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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라틴아메리카의 투쟁(5)-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36)
  •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8.06 12:44
  • 댓글 1

1) 전두환의 모델 멕시코

멕시코 역시 라틴아메리카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식민화, 독립을 거쳐, 20세기 초 자유주의자가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 기초는 역시 자원(석유 등)수출입니다. 멕시코는 1910년대 혁명기를 거쳐 1920년대부터 군부가 조종하는 제도혁명당의 독재시대로 들어갑니다.

멕시코 혁명은 농민을 대변하는 사파타, 노동자를 대변하는 판초빌라, 민주세력이 자유주의 지배세력에 대해 혁명을 일으키고 동시에 서로 싸운 복잡한 내전입니다. 그 결과로 탄생한 제도혁명당은 특이한 조직입니다. 멕시코 혁명에서 승리한 민주세력에 복무했던 군인들이 일종의 내부 쿠데타로 민주세력 위에 올라서서 세운 정당이죠.

결국 민주세력과 자유주의자, 민간 정치인과 군부의 타협 체제죠. 민주주의라는 선거를 통해 군부가 내정한 사람이 계속 정권을 장악했어요. 전두환이 좋아했음직한 정당입니다. 실제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면서 멕시코의 제도혁명당을 참고했다고 해요.

제도혁명당은 민주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공모해 사파타나 판초빌라로 대변되는 노동자, 농민의 혁명을 억압했어요. 노동자, 농민에게 일부 양보도 있었으나 사실 말뿐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 그리고 아주 점진적으로 토지개혁도 하고, 노조(제도혁명당 소속 어용노조)의 대표자들을 정권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 농민을 침묵시키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았어요.

50년대 들어와 제도혁명당 정부는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을 교대로 실시하고, 국내자본의 축적과 외국자본의 도입도 교대로 실시했어요. 원자재(석유) 수출과 수입대체 내수산업 등으로 아주 느린 성장이었습니다. 노동자에 대해서 박정희보다는 덜 억압적이었지만 경제성장은 한국보다 더 느린 속도였습니다. 그래도 멕시코는 원자재 수출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어느 정도 탈피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수출품인 석유의 가격이 하락하고, 외채가 증가하며 인플레가 심해지자, 1982년 IMF 지배하에 들어갔고 1994년 미국과 나프타(NAFTA)를 체결하면서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IMF 지배, 신자유주의 등은 시기나 배열만 다를 뿐 한국과 유사합니다.

2) 사파티스타의 창립

멕시코에서 민중의 저항은 1968년 10월2일 학생 시위대를 보안군이 학살하는 사건을 계기로 활성화됩니다. 좌절한 대학생을 주축으로 게릴라전이 발생했습니다. 게릴라들은 민족전선을 형성해 도시 게릴라전을 전개했지요. 1974년 게릴라는 대통령의 장인을 납치했습니다. 보안군의 탄압으로 민족해방전선은 결국 위축되었습니다.

80년대(83년 11월17일) 사파티스타가 창립되었습니다. 멕시코 남부의 밀림지대 치아파스주 원주민은 1917년 혁명 헌법이 약속했으나 여전히 실현되지 않은 토지분배를 요구했습니다. 70년대 잔존했던 인민전선 계열의 게릴라의 일부(마르코스파)가 원주민의 요구와 결합하면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세워졌습니다. 이는 멕시코 혁명 시대 농민, 원주민을 대변하여 토지분배를 주장했던 혁명가 사파타를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사파티스타의 지도자는 마르코스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본명은 세바스찬 기옌 빈센트입니다. 그는 1957년생이며,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철학을 전공으로 했고 마르크스주의, 알뛰쎄, 푸코를 연결해 논문을 썼습니다.

그는 졸업 후 대학교에서 철학교수로 활동하다가 인민전선에 가담해 게릴라가 되었습니다. 그는 70년대 말 쿠바에서 게릴라전 훈련을 배웠다고 한다. 1983년 치아파스주의 원주민과 결합해 사파티스타를 조직했지요.

▲ 사파티스타들.[사진 : 구글검색]

3) 사파티스타와 자율운동

사파티스타의 각 집단은 위계적인 질서가 없고 네트워크를 통해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집단입니다. 각 집단은 게릴라군 지도자와 마을 평의회로 구성됩니다. 마을 평의회가 결정하며 게릴라군은 이를 집행하죠. 평의회와 게릴라, 이중적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마르코스는 자신을 늘 부사령관이라 지칭합니다. 그리고 사령관이 누구냐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나의 지도자는 민중이다.”

사파티스타는 치아파스주 밀림에서 활동했기에 중앙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94년 1월1일, 멕시코 정부가 나프타(NAFTA)가 실행된다고 선언한 날, 3000여명의 사파티스타가 모여 치아파스주도(州都)의 시청을 점령해, 멕시코 정부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95년 2월9일 정부가 사파티스타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으나 2001년 평화협정을 맺어 치아파스주 자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때 멕시코 해방신학 계열 신부와 추기경이 정부와 사파시스타의 협정을 중재했다고 합니다.

4) 대안적 세계화

사파티스타는 이제 게릴라 운동을 넘어섰습니다. 사파티스타는 정치적 운동으로 전환합니다. 이런 전환에도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치아파스주는 사파티스타가 무장된 힘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게릴라 운동과 정치 운동을 결합하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사파티스타는 이제 원주민 자치를 넘어 멕시코의 민주화를 시도합니다. 2006년 1월1일 멕시코 전 지역에서 행진하면서 대선에서 민주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파티스타는 2018년 개최되는 멕시코 대선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파티스타는 원주민 여성을 대선의 후보로 선출해 놓았습니다. 올해라니 그 결과가 기다려집니다.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대안적 세계화를 모색합니다. 2005년 사파티스타 6차 선언 이후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대안적 세계화를 제안했습니다. 전 세계 600여개의 좌파 조직, 원주민 조직, 비정부기구를 초청해 치아파스주 밀림에서 2주간에 걸쳐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사파티스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그 특징은 그들이 구호로 삼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모두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자, 우리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everything for everyone, nothing for us).”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자주적 정신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봅니다. 이런 자주적 정신에 따라 조직된 것이 앞에서 말한 조직 형태입니다.

원주민 자치조직과 게릴라 부대, 자율적인 네트워크식 조직, 게릴라 운동과 정치 운동, 치아파스주 자치와 멕시코 민주화, 그리고 대안적 세계화, 이런 것들이 모두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는 자주적 정신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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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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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참 2018-08-14 19:04:08

    먼저 사실과 다른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사파티스타 농민군은 3년 만에 해산했습니다. 사파티스타 한계는 지도부가 도시에서 내려온 지식인 집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관념적이었습니다. 이 글도 사실에 기반하지 않고 사변적으로 반짝 했다 사라진 사파티스타를 추억하는 게 아닐까 우려됩니다. 오죽했으면 뉴욕 타임스가 '포스트 모던'의 상징으로 꼽으며 격려했겠습니까?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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