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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된 동포운동, 총련 결성과 초기의 활동[기획연재] 총련과 그 역사를 알아보다(2)
  • 오규상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 부소장
  • 승인 2018.09.04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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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언론 민플러스는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3대(북▪민족▪미국) 바로알기운동’을 펼치려 한다. 먼저 민족 바로알기 일환으로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 오규상 부소장의 ‘총련과 그 역사를 알아보다’를 기획연재한다. 4세대에 걸쳐 민족성을 지켜온 재일동포들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을 새롭게 알아 나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흔쾌히 기고해주신 오규상 부소장께 감사드린다.[편집자]

※ 내용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두음법칙, 띄어쓰기 등 국어 맞춤법을 적용했다.

총련 결성 이전의 재일동포단체

해방직후 재일동포들은 220만 명으로부터 240만 명이 있었다고 한다. 환희와 기쁨 속에서 해방을 맞이한 동포들은 고향으로, 조국으로 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GHQ)의 지시에 의하여 일본 당국이 1946년 3월에 재일동포 재류정형을 조사한 결과는 64만7006명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해방이 되여 한 반년 사이에 140만 명으로부터 180만 명이 되는 동포들이 어떤 수단을 이용하여 귀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여러 이유로 일본에 남게된 동포들은 해방직후부터 동포단체를 각지에 만들어 동포들의 귀국 편의를 도모하고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사업에 종사했다. 그러한 속에서 ‘군웅할거’할 것이 아니라 ‘대동단결’하여 동포단체를 하나로 결집하자고 한 끝에 1945년 10월15일에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을 결성했다.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의 첫 통일전선적 조직이었다.

조련은 결성 당시의 선언과 강령에서 신조선 건설에 기여할 것을 첫 자리에 두고 활동했다. 조련에 대하여 결성 의도는 동포대중조직이라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일부 사람들을 추방하고 동포사회의 분렬을 노렸다는 말이 있으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이나 친일파에 속해 나쁘게 행세한 사람들을 해방이 되었다고, 반성도 안한 그런 사람들을 동포단체의 책임적인 지위에서 활동시킬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남조선(한) 진출을 찬동하고 이승만을 따른 사람들, 조련 조직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대결하려고 한 사람들은 오늘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전신인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을 결성(1946년 10월3일)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동포사회는 2가지 민족단체로 분류하기 시작한다.

조련은 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선행하면서 자녀들에 대한 교육사업, 동포들의 일자리, 살림집 등 생활문제를 풀어나가는 사업들을 추진했다. 특히 일본 당국이 1948년 1월에 <조선인 설립학교의 취급에 대하여>라는 통달(문서 통보)을 내여 조선학교를 없애려고 한 시기(4.24교육투쟁)와 1949년 10월19일에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내여 노골적으로 탄압했을 때도 조련과 재일동포들은 학교를 지키기 위하여 견결한 투쟁을 벌렸다.

미일당국은 조련 조직강화에 위구심을 높여 1949년 9월8일에 조련이 ‘반점령군 행위’를 했다는 것으로 ‘단체 등 규정령’을 적용하여 조련과 민청(당시의 청년조직)을 강제해산하고 간부 28명을 공직 추방하고 조련과 민청의 재산을 몰수하는 파렴치한 탄압을 가했다. 조련은 이로써 귀한 성과와 경험을 남기면서도 약 5년간의 활동을 끝맺게 된다.

조련 해산이후 재일동포들은 새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힘썼다. 그리하여 해산을 면한 해구(재일조선인해방구원회), 여성동맹(재일본조선민주녀성동맹), 교동(재일본조선인교육자동맹) 등이 중심이 되여 새조직 건설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51년 1월9일에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을 결성하게 된다. 조선전쟁 중이라는 사정, 국제당과 일본공산당의 혼란 그리고 민전조직의 일부 지도분자들의 로선적, 방법적 오류로 민전은 한때 극좌모험주의적인 방법으로 잘못 운동을 전개하여 동포들이 조직을 멀리하게 되고 일본 인민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의 재일조선인운동의 실태를 통찰하여 1952년 12월에 동포연락원을 만나고 일본 내정에 간섭하는 운동을 그만두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운동, 재일동포들의 권익을 위한 운동으로 로선을 전환할데 대한 가르침을 주게된다. 그리하여 애국적 활동가들의 헌신적 역할에 의하여 민전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새로운 조직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 총련 결성대회(1955년 5월25일).

총련 결성대회와 조직 건설

총련은 1955년 5월25일과 26일에 일본 도쿄 아사쿠사공회당에서 결성대회를 가졌다. 결성대회의 슬로건은 ‘모든것을 조국의 평화적 통일독립과 민주민족권리를 위하여!’이다. 여기에 단적으로 총련 결성의 목적과 사명이 집약화되어 있다.

총련은 결성대회에서 선언과 강령, 규약을 채택하고 역(임)원들을 선출했다. 총련 결성 당시의 강령은 8가지 항목이 있는데, 그 내용을 4가지로 묶어보면 첫째는 재일동포들을 공화국정부 두리에 집결하고 조국 남북반부와의 련결을 긴밀히 공고화한다는 것, 둘째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기여한다는 것, 셋째로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동포들의 민족적 권익을 지킨다는 것, 넷째로 일본 인민을 비롯한 세계각국 인민들과의 친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총련은 결성 이후 무엇보다도 자기 조직을 튼튼히 꾸리기 위한 사업에 전력을 돌렸다.

아무리 높은 목표를 내걸어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체계가 확립되지 않으면 사업을 진척할 수 없다. 총련은 결성대회 이후 지방본부를 2달 사이에 거의 내왔으며 이어서 지부조직도 만들고 연달아 분회조직도 내왔다. 이리하여 결성 이후 1년 사이에 운동을 조직전개할 수 있는 사업체계를 꾸렸다. 물론 활동현실에 맞게 부단히 개선해야 하기 때문에 조직건설에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으나 빠른 시일 내에 상부조직으로부터 말단조직에 이르기까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총련은 계층별 조직도 기존 단체를 개편하거나 새로 망라했다. 청년단체이던 재일본조선애국청년동맹(민애청)은 총련 결성 이후 재일본조선청년동맹(조청, 1955년 8월1일 결성)으로, 학교관리운영을 담당했던 PTA연합회를 재일본조선인교육회(1955년 7월2일 창립)로 개편하여 산하조직으로 하였다. 여성동맹이나 교동(재일본조선인교직원동맹, 교직동으로 개칭), 학동(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 유학동으로 개칭)은 규약 혹은 명칭을 약간 바꾸어 총련의 산하단체로서 그대로 활동했다. 경제인, 상공인들의 단체인 재일본조선상공련합회는 ‘정경분리론’ 등을 극복하고 기업활동을 하면서도 총련에 가맹하여 같은 전선에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조국통일에도, 자신의 권익도 옹호할 수 있다는 것으로 1959년 6월에 정식으로 총련의 산하단체로 된다. 또한 지난시기 여러 명칭을 가진 단체에서 활동하던 문학예술인들은 문예동(1959년 6월7일)에, 과학자들은 재일본조선과학자협회(1959년 6월28일 결성, 이후에 사협, 과협, 의협으로 분리)에 결집하여 총련의 산하단체로 되었다. 총련은 결성 직후에 재일조선중앙예술단도 내옴으로써 동포들 속에서 우리 노래와 춤을 적극 소개하고 보급했다.

민족교육사업

총련은 동포들 속에서 민족성을 이어가며 동포 자녀들을 조선의 훌륭한 아들딸로 키우기 위해 민족교육사업에 각별한 힘을 넣었다. 총련은 조선학교 교육체계를 정비하며 지방본부에 교육담당 부서를 내오며 일본 학교에 다니는 조선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받아들이기 위한 사업을 적극 수행했다. 조선학교를 ‘따라지 학교’라고 업신 여긴 사람들도 있었으나 교육설비와 학교 교사를 건설하는 사업도 전동포적으로 전개했다. 그리하여 민전시기보다 학생수(한때 1만7000명)를 훨씬 증가시켜 1960년 4월에는 4만6000여명의 학생이 재적했으며 1959년 1월에는 도쿄조선제1초급학교(현재초중)에 조선학교에서 처음으로 철근교사를 준공하게 되었다.

총련은 고등교육기관인 조선대학교를 1956년 4월10일에 창립했다. 교수진, 시설 등 부족점도 적지 않았으나 재일동포 자신의 힘으로 고등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부모들의 염원이 실현됐으며 특히 총련은 민족간부의 후비를 자체의 힘으로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은 초급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민주주의민족교육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대학교는 2년제 대학으로 발족했으나 1958학년도부터는 4년제 대학으로 발전시켰으며 특히 1959년 6월에 도쿄도 고다이라시에 새 학사를 건설함으로써 대학 발전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총련의 민족교육사업 발전, 조선대학교 새 교사의 준공과 그 발전에서 결정적 의의를 가진 것은 재일동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을 위하여 북한(조선) 정부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준 것이다. 1957년 4월에 일본돈으로 1억2000여만엔(한화 약 12억원)을 보내준 것이다. 이것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2018년까지 164차례, 도합 482억여엔(한화 약 4820억원)으로 된다.

귀국의 실현

총련 결성 이후 동포들의 요망을 실현하기 위해 벌린 사업의 하나가 재일동포들의 귀국사업이다.

제 나라에 본인의 희망에 따라 돌아가는 것은 국제법에 공인된 초보적 권리이다. 그런데 재일동포들에게는 이러한 초보적 권리도 없었던 것이다. 동포들이 공화국에로의 귀국을 희망한 주된 요인은 해방후 10년 이상 지나도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과 무권리의 실태는 일제시대와 거의 다름이 없고 실업상태에 놓여있어 생활에서 아무런 개선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과 공화국 정부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민족적 의무로 여겨 열렬히 환영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만 해도 이승만 정권의 해외정책이란 기민정책이 기본이었으며 해외동포정책이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두고 <북송반대>란 의사를 표시하고 노골적으로 방해했으며 사형수들을 조직하여 비밀공작대까지 만들고 일본에 파견했다고 한다. 귀국사업이 원만히 진행됨으로써 공화국과 재일동포들의 연계는 어느 때없이 긴밀해졌다.

오규상 부소장 약력

1948년12월 가나가와현에서 출생했고, 본적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동포 2세다.

1955년4월 가나가와현 조선학교에 입학해 1967년3월 졸업했다. 1971년3월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6년간 민족교육을 받았다.

1979년7월 김일성종합대학 통신박사원 준박사과정 수료하고, 1998년10월8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국가 학위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학준박사(1979.09.03.), 사회정치학박사(1998.12.0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교수(1991,05.15), 교수(2001.05.02)

1971년4월부터 2004년6월까지 조선대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교수, 정치경제학부 학부장, 경영학부 학부장, 교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4년7월부터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다, 2010년5월에 부소장이 되었다. 현재 조선대학교 비상근 강사로 출강한다.

저서
『기업권확립의 궤적 재일조선상공인의 바이타리티』朝鮮商工新聞社、1984・2
『재일조선인기업형성사』雄山閣、1992・3 
『아세아를 뛴다 화교・재일코리안』朝鮮青年社、1996・6
『다큐멘트 재일본조선인련맹1945-1949』岩波書店、2009・3
『기록・조선총련60년』2015・12(私家版)

편저
『입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雄山閣、1998.9 그 외 다수

오규상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 부소장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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