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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군민일치의 기적을 담다영화 ‘안시성’을 보고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8.10.0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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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을 봤습니다. 상상으로만 그려보던 안시성 전투를 실제 영상으로 접하게 되니까 감개무량이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안시성 전투와 양만춘 장군은 그야말로 꿈에라도 만나고 싶은 영원한 우상입니다. 안시성 전투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그것만으로 영화제작자들께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안시성 전투는 645년 고구려-당나라 전쟁의 주전장이었고, 그 전투의 승패 여하에 따라 전쟁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싸움이었습니다. 당 태종은 6월11일 선발대를 보내 안시성을 포위하고, 자신은 6월19일에 도착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을 총대장으로 하는 15만 지원군을 파견했습니다(영화에서는 15만명과의 전투 이후 안시성이 포위된 것으로 묘사되고, 그것도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한 지원부대라는 점을 밝혀놓지 않았습니다). 당 태종으로서는 안시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 지원부대와의 전투를 먼저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연수, 고혜진은 참모 고정의의 합리적 제의(“강한 적과 상대해서 싸우는 것은 좋지 못하다. 우리는 군사들을 정돈하고 싸우지 말고 오래 끌면서 별동대를 내보내 적의 양곡 운반도로를 끊어놓으면 적들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 그때야말로 우리가 이길 수 있다”)를 무시하고, 정면승부를 선택합니다. 당 태종은 이 부대와의 전투에서 교묘한 유인계략과 회유전략(영화에서는 정정당당한 승부로 묘사돼 있지만 그것은 허구입니다)을 써서 15만 대군을 격파하고 안시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역사의 기적 안시성 전투

영화 ‘안시성’의 백미는 안시성 싸움의 승리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안시성 사람들의 영웅적 투쟁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5000에 불과한 안시성 군민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거느린 당 태종과의 대결전에서 승리하는 기적을 창조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의 창조자들은 그 어떤 뛰어난 장수와 군대들이 아니라 안시성에 살고 있던 소박한 군대와 민중들이며, 그들을 이끌었던 한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점은 군민이 일치단결해서 생사를 걸고 투쟁한다면 그 어떤 적과의 투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요? 성주와 군민들의 친혈육과도 같은 관계, 서로서로 믿는 마음, 상하일치 군민일치의 기풍, 군민들의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투쟁의 모습,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도 성을 지키려는 민중들의 모습들을 극적이고 사실적이며, 감동적으로 잘 그려놓았습니다.

▲ 안시성 내부 모습[사진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제공]
안시성 싸움과 비교되는 것은 백암성 전투입니다. 백암성과 안시성은 규모 면에서 거의 같습니다. 성벽의 길이가 두 성 모두 2.5km 내외입니다. 성의 견고성이나 방어의 유리성에서 보면 백암성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런데도 백암성주는 지원병이 막히자, 비겁하게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립니다. 안시성주와는 정말 대조적입니다. 같은 시대, 비슷한 환경에 처한 두 사람의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선택을 함으로써 한 사람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다른 한 사람의 민족의 배신자로 만 사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두 사례를 보면서 전쟁의 승패는 사람에 달려 있으며, 그것도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자의 결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백암성 전경[사진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제공]
영화 ‘안시성’에 대한 유감

영화 ‘안시성’은 매우 훌륭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양만춘과 당 태종의 싸움처럼 그려놓은 점은 정말 아쉽습니다. 이 전쟁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 총사령부(실질적 총사령관 연개소문)의 유일적 지휘 아래 고구려 군대와 민중들이 일심단결해서 투쟁을 펼친 덕분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연개소문과 양만춘을 대립시켜 놓음으로써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아닌, 양만춘과 당 태종의 개인적 싸움인 것처럼 그려놓았습니다.

▲ 멀리서 본 안시성[사진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제공]
그러다 보니 불가피하게 역사를 부분적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지원병을 일부러 보내지 않고 안시성을 포기했다는 식으로 그려놓았습니다. 그것은 중대한 역사왜곡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고연수, 고혜진의 15만 명은 연개소문이 파견한 안시성 구원부대였습니다. 그리고 고연수, 고혜진은 약 1만5000명을 데리고 항복했으며, 전투에서 사상당한 사람수 역시 대략 1만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10만 이상의 고구려 군사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그 주변에서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계속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시성 사람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싸움을 벌인 것은 아닙니다.

당시 상황을 잠깐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천리장성 계선의 주요 성들을 살펴보면 비사성, 건안성, 안시성, 백암성, 요동성, 신성, 개모성 등입니다. 이 중에서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은 함락되었으며, 건안성, 안시성, 신성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당나라 군대의 기본 전략은 속전속결로 천리장성 계선을 돌파한 후 북평양성을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성이 버티고 있어서 당나라 군대는 더 이상 앞으로 진격할 수 없었고, 전반적인 전쟁 양상은 당나라 군대의 패색이 짙어져 가는 국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성들은 무너지고 안시성만 남았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 태종의 총퇴각과 고구려의 전쟁 승리요인

안시성 점령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보니 벌써 때는 9월18일이라 마침 찬바람이 불면서 요동반도에서 풀들이 다 말라버리고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으며 식량도 거의 다 떨어져 갔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당 태종은 총퇴각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으로 안시성 사람들은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고, 동시에 고구려-당나라 전쟁 역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게 됐습니다. 안시성 전투의 승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애국 명장 양만춘 장군의 역할입니다. 90일 동안 막대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뛰어난 군사적 지략으로 임기웅변의 전술을 능란하게 구사해 승리를 쟁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 당나라 군대가 쌓은 흙산[사진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제공]
그런데 안시성 싸움 승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 수군의 역할입니다. 당나라 침략자들이 퇴각하게 된 것은 고구려 수군이 적극적인 적후 교란활동으로 식량공급이 막혔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 수군은 산동반도 부근의 옛 대인성에 저축해두었던 식량을 나르는 적의 식량수송선들과 함선들을 수많이 파괴하고 불살라 적의 보급로를 끊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당나라 군대는 식량이 다 떨어져서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당태종이 9월18일 총퇴각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식량공급 문제 외에도 퇴로 차단에 대한 심각한 우려도 작용했습니다. 당시 고구려군은 연개소문 장군의 지휘 아래 당나라 군대의 침공로였던 통정진-현도성 사이의 길과 통정진에서 대릉하로 통하는 길을 모두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당 태종은 시간이 갈수록 고구려의 포위진이 좁혀지고 있어 자칫 퇴로가 막힐까봐 두려움에 빠져들었습니다. 당 태종이 총퇴각을 결심하게 된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고구려는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당나라 북방에 있었던 실연타의 우두머리인 진주극한과 비밀협약을 맺었는데, 내용인즉슨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올 때 북방에서 당나라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주극한은 당나라가 두려워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9월 초 진주극한이 죽고 아들 다미극한이 왕이 되자, 그는 고구려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당 태종이 없는 틈을 타서 하남(황하이남)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이것 역시 당 태종에게는 새로운 근심으로 됐습니다.
기본전선인 안시성 전투에서 곤경에 빠져 있던 당나라 침략군들은 고구려 수군부대의 활동과 연개소문 장군의 외교 군사 활동으로 더 지체했다가는 전멸하는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이라 직감하고 서둘러 총퇴각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대가 총퇴각을 시작하자 손쉽게 물러나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연개소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 추격전을 펼쳐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까지 진출했습니다. 지금도 베이징 북방 30리 지점인 베이징시 순의현에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을 때 만들어졌다는 군영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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