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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의 시신을 강탈당하다[박경순의 고구려사](13) 고국원왕의 파란만장한 삶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8.08.0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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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재위기간 331년~371년)은 미천왕의 아들이며, 휘는 사유라 한다. 미천왕 15년에 태자로 책립됐다, 331년에 미천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고국원왕은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외세와 맞서 싸워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한 새로운 시대를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평양을 개발하고, 남평양성을 개척함으로서 남방경략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과 남에서 오는 적대세력의 침략에 대처해 여러 성들을 새로 쌓거나 보축했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 335년에는 신성을 쌓았으며, 342년에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그는 또한 부왕(미천왕)의 시신을 강탈당하는 비운을 겪었으며, 평양성으로 임시수도를 옮겼고, 371년 백제와의 남평양성 전투 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죽은 후 그는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안악 3호 고분에 묻혔다.

▲ 안악3호 고분 전경도(고국원왕릉)

부왕의 시신을 강탈당하다.

3세기 말에 고구려의 서방에서는 모용선비족이 강화됐다. 모용선비는 원래 흉노의 한 갈래였다. 1세기말 한나라의 공격으로 북흉노가 멀리 북쪽으로 달아나자, 선비족들이 그 땅을 차지했는데, 흉노의 잔여세력들도 자신들도 선비라고 자칭하게 됐다. 우문선비도 이러한 흉노의 한 갈래였는데, 2세기 중엽 선비의 우두머리 단석괴는 선비족들을 다 복속시키고 동쪽으로는 후부여를 물리치고 요하 서쪽지역을 다 차지했다. 166년 단석괴는 자기의 통치지역을 3등분해 동, 중, 서 3부로 나누고 각각 대인을 두고 통치했다. 모용선비는 단선비 우문선비와 함께 중부에 속했는데, 모용선비는 대릉하 유역, 단선비는 만리장성 안팎, 우문선비는 노합하, 시라무렌강 유역에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3세기 중엽에 대릉하 북쪽 유역에 있던 모용선비족은 그후 요동지방의 북쪽지역으로 옮겨가 있었다. 그러다 다시 요서지방으로 가서 281년에 서진의 창려군을 처음 공격했고, 294년에 이르러 요서지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 후 모용선비 추장 모용외는 대극성(조양 동남)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모용선비족 추장 모용외는 293년 고구려의 서북국경지역에 침입했으나, 고구려 장수 고노자에 패퇴했다. 모용외는 패배를 만회하려고 296년 8월 많은 무력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고국원(환도성 부근)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려다 실패하고 도망갔다. 313~315년 요동지방의 낙랑 현도 대방 3개군을 고구려가 탈환하자 모용외는 3개군의 잔여세력들을 받아들여 요서지방에다 3개 군을 부활시켰다. 이후 모용외는 동진의 벼슬을 받아 자기의 권위를 높이려고 책동했다. 319년 요동군에 있던 평주자사 최비는 모용선비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것을 보고, 고구려, 단선비, 우문선비에게 모용외를 치고 그 땅을 나눠 갖자고 제의했다. 고구려는 모용선비와 이미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단선비, 우문선비와 함께 극성을 포위했으나 모용외의 이간술책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모용외는 우문선비의 대군을 격파한 후 요동으로 쳐들어 왔다. 급하게 된 최비는 고구려로 망명했고 그 부하들은 모용외에게 항복했다. 이 때 고구려 장수 여노자는 하성에 의거해 국경지대를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됐다. 고구려는 320년대에 수차례 모용선비와 전투를 벌였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333년 모용외가 죽자 맏아들 모용황이 그 자리를 이었고, 337년 연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연왕을 칭했다.

고구려는 전연의 침입에 대비해 335년 신성을 보수했으며, 336년에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 전연을 도와나서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후조와 협력관계를 맺고 전연을 압박했다. 후조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338년 전연의 수도 극성에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339년 9~10월 모용황은 고구려의 서북방 주요 거점인 신성을 공격했다. 전쟁준비를 채 마치지 못한 고구려는 전연과 화의를 맺고, 340년에는 왕세자를 보내 전연을 방문케 했다. 전연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본 고구려는 342년 2월 환도성을 수축하고 국내성도 다시 쌓았다. 그리고 8월에는 고국원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기고 수많은 군사들을 환도성으로 집결시켰다.

342년 10월 전연은 수도를 극성에서 용성(조양부근)으로 옮기고, 이것을 계기로 동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우문선비 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칠 것인가 논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모용한의 주장에 따라 고구려를 먼저 침략하기로 했다. 당시 모용한은 고구려는 남도와 북도 두 길이 있다. 남도는 좁고 험하며, 북도는 넓고 평탄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당연히 적군주력이 북도를 통해서 공격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북도로는 적은 무력을 보내고 주력군은 남도로 보내 침략하자고 제안했다. 전연군은 모용한의 주장에 따라 모용황 자신이 정예 부대 4만명을 이끌고 남도로 침입했고, 북도로는 장사 왕우로 하여금 1만 500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도록 했다.

▲ 안악3호 고분(고국원왕릉) 내부 전경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모용한의 예상대로 전연의 주력이 북도로 침입할 것이라 봤다. 그런데 이것이 커다란 전술적 패착이었다. 그는 왕제 고무로 하여금 정예군 5만명을 이끌고 북도를 지키도록 했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를 지켰다. 북도에서는 고구려 군대 숫자가 우세했던 것만큼 적군 1만 5000명을 전멸시켰다. 그런데 남도에서는 전연의 주력군 4만명이 밀려오는 바람에 고구려의 방어진이 무너지고 장수 아불화도가는 전사하고 말았다. 고국원왕은 급한 나머지 소수의 군사들을 데리고 단웅곡(압록강부근)으로 후퇴했다. 전연군은 곧바로 환도성을 함락시켰고, 환도성에 와 있던 태후(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후는 급히 피신하다가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전연군은 환도성을 함락시키기는 했으나, 북도로 파견했던 전연군이 전멸하고 고구려군 5만명이 남도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비열하게도 환도성을 파괴하고 보물들을 약탈했으며,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신을 훔쳐갔다. 또 태후 주씨를 비롯한 많은 인원들을 강제 연행해 갔다. 당시 고구려는 적을 추격해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나, 태후가 잡혀가고 부황의 시신이 약탈당한 조건에서 추격전을 펼치지 못했다. 고구려는 이듬해 많은 보물을 보내고 부황의 시신을 되찾아왔지만 태후는 되돌려 받지 못했다.

평양으로 임시로 수도를 옮기다.

〈삼국사기〉권 18 고구려 본기 고국원왕 13년 7월 조에는 왕이 ‘평양 동황성에 거처를 옮겼는데, 성은 지금(고려 때)의 서경(오늘의 평양) 동쪽의 목멱산에 있다’는 기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을 수도를 옮겼다고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황성은 왕이 사는 궁성을 가리키므로, 343년 평양의 동황성도 임시수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고국원왕이 임시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까닭은 당시 조성된 정세의 급박성 때문이었다. 전연(모용황세력)의 침략으로 요동지방에서 환도성에 이르는 구간의 고구려의 방어 역량의 허실이 노출됐고, 수도 국내성은 환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방위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평양성으로 수도를 임시로 옮겼다.

동황성의 구체적 위치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에서는 황성이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속에 있다고 했을 뿐이다. 〈평양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황성이 평양부 동쪽 4리 지점인 목멱산에 있으며,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조시기 평양부청사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4리 되는 지점에는 고구려의 성터나 큰 건물터가 없다. 그런고로 일부 책들에서는 의암산에 황성이 있었다고 써놓았지만, 여기에도 고구려 때 성터나 건물터가 발견되지 않는다.

343년 고국원왕이 거처했던 동황성은 동쪽 황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기준으로 동쪽인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평양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당시(이조시대) 평양부가 있었던 곳을 기준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릇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동황성은 고구려 고국원왕 당시의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 황성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당시의 평양성은 청암동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암동성을 기준점으로 해서 동쪽 4리 지점에서 동황성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접근해 볼 때 청암동성에서 동쪽으로 4리쯤해서 청호동 토성(평지성, 길이 약 1.3km)과 고방산성(길이 약 3km)이 있다. 고구려의 수도성이 구성은 5~6세기까지도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으로 돼 있었던 것만큼 바로 이곳을 동황성으로 비정하는 게 합리적이다. 청호동 토성이 있는 일대에는 큰 건물터도 여러 개 있다. 이 청호동토성과 고방산성이 언제 축조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 고국원왕 정사도(안악3호 고분)

고국원왕은 343년에 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 370년대 초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370년대 초까지 이곳이 고구려의 임시수도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곳에 그토록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은 전연과의 대치상태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고국원왕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평양 서북방 요충지들에 성곽방어시설을 많이 건설하고, 황해도 일대에도 구월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성들을 쌓았다. 특히 장수산일대에 또 하나의 부수도로 삼을 남평양성을 건설했다. 고국원왕은 이러한 대규모 건설 사업을 직접 지휘감독하기 위해 직접 지방을 순수(왕이 지방을 직접 돌아다니며 시찰하는 것)했다. 이처럼 고국원왕은 죽을 때가지 평양 동황성에 머물면서, 동분서주하면서 평양근처에서 대규모 건설 사업을 수없이 벌였다. 그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군릉 개축 사업이다. 제반 자료들과 유적 유물들에 의거해 볼 때 단군릉이 고구려 무덤양식으로 개축된 것은 고국원왕이 동황성에 머물던 4세기 중반 경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대대적으로 건설하고 단군릉을 개축한 것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장수왕 재위기간이었던 425년 평양천도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고국원왕 때부터 시작됐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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