서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통해 드러났다.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신라와 싸우지 말도록 권고하자 고구려의 영류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양보했지만, 싸움을 멈추지 않았으며 중부 산간지대의 옛 영토를 거의 다 회복했다. 이러한 사실은 629년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충북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을 공격해 함락시켰다는 것을 통해 입증된다. 당시 전투지역이 충북 청원군 지역이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620년대에 남방진출을 강력히 벌여 소백산 계선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구려, 다시 신라를 공격하다(5차 남진, 638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한강하류 지역만은 기어코 고수하면서 당나라와의 연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다. 신라는 637년 북한산주의 무력을 동쪽으로 진출시켜 고구려의 우수주 소재지(춘천)를 점령하고 군주(주장관)를 두었다. 이것은 고구려 남부지역의 허리를 자르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고구려는 신라의 계략을 꿰뚫어 보고 638년 새로운 반격을 펼쳤다. 고구려는 이때 우수주에 주둔해 있던 신라군을 쳐서 내몰아냈으며 그해 10월에는 신라의 북변인 칠중성(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신라가 대장군 알천이 거느리는 대군을 보내자 고구려군은 철수했다. 이해에 고구려는 또 동해안 지역에서도 신라를 공격해 비렬홀(안변)을 탈환했다. 639년에 신라가 하실라주에 북소경을 설치한 것은 동해안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는 동시에 고구려의 남진을 막으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연개소문, 고구려-백제 연합작전으로 신라 서북부 수십 개 성을 함락하다(6차 남진, 643~644년)

642년 10월 연개소문 정변이후 고구려는 대당 강경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를 위해 후방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백제와의 오랜 적대관계를 극복하고 신라를 반대하는 데서 공동보조를 취했다. 642년 겨울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경남 합천), 미후성 등 40여개 성을 빼앗긴 신라는 너무도 급한 나머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후원을 요청하자, 연개소문을 계립령, 죽령이북의 땅을 다 내놓지 않으면 신라를 도와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춘추는 그렇게 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귀국하는데, 이를 간파한 고구려군은 김춘추를 추격했다. 이때 그를 마중 나온 김유신의 신라군과 싸움이 벌어졌다. 또한 백제와 연합해 서해안의 신라 중요 항구인 당항성(경기도 화성시 남양면)을 치려했다.

643년 연개소문 장군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오늘의 금강 계선까지 진출했다.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 개소문성이 있고 충남 연기군 금남면에 소문성이 있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연개소문이 이 일대까지 진출해 활동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643~644년 사이에 연개소문의 총지휘 밑에 진행된 남방진출 작전 결과 중부 산간지대에서 강원도 영서지역, 충청북도 대부분 지역을 되찾았다. 이것은 645년 고구려-당 전쟁을 앞두고 후방을 공고히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백제와 연합해 신라 북쪽 지역에 있는 33개 성을 함락하다(7차 남진, 654년)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개시하자 신라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3만의 군대를 보내 중부 산간지대를 다시 점령했다. 648년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로 보내 공동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대동강 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 땅은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비밀협약을 맺고 돌아왔다. 이를 안 고구려와 백제는 654년 신라의 북쪽지역에 있는 성 33개를 함락시켰다. 이 33개성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의 성들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제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강원도 영서, 충청북도 중부산악지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가 다시 충북 동북부지역까지 내려왔으며, 백제가 충북 서부 청원, 괴산지방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이때 고구려는 동해안쪽으로도 고성군, 양양군 일대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는 658년 3월 신라가 하실라(강릉)는 지경이 말갈과 가까우므로 사람들이 편치 않다면서 경(북소경)을 폐지하고 다시 주(도독)를 두었으며, 그 남쪽 실직(삼척)을 북진으로 삼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5세기말 6세기초 남부 영토를 거의 다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삼국통일 실현을 위한 남진정책을 변함없이 완강하게 밀고 나갔다.

고구려군이 칠중성을 공격해 함락하다(8차 남진, 660~661년)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망한 다음에도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660년 11월1일 고구려군은 신라의 북변인 칠중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칠중성 공격은 20여 일간 격렬하게 진행됐다. 고구려군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 화공전술로 성을 돌파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661년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은 말갈인부대의 장군 생애와 함께 술천성(경기도 여주)을 공격했으며 성이 함락되지 않자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20여일 동안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되지 않고 때마침 우레가 울면서 비가 쏟아지고 별똥별이 떨어지는 등의 일이 나타나자, 뇌음신은 미신에 사로잡혀 불길한 징조라고 하면서 포위를 풀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고구려의 완강한 삼국통일 투쟁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의 주된 요인은 신라의 매국배족적 행동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 지배세력 내부의 문제 또한 적지 않다. 고구려 지배층들은 대당 정책에서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양보를 거듭했으며, 자기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지 못했고,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로 통일적인 대응을 펼치지 못했다. 고구려 지배층의 내부 분열로 국가의 통수체계와 방위체계가 마비되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성과적으로 물리치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대업도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고구려의 투쟁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6세기초 고구려가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삼국 사이의 민족적 공통성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7세기 말엽이후에도 고구려의 옛 강토를 다 수복하려는 우리 겨레의 지향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들이 들어서게 되고, 그 후 10세기에 이르러 고려에 의한 국토통일이 이루어지는 밑거름으로 됐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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