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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60주년 미술창작의 산실, 만수대창작사북한(조선), 예술로 읽다(31)
  •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8.07.0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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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의 생산과 수용이 협회나 단체 등과 같은 사회적인 틀과 시장에 완전히 결부되어 있다”는 아놀드 하우저의 지적이 가장 적합한 사회가 북측일 것이다. 국가가 미술의 창작과 유통을 직접 관리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행 주체로서 미술작품을 실제적으로 창작하고 유통하는 대표적인 주체가 만수대창작사이다.

만수대창작사는 주체미술 발전이라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설립되었다. 1959년 4월 천리마 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비 건립을 위해 조선미술가동맹 산하에 조각창작단을 조직하고, 1959년 11월17일 동상 구성 초안을 지도해 준 것이 시작이다. 1973년에 이 조각창작단을 모체로 하여 중앙미술제작소를 통합하고 이후 사진제작단과 수예제작단을 수용하는 등, 미술 창작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미술기지를 설립케 한 이는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그리고 만수대창작사라 명명하고, 창립일도 김 주석의 현지 지도일인 59년 11월17일로 지정하였다.

평양시 평천구역 내 2만여 평 대지 위에 조성한 1만여 평 규모의 건물에 1000여 미술가들과 4,000여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조선화창작단, 영화미술창작단, 공예창작단, 도안창작단, 도자기창작단, 돌조각제작단, 동상제작단, 만수대창작단, 미술기재제작단, 보석화창작단, 수예창작단, 유화창작단, 조각창작단, 출판화창작단, 벽화창작단 등을 운영하고 있다. 리경섭 사장과 인민예술가인 김성민 등 5명의 부사장 체제로 운영을 하고 있다. 천리마동상(1961년), 만수대기념비(1972년), 주체사상탑과 개선문(1982년) 등 북한(조선)을 대표하는 다수의 조형물과 혁명사적지들을 건설했다.

2008년 4월에는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평양의 통일거리에 만수대창작사 미술관(장금철 관장)이 새로 개관했다. 미술관에는 조선화, 유화, 보석화, 출판화, 수예, 도자기, 만년화, 공예, 서예를 비롯한 미술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는 1층 종합미술관과 2층 뮤지엄 숍으로 구성됐다.

▲ 주체사상탑[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제공]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남측에게도 널리 알려진 정창모와 고려청자를 재현했다고 알려진 우치선, 그리고 금니화(金泥畵)를 발굴하고 새롭게 발전시킨 황병호 등이 있다.

2005년 10월 중국 북경에서 열린 제8차 국제예술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정창모는 북측의 고유한 미술양식인 조선화의 대가로, 이때 수상한 작품이 <남강의 겨울>이다. “사회주의 미술 건설에 주체의 원칙을 확고히 견지하며 사상성과 예술성을 결합하고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조선화의 기본인 ‘함축과 집중’에 충실하고, 그 묘사원리 중 특히 몰골기법에 능한 작가로 알려졌다. 2012년 제15회 북경국제예술박람회에서 만수대창작사 소속의 유화작가인 최명식이 ‘기다리던 해방의 날’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려청자상감기법을 완성해 ‘고려청자의 대가’로 유명한 우치선은 “은근하면서도 깊이 있고 아름다운 색조와 세련된 형태, 독특한 장식기법 등으로 국보적 작가”라고 평가받고 있다. 도자가창작단에는 그의 아들인 우철룡과 외동딸인 우복단이 대를 이어 활동하고 있다. 2014년 상해국제도자기예술박람회에서 우복단은 ‘잉어무늬투각장식꽃병’으로 최우수창작상을, 우철룡은 ‘포도무늬호로주전자’로 백옥란동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소가죽을 고아 만든 풀에 금가루를 개어 채색하는 기법으로 탱화에 주로 사용됐던 금니화를 복원한 이가 황병호이다.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조선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황 화백은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시대 이징(李澄.1581~1645)의 비단 금니화인 “독수리”를 직접 본 뒤 일제 강점기에 맥이 끝긴 금니화의 복원에 전념해, 1994년 ‘백두산의 학’을 선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하는 작품에 한계를 느낀 그는, 이후 15년간의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순금과 만년안료로 그린 ‘조선금니화’를 복원해, 국가발명 심의위원회로부터 국가발명권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현재 만수대창작사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세계미술시장 진입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젊은 미술가를 육성해 현대미술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이것이 G2 국가의 권위를 상징케 된 것처럼 북측도 미술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특히 북측만의 미술로 정체성을 확립한 조선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을 십분 반영한 조각과 건축을 통해 일정 부문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해외에서 최초로 북측 미술 전시회가 열린 것은 2008년 9월2일이다. 북측 문화성 주관으로 독일 아트센터 베를린에서 열린 “Art from Pyongyang전”이 그것. 여기에 김성민, 김승희, 정창모, 선우영 등 당대 북측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100여 명의 작품 150여 점이 전시됐다. 상당수 작품이 수만 유로의 고가로 판매돼 세계미술시장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수대창작사가 공식적으로 세계미술시장에 진입한 것은 2007년 9월23일이다. 세계아트마켓의 핫 플레이스인 북경 ‘798예술구’ 내 환톄(環鐵)예술구에 만수대창작사 미술관을 개관한 것이다. 개막식에는 개관전을 겸해 당시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을 겸하고 있던 김성민 부사장과 정창모 등 15명의 유명 미술가가 참석했다. 특이한 것은 이곳을 통해서 위작과 모작을 구별 및 방지할 작품 감정 업무를 개시했다는 점이다. 2010년 5월에는 근처 798창의광장 부근에 조선만수대창작사 미술관 신관을 개관했다.

2013년부터는 인터넷 사이트(www.mansudaeartstudio.com)를 개설하고 작품 판매를 시작했다. 이탈리아에 거점을 두고 상거래를 하고 있는 이 사이트를 통해 인터넷 거래와 작품의 진품 확인, 그리고 배송까지 일괄적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다.

획기적인 것은 만수대해외개발회사그룹(MOP)를 신설해 해외사업을 다각화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기념비 수출과 박물관 건설 사업이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에서 다수 실적을 보였는데, 나미비아 대통령 궁전, 독립기념관, 적도기니 정부청사, 앙골라 평화기념비, 카빈다공원, 세네갈 아프리카르네상스기념탑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 앙코르 파노라마 박물관을 2015년 12월에 개관해 운영 중인데, 10년 간 운영권을 가지고 약 1000만 달러 정도의 건립비 등의 투자금을 회수한 뒤 정부에 무상 기증하는 방식이다. 이 사업은 공훈조각창작단과 도안창작단이 주도했다.

북측의 미술이 이렇게 성장한 근간에는 평양미술대학이 있다. 평양시 동대원구역에 위치해 있는 평양미대는 1947년 9월7일 평양미술학교로 발족했다. 그 후 평양미술전문학교로, 1952년 9월부터 평양미술대학으로 승격 개편됐다. 현재 대학에는 조선화학부, 회화학부, 출판화학부, 조각학부, 공예학부, 산업미술학부 등이 개설돼 있으며, 해외동포와 현장 일꾼들을 위한 통신교육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 주체미술연구소와 박사원, 미술관 등을 산하에 두고 있다. 1989년에는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이 학교의 설립과 북측의 미술 형성기에는 당시 경성 화단 및 대구 화단과 경쟁하던 평양 화단의 힘이 컸지만, 북행한 남측 미술가와 일본 유학파, 그리고 고려인 미술가의 영향도 만만치 않았다.

북행한 주요 미술가는 강신범, 구본영, 기웅, 김규동, 김기만, 김삼록, 김용준, 김장한, 김정수, 김주경, 류석연, 리건영, 리석호, 리지원, 리쾌대, 리팔찬, 림군홍, 서돈학, 윤자선, 정종여, 정창모, 정현웅, 최재덕, 표세종, 황영준 등이며, 이 중 김용준은 평양미대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근원 김용준은 경상도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에서 오지호와 함께 서양화를 전공했다.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참여했고 그 대학에서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동국대학교 사학과에서는 미술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1947년엔 조선미술사를 집필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항하는 ‘목일회전람회’를 조직한 진보적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한국전쟁 시기 북행해 평양미술대학교 조선화학부 강좌장으로, 또 과학원 고고학연구자로 활동했다. 그는 또 1957년 작 “춤”으로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금상을 받았을 만큼 현역 미술가로도 활약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기간 그는 ‘조선화기법’(1960), ‘조선화채색법’(1962) 등도 집필했다.

고려인으로 크게 기여한 이는 바로 변월룡이다.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변 화백은 한인학교를 다니던 중 빼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스베르들롭스크주 미술학교로 유학을 간다. 여기서 재능을 인정받아 러시아 최고의 명문학교인 국립레핀아카데미를 수학한 뒤, 그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게 된다. 당시 북측의 전후 재건을 지원하던 소련 정부의 지시로 1953년 7월 변 화백은 북측에 파견돼 평양미대 재건을 도왔고, 미대 고문으로 활동하며 커리큘럼 등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복잡한 정치적 이유와 귀화 거부로 추방됐다.

평양 출신으로 주목할 이는 이중섭의 절친으로 유명한 문학수와 시인 정지용의 벗인 길진섭이 있다. 본명이 문경덕인 문학수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평양미술전문학교에서 강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자이자 미술가로 큰 활약을 보였다. 1964년부터는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인상주의 화가 출신으로서 북측의 유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길진섭은 아버지인 길선주 목사가 3.1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숭실중학교를 중퇴한 뒤 서울에서 유화 공부를 시작했고, 1932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진학했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미술가동맹 서울시지부장, 남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 남산미술연구소 소장, 서울미대 교수 등으로 일하다가 1948년 7월 북행했다. 1963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북측은 그들만의 미술장르를 확립하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화’이다. 조선화는 동양화에 기초했으나 여기에 채색과 서양화적 기법이 가미된 독특한 양식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수법을 추구해, 추상이 없고 사실적 묘사와 채색이 특징이며 선명성과 간결성이 장점이다. 기법적으로는 동양화의 전통적 화법인 몰골법을 취하기 때문에 윤곽선이 무시되고 면(面)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자체 개발한 물감과 닥나무로 만든 ‘참지’를 사용하고 있다.

▲ 강선의 노을(정영만 작)

조선화 부문에서 대표적인 화가는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진 <강선의 저녁노을>을 그린 정영만과 독특한 작품세계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선우영이 있다.

1938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인민예술가 정영만은 1962년 평양미술대학 조선화학부를 졸업했다. 두 차례에 걸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1989년부터 만수대창작사 창작부사장 겸 조선화창작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역동성이 넘치는 구성과 독창적 형상, 활달한 필치와 강렬한 색채, 사실주의적 묘사력 등이 탁월한 그는, 국제미술전람회에서 금메달과 최우수상 등을 받았던 1973년의 <강선의 저녁노을>로 유명하다.

'진채세화(眞彩細畵)'의 대가인 선우영은 1946년 평양시 용성구역 마산동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수예가이자 공훈교원인 어머니 노정희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미술에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다. 평양경공업대학에 진학해 공예를 배우다가 평양미술대학에 편입학, 산업미술을 전공한 뒤, 중앙미술창작사에서 유화를 그리다가 1972년부터 '조선화(朝鮮畵)'를 기본으로 주체적 미술을 발전시키려는 당의 방침에 따라 조선화를 익혔다. 1973년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에 가입해 조선화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 세밀화 기법을 위주로 한 주제화와 풍경화 등에서 '진지하고 섬세하며 생동적인 화풍'을 펼쳤다.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수훈했다.

한편 북측에서도 다양한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1947년부터 시작된 국가미술전람회는 지도자의 생일, 당창건기념일과 같은 주요 명절에 열리는 국가적 차원의 전람회로 대표적인 미술전시회이다. 주요 명절에는 국가미술전람회를 비롯해 분야별 전시회가 동시에 진행되는 미술축전이 벌어지는데, 미술축전에는 신인미술전람회, 산업미술전람회, 청소년아동미술전람회, 기념품전시회, 조선민족옷전시회, 컴퓨터미술경연 등이 열리고 있다.

북측에서는 미술전람회를 ‘조형 예술적 가치가 있는 미술작품을 전시해 대중적인 선전이나 교양을 목적으로 일정 기간 보여주는 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미술전람회는 ‘미술가들과 군중들이 창작한 사상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통해 근로자들의 사상교양과 문화정서생활에 이바지하도록 기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만수대창작사 외의 주요 미술품 창작기지는 1968년 8월7일에 창립된 조선노동당 중앙미술지도국 산하 미술창작단체인 중앙미술창작사가 있다. 중앙미술창작사의 기본 사명은 ‘주체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을 반영한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한 미술작품을 창작, 보급해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산하에 조선화창작단, 유화창작단, 출판화창작단, 조각창작단, 공예창작단, 도안창작단의 6개 창작단을 두고 있다.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산하의 미술창작단인 조선인민군창작사도 있다. 조선인민군창작사는 조선인민군 소속 화가들로 구성된 미술창작집단으로 산하에 조선화창작단, 유화창작단, 조각창작단, 공예창작단, 수예(자수)창작단, 서예창작단을 두고 있다. 창작 작품의 주제는 ‘선군혁명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혁명수뇌부 결사옹위, 일심단결, 반제국주의를 주제로 한 선전화 창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2000년 이후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강조하면서 컴퓨터 기술을 응용한 <백두산해돋이> 같은 ‘컴퓨터 필림화’(CG)를 창작하기도 했다. ‘컴퓨터 필림화’라는 명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밖에 각 도별로 창작사가 있으며, 철도창작사, 백호창작사, 삼지연창작사, 능라888창작사 등이 운영 중이다. 미술가들은 최소 1개 이상의 창작사에 소속돼 활동을 하고 있다.

미술 원로들의 단체인 송화미술원도 있다. 현직에서 물러난 원로미술가들에 의해 1995년에 발족됐다. 윤이상음악당에 상설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현재 송화미술원에는 수십 명의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 교수, 부교수 출신의 유명한 원로 미술가들이 소속돼 있으며, 분야별로는 조선화, 유화, 판화, 수예, 서예의 권위자들이 망라돼 있다.

현재 만수대창작사는 최근 외화벌이 창구의 하나로 지목돼 제재를 받아 거래가 뜸해지고, 해외 수주도 크게 줄었지만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다. 문화 친선 외교의 선두에 있는 미술교류의 핵심 단위인 만수대창작사의 해외 교류는 지속될 것이고, 해외 수주 경쟁에서 나름 실력과 성과를 가지고 있어 경쟁력은 여전하다. 특히 세계 최대의 미술시장 중 하나인 중국에서 북측 미술의 컬렉션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바오예술망의 하위 사이트에 올라온 조선예술망 외에도 조선미술망, NK프라자 등 온라인 거래사이트가 늘고 있으며, 단동의 진자오미술관과 중조문화전람관 등 상설전시 및 판매처가 생겨나고 있다. 동양화란 범주에서 자기만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확보한 조선화에 대한 친숙함과 변별력 및 저평가된 북측 작품가격에 대한 기대 심리들이 복합적으로 반영되면서 시장 성장세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중심에 만수대창작사가 존재한다.

https://youtu.be/l2pxz4oEheU

주체미술발전의 40년력사와 더불어 만수대창작사를 찾아서

https://youtu.be/e5yZnBFXvdM

근대 미술의 잊힌 거장...변월룡을 만나다 / YTN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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