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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 근대의 시작을 어떻게 볼 것인가반외세 항전의 흐름을 중심으로 본 우리근대사 (1)
  •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 승인 2018.12.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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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다시 정리해보는 미일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했던 칼럼을 1882년 이후 새로운 접근법으로 이어가려 한다. 외세의 침탈이 전면화 되는 조건에서 우리 민족의 반외세 항전사로 시각의 중심을 바꾸어야만 당시 역사를 균형감 있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근대사의 시작을 무엇으로부터 보아야 하는가의 논점과도 연관이 있다.

유럽에서는 근대의 시작을 봉건제의 해체와 근대국가 수립으로 본다. 봉건제가 토지에 얽힌 신분제 사회라면, 자본주의 시작과 함께 근대국가가 탄생되었고, 신분제 대신 ‘자유, 인권’이 시대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반면 우리역사는 외세의 침입과 수탈로 인해 자생적인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봉쇄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의 근대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둘러싸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게 된다. 근대의 시작을 《강화도 조약》으로 보는 견해는 조선의 근대화가 외세로부터 이식되었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또 갑신정변이라고 보는 근대화의 시작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서구중심의 역사해석을 벗어나지 못했다.

북은 우리 민족의 근대화를 《제너럴셔먼호》의 침략과 민중들의 반외세 결사항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최초 침략이었던 《셔먼호》침입에 대해 우리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서 승리했다. 그 후 40여년이 흐르며, 자신의 권력이 곧 나라라고 착각하고 외세를 더 많이 끌어들여서라도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조선 왕조는 무너졌다. 그러나 전 민족적인 반일투쟁은 더욱 발전하여 3.1독립운동에 이르게 된다. 북은 이 3.1운동까지를 우리민족의 근대라고 해석하는데 나도 그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1866년 《셔먼호》 사건 이후 1871년 신미양요까지의 미국의 침략에 결사항전으로 맞선 조선의 승리, 미일 결탁에 의한 일본의 침략(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과 반외세투쟁은 한번 씩 다루었으므로 생략한다. 이제부터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이후 조선 경제가 급속히 와해되는 상황에서 본격화되는 반외세 민중항쟁의 흐름부터 정리하며,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재평가를 해보고 싶다. 우리의 근대는 피눈물 나는 투쟁의 역사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야만적인 수탈과 폭압에 맞서 맨손으로 투쟁하고 또 투쟁하는 역사였다. 이런 투쟁들은 이러저러한 부족점과 한계로 인해 승리로 끝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런 투쟁을 통하여 외세의 침략전술을 후퇴, 수정하게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분기하게 만들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구상을 다각화하게 된다. 반외세 투쟁은 그 자체로 정의롭고 위대하다. ‘외국군 주둔을 불러온 임오군란’(《한국근대사 산책1》 강준만)이라는 류의 평가들은 균세정책(세력균형정책-편집자주)을 내세우며 외세에 끊임없이 의존하려던 조선왕조 지배자들이 할 이야기이다.

강화도 조약 직후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조선민중들의 반일 투쟁

개항 후 부산에서는 일본인들이 파괴와 약탈을 감행하자 일본 거류지 집들을 파괴 소각하고, 일본 상인들의 약탈을 저지시키는 투쟁이 빈번하게 발발했다. ‘일본인들은 조금이라도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동래부사에게 강경담판을 들이밀고, 만일 조선이 이를 거부하면 당장 유혈 참상을 벌렸다.... 그러자 조선인들은 동래에 다니는 일본인을 보면.... 분노하여 돌과 기와장을 던지고 분풀이를 하고 있다.’(《조야신문》일문, 1879년 8월) 일본은 거류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산 앞바다에 항시 배를 띄워놓을 정도로 심각했다.

서울에서도 일본공사일행에게 돌팔매질을 하였다. 겁을 먹은 민비 정권은 1879년 3월 ‘일본 공사일행이 지나갈 때 돌을 던지며 규탄하는 행동을 하면 효수형에 처하고 해당관리를 파면시킨다.’는 포고를 냈으나 바로 다음 달 하나부사 일행에 다시 돌벼락을 안겼다.

1878년 8, 9월 전라도와 충청도 연해에서 불법 상륙하여 지형정찰을 감행하던 일본인을 습격하였으며, 1877∼1889년 함경도 원산에서는 일본의 원산만 일대에 대한 측량과 개항을 반대하는 투쟁하였다. 1878년 4월 일본 군함 《야마끼》호 함장은 문천 군수에게 ‘우리가 군함에서 내려 상륙하면 그때마다 매번 소요가 일어난다.’고 항의 하였다. (《일본 외교문서》 일문, 일본 국제연합협회 1963년) 1879년 원산 유생들은 원산 개항 저지투쟁을 벌리자며 통문을 돌렸다. 이러한 투쟁에 호응하여 부호군 김두연은 ‘섬나라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도 <교린>이라 하며, 예의로서 대하는데도 우리를 얕보고 덤벼드니 실로 그 후한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면서 원산개항요구를 물리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일성록》 민중들의 투쟁에 의하여 일본 침략자들은 제대로 측량을 할 수 없었으며 마음대로 육지에 오를 수도 없었다. (《조선개국외교사연구》일문 1941년)

일본인들에 대한 징벌행위가 계속 발생하자 원산주재 일본 영사는 거류지 안의 일본인들에게 장보러 다닐 때 순경을 데리고 갈 것과 3∼4명씩 함께 다닐 것, 그리고 곡식을 한꺼번에 많이 사들이지 말라고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산이 개항되고 더구나 인천개항까지 가시화되자 전국의 여론은 더욱 끓어올랐다. 영중추부사 이유원은 ‘들끓는 민심을 진정시킬 방도가 없다’고 비명을 질렀다. (《일성록》 고종 기묘년)

반침략 투쟁의 흐름은 1880년에 들어서자 더욱 강화되었다. 허언식이 인천개항에 반대하는 두 차례의 상소를 하였는데, 수 천 명 경상도 유생들의 들끓는 여론을 반영한 투쟁이었다. 1881년 1월 20일 그들이 서울에 집결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또 유랑농민들이 산간지대에 은거하며 싸우는 <농민무장대>로 전환, 반외세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농민무장대들이 증가는 조선조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 ‘수년이래로 화적당이.... 수십명 혹은 700∼800명씩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서울 안에서까지도 종종 도적과 방화 사건들.... 한 사람이 나서서... 궐기할 것을 호소하면 모두 따라 나서게.... 관서 북부와 영호남부의 땅은 나라의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고 비명을 올렸다. (《고종실록》권18) ‘남부조선의 산골짜기들에는 수많은 비적무리들이 벌과 같이 뭉치고 개미와 같이 모여 마을을 휩쓸고 있으며... 의병을 일으켜 왜놈들을 치겠다고 떠들고 있다’(《고종실록》권18)고 한 기록에도 알 수 있듯이 농민무장대들은 일본침략을 반대하는 명백한 목적으로 내걸고 투쟁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초기에는 비록 투석, 항의, 징벌 등의 형태였으나 점차 무장을 들고 일본침략자들을 몰아내려는 높은 형태의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최하층 민중들의 투쟁은 각계각층의 반일 저항의 흐름을 추동하는 커다란 힘으로 되었다.

위정척사 운동의 시작

유생들의 상소운동도 새로운 양상을 띠고 벌어지기 시작했다. 직접적 계기로 된 것은 1880년에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이 귀국하며 《조선책략》을 국왕에게 바친 사건이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앞의 칼럼) 민비정권은 책 내용이 개국을 합리화하는데 필요하다고 보고 이 책을 복사하여 전국 유생들에게 배포하였는데, 오히려 위정척사론자들의 분노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1880년대 초 위정척사운동은 현직 및 전직관리들의 상소, 각도 유생들의 연명상소 등으로 전개되었다. 상소에서 주요 공격대상으로 된 것은 《조선책략》과 정부의 대외정책, 외래 자본주의 침략문제였다.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이 《조선책략》울 규탄하는 상소를 제출한 것으로 시작된 투쟁은 애국적 유생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아 큰 규모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영남의 유생들은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원산과 인천이 개항된다는 소문이 떠돌고 정부안에서 서양과 화친하려고 하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881년 2월 26일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추동하여 정부를 공격하는 연명상소를 제출하였다. 유생들은 《조선책략》을 끌어들여 전파시킨 인물들을 처벌하고 모조리 압수하여 소각해 버리자고 하였다.

▲ 1884년 복제개혁을 반대하는 만인소(현존하는 두 개의 만인소 원본중 하나)

이를 도화선으로 전국의 위정척사론자들이 일제히 상소투쟁에 합류하였다. 3월에는 황재현, 홍시중 등이 준열한 상소를 하였으며 5월에는 김진순 등 경상도 유생들과 유기영 등 경기 유생들, 한영렬 등 충청도 유생들이 번갈아 상소를 하였다. 황재현은 상소에서 ‘밖으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세력이 크게 몰려와 큰 산이 새알을 짓누르는 형세에 처하여있고, 안으로는 침략을 막아낼 재정적 군사적 준비가 없을 뿐더러, 8도의 감사들까지 긁어서 빼앗기만 일삼으므로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다 불과 물속에 빠져서 이놈의 세상은 언제 망하려는고 하는 형편입니다.’고 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사태는 ‘백성들이 한 번 일어나면 ... 국가의 존망이 관계’될 정도로 통치계급의 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민비정권은 5월 15일 유생들의 상소를 막고, 서울로 올라오는 유생들을 엄중히 단속할 것을 지방관청들에 지시하였다. 그러나 7월 강원도 유생 홍재학, 경기 유생 신섭, 전라도 유생 고정두, 충청도 유생 조계하 등이 상소를 통해 이유원, 이최응을 비롯한 사대매국정책의 집행자들과 정부의 대내외 정책을 규탄하였다. 그들은 조성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도가 외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심에 있다고 보았다. ‘백성들이... 마음이 성처럼 튼튼히 쌓아진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일본 서양 러시아가 어찌 강하겠습니까.’라면서 흩어진 민심을 바로잡기 위하여 정치 개혁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민비일족의 막대한 재정낭비를 금지시키고, 국가재정을 절약하며, 애국적인 언론 탄압을 중지할 것, 특히 군대를 강화할 것을 가장 절박한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고종실록》 권 18) 또 우리나라에 발붙인 침략자들을 내몰고 이들에게 투항하는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 청나라 통치층과 결탁하여 준비되고 있는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저지할 것, 자본주의 침략을 막기 위한 엄격한 외교적 조치를 취할 것 등의 구국대책도 제기하였다. 이들의 구국대책안은 비록 봉건제도의 틀을 혁파하는 것으로 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으나, 민중의 반외세투쟁을 추동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호에 임오 군인들의 투쟁 계속>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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