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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만들어 놓은 수의를 찢어버려라![담쟁이 작가들1]<폐허를 보다>의 소설가 이인휘의 전쟁 같은 내면일기

누군가 말했다. 예술은 소리 없이 나아가는 것, 저항의 선들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삶의 저항이건, 사회에 대한 저항이건, 시대 저항이건 예술은 결국 시대를 비추는 창이자 사회를 읽어내는 거울이다. ‘담쟁이 작가들’은 문학, 미술, 음악, 무용 등 각 분야 예술가들의 창에 비친 삶과 예술의 여정을 전해 듣는 자리다. 첫 번째는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어 6년 동안 이끌고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을 역임한 이인휘 작가의 이야기다.

“끝까지 투쟁하라!”

박영진 열사가 죽음 직전에 마지막 남긴 말이다. 그는 1986년 3월 16일 신흥정밀이라는 공장에서 파업을 하던 도중 경찰들에게 밀려 옥상으로 쫓겨 갔다. 그곳에서 경찰들과 대치하며 경찰들이 왜 공장에 들어와 노사문제에 개입하느냐면서, 열을 셀 때까지 물러가라고 했다. 경찰 지휘관은 분신하고 싶으면 하라고 조롱하며 다가갔고, 식당에서 석유를 뒤집어쓰고 올라간 박영진은 불길이 되어 산화해 갔다.

1984년 구로공단 공장에 들어와서 노동운동가들을 만나며 변혁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죽자 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던 김명운이 나서서 함께 추모사업회를 만들었다. 추모사업회를 하면서 박영진 일대기를 썼고, 추모사업회를 통해 지역활동을 했다. 그때 ‘신새벽’이라는 회보를 만들어 지역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소식을 알리는 일을 했다. 그 일을 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고, 광산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활화산’, 수배자의 험난한 삶을 그린 ‘문밖의 사람들’, 여성들의 삶을 그린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국가보안법과 시대적 모순에 의해 삶을 빼앗겨버린 한 사람의 생을 그린 ‘내 생의 적들’,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던 노동자 이용석의 삶을 그린 ‘날개달린 물고기’ 등을 썼다. 박영진의 죽음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설을 쓰며 지내다 소설에 회의를 느끼면서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고 수많은 싸움 속에서 살았다. 돌아보면 어찌 그리 살았나 싶을 정도로 한미 FTA 반대, 비정규직 차별철폐, 국가보안 폐지, 4대강 개발반대 싸움 등 수많은 싸움을 하면서 80년대 거리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작가들을 다시 거리로 불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나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매달렸다. 장장 7년을 싸워 아내의 병을 고쳤다.

하지만 내 안에서 상처가 자라고 있었다. 사회적 단절, 잃어버린 소설, 내 존재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슬픔이 독이 되어 온몸에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내가 낫다는 사실에 고마워하며 나를 위로했다. 병원비로 많은 빚을 져서 다시 공장을 다니기로 했다.

14살에 처음 공장에 들어갔다가 나이 60이 다 돼서 다시 공장에 들어갔다.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면서 2년쯤 지났을 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화에 시달리며 누군가를 괴롭혔다. 그런 내 모습이 끔찍해 나를 돌아보기 위해 공장일기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10년 전에 썼다가 버려놓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어요’라는 글은 장편 ‘날개 달린 물고기’를 쓰기 위해 만해마을 집필실에 들어갔다가 만해 선생과 겪은 이야기를 글로 옮겨 놨던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일하다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이용석 열사를 쓰기 위해 들어갔지만 글은 안 써지고 만해 선생과 관련된 이상한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 한 달 이상 괴기스럽기까지 한 일들을 겪으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만해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어졌던 일들을 글로 썼다.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앉아 자판에 손을 얹는 순간부터 원고지 180매를 쉬지 않고 썼다. 다 썼을 때 나는 비명과 같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져 잤다. 만해 선생을 쓰라는 어떤 계시처럼 여겨져, 훗날 만해 선생을 쓸 때 서문으로 달아놓고 싶었던 그 글은 아내가 아프면서 내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버렸다. 그 글을 다시 꺼내 봤을 때, 어렴풋이 왜 내가 이 글을 썼는지에 대한 대답이 눈에 보였다. 소설보다는 수필 같은 그 글을 다시 손질해 ‘황해문화’에 투고했다. 고맙게도 원고가 받아들여져 세상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묘한 진동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살면서 만나온 사람들이 그 진동을 타고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혼자 울기도 하고 혼자 술 마시며 지난 시절들을 붙잡고 나뒹굴기도 했다. 역사 속으로 흘러간 사람들과 목소리들이 눈물바람을 일으키며 내 미간에 어떤 눈으로 들어와 앉았다.

어느 날 문득 일어났을 때,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태어나 자본이 가르쳐 준 세상만 바라보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수의를 입고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서글프게 몰려들었다.

노동운동을 하고 문화운동을 하고 소설을 썼던 그 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느껴지면서 지독히도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공장의 불빛’은 2년 동안 공장을 떠돌면서 겪었던 일들을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과 대비시키며 쓴 소설이다. 1984년 구로공단에 들어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현재적 노동자의 삶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쓴 소설이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추석 명절 때 단숨에 쓴 글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을 찾아볼 수 없는 피폐한 합판공장이 그 글을 쓰게 만들어준 것이다.

‘시인 강이산’은 박영근 시인의 ‘저 꽃이 불편하다’라는 시집을 보며 쓰게 된 소설이다. 어느 날 집에 있던 그의 시집을 무심코 읽다가 시가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시 한 편 해석하고 느끼기도 어려운데 놀랍게도 시집에 나오는 모든 시가 비극으로 관통해 나를 존재의 벼랑 끝으로 밀고 갔다. 친구이기도 했던 그의 시가 비극으로 치달아가는 처절한 언어의 비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겪었던 그 세월을 소설로 남기자고 결심했다.

글을 쓰는 동안 그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고 그의 처절함이 내 처절함이 되면서 참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더욱이 그 소설 속에는 함께 노동운동을 하다가 86년 신흥정밀에서 분신한 박영진 열사의 삶까지 담겨 있어 몹시도 힘들었다. 원고지 270매에 그들의 상처와 희망을 다 담을 순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미안한 마음에 악착같이 매달려 쓴 글이다.

‘그 여자의 세상’은 우연히 들어간 시골 호프집 여주인 도움으로 쓰게 됐다. 두어 번 간 적이 있는 그 술집에서 동네 후배와 만나기로 해서 갔는데 그가 조금 늦었다. 먼저 온 나는 소주 한 병을 시켜 마시고 있는데, 여주인이 다가와 같이 한 잔 하고 싶다고 앉았다. 그녀는 소주 한 잔을 나누면서 말을 꺼냈다. 10대 후반에 가리봉 오거리 구로공단에서 일했고, 버스 안내양도 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시인 강이산’에서 나는 한 줄이지만 버스 안내양 이야기를 썼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여자가 떠올랐다. 오래 전 내가 쓴 장편소설 ‘내생의 적들’에 나오는 술집 여자다.

젊은 날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에 젖어 있었을 때 만났던 호프집 여자.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늘 고마움으로 남아 있어 문득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자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상처 입은 여자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 역시 그들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자들. 그들을 조금이라도 껴안고 보듬어주고 싶어 쓴 글이다.

마지막 소설 <폐허를 보다>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노동자 이해민을 그리며 쓴 글이다.

이해민은 현대자동차를 다니며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후배다. 현대자동차 추모사업회 위원장 이후 98년 파업 때는 현장 사수대 대장을 했다. 그런데 파업이 위원장의 직권조인으로 끝나자 여러 나날 괴로워하더니 현대자동차를 떠나버렸다. 이해민의 이야기 역시 묘하게도 첫 단편 ‘알 수 없어요’ 에 잠깐 나온다. 자동차를 떠난 이후에도 그와의 인연은 계속되어 그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봤다. 소설을 다시 쓰면서 언젠간 해민이의 삶을 통해 대기업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러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깊어지면서 대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 우리 사회의 황폐한 모습,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자본주의 사회의 구멍을 보게 만들었다. 자본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이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 그려보고 싶었다. 그건 단순히 노동자의 삶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인간상실을 대량생산품처럼 만들어내고 있다. 돈이 없으면 존재할 수도 존재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모든 권력과 전쟁 뒤에는 자본이 있다.

자본이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년 전 추석에 ‘공장의 불빛’을 쓰고 작년 추석에 ‘폐허를 보다’를 썼다. 꼭 1년 동안 4편의 소설을 새로 쓴 것이다. 돌아보면 토요일도 없이 하루 10시간을 공장에서 일하며 어떻게 이 글들을 썼나 싶다. 또 이상하게도 이 단편들은 어딘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어떤 의도도 없이 한 편을 쓰고 나면 다른 글이 또 쓰고 싶어 썼을 뿐이다. 5편의 소설 모두가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쓰는 나도 힘들었지만 읽는 분들도 참 무겁게 느끼겠구나 싶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마도 죽은 사람들이 나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소설집 한 권 내고 요란한 작가노트를 쓴 것 같아 쑥스럽지만 이 소설들은 내 상처의 노래이기도 하다. 소설보다는 노동운동, 문화운동에 훨씬 많은 시간을 쏟으며 살아왔다. 젊은 시절 소설도 운동에 이바지해야 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건 그 세월이 있었기에 이번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생의 먼 길을 걸어왔다. 이제 내년이면 60이다. 생계를 위해 공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소설에 매진하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남아 돈을 빌려 생활비로 쓰며 3개월 만에 장편을 썼다. 내가 살면서 보고 겪었던 것들을 모아 쓴 장편소설인데 올해 안에 나올 것이다.

나는 지금 원주 부론면이라는 시골에 산다. 아내가 아팠을 때 병을 고치기 위해 내려온 곳이다. 창밖으로 앞산이 보인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늙은 산이다. 박영근 시인의 시 ‘늙은 산’을 읽으면서 눈물 여러 번 흘렸다. 꽃도 나무 이름도 잃어버린 허름한 늙은 산, 사람의 향기가 사라져가고 있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황폐해지고 있는 이 세상과 닮아 있다. 점점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깊은 병에 시름하고 개개인은 인간이, 내가 누구인지를 더 이상 묻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자본주의가 무섭고 싫다.

“예술가가 꿈과 이상이 없다면 뭘 할까? 그런 거 하나 가슴에 품고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언젠가 술자리에서 가수 정태춘 선배가 한 말이다. 화폐로 계산되는 예술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영혼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예전에 시대정신을 부르짖던 많은 예술가들이 강단으로 혹은 돈과 명예가 있다는 곳으로 이전해 갔다. 문학도 그렇다. 세태에 쓸려간 그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들 역시 고단한 삶을 견디기 어려워 갔을 것이다. 그걸 어찌 탓만 할 수 있겠는가.

나이 들어 새롭게 본 세상이 폐허였다. 책을 내고 한동안 폐허라는 말 속에 갇혀 살았다. 이 폐허화되어 가는 세상에 어찌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많은 회의도 했다. 내가 쓴 소설들이 무상하게 느껴져 괴로움도 겪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왔던 삶과 보고 겪었던 삶들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세상은 한 번도 평화로운 적이 없고, 저항의 노래 역시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다고. 시여, 무기여! 80년대 많이 쓰던 말이다. 다시 찾아오고 싶다. 문학이여 시대정신이여, 무기여! 남은 생을 이 세계를, 우리 사회를, 사람을 파괴하는 것들과 맞서는 글을 쓰다가 가고 싶다. ‘폐허를 보다’를 쓰면서 찾은 내 길이다.

이인휘 1958년 서울 출생. 장편소설 <폐허를 보다>, <활화산>, <내 생의 적들>,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을 발표했다.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어 6년 동안 이끌어오다가 후배들에게 이어주고,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을 역임했다.

편집국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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