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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 그 역사인식의 문제에 대하여다시 정리해보는 미일 침략사 5
  •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 승인 2018.06.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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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운요호 침략을 지렛대로 이루어진 <강화도 조약>에 대해 불평등하지만 근대적 <개항과 교역에 관한 조약>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조약은 단순한 국가간 무역과 교류에 관한 조약이 아니라 <일본의 무력침략과 조선의 백기 항복 조약>이다. 군대를 몰고 와 양민을 학살해놓고, 사죄와 배상커녕 웃는 낯짝으로 친교를 강요하며 달려드는 일본! 당시 고종은 일본의 침략적 본질을 몰랐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싸우자니 겁도 나고, 달래서 타협하는 정도로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시기 국왕의 유약성이야말로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고종이 조금만 자주적 태세를 갖추었더라도 나라를 빼앗겼을까? 강화도 조약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문제이다.

치밀한 일본의 외교적 점검과 미국의 세세한 가르침

일본은 참으로 간교했다. 아직 실력도 채 갖추지 않은 일본으로서 세계열강의 이해가 맞물려 있는 아시아의 교두보, 조선을 침략하려면 신중해야 했다. 운요호 무력 도발 직후인 1875년 9월1일 어전회의에서는 당분간 조선정부에 공식적인 대응없이 함구하기로 한다. 대신 부산 왜관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함을 보내어 군사적 위협만 계속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3척의 군함은 ‘예포’라며 부산 항구가 떠나갈듯 한 포성으로 무력협박만 일삼고 다닌다.

일본은 왜 즉각 교섭을 들이밀지 않았을까? 청의 입장을 탐지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산에 군함이 들어와 무력시위를 하는 동안, 주청 특명전권공사 모리 아리노리는 10월초 베이징에서 북양대신 이홍장과 담판을 진행하였다. 청은, 조선은 청의 속방이므로 일본의 불법적 영종도 공격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조선은 정사를 독자적으로 판단하므로 내정에 간섭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모리는 쾌재를 부르며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라 조약체결권을 가진 독립국’이라는 보고를 했고, 일본은 강제조약을 강행키로 한다. 러시아도 일본을 도울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영국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지지했다.

▲ 모리 아리노리(왼쪽), 구로다 기요다카(오른쪽)

미국은 이미 군함과 무기를 일본에 넘겨주고, 군사고문까지 보내주었다. 주일미국공사 빙햄은 일본의 조선 침략은 1871년 조미전쟁에서 실패한 미국의 뜻을 이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 외무경과의 회담에서 페리제독이 왔을 때와 같은 수법으로 조선을 침공하라며, 책까지 주었다. ‘페리가 일본의 에도 만에 왔을 때 일본정부가 나가사키로 물러가라고 했지만 무시한 채 배를 더욱 깊숙이 해안 쪽으로 들이밀었다. 배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일본의 적대적 태도는 약해지고 저항은 약해졌다. 격식을 귀중이 여기는 나라와 교섭에서는 격식을 무시하고 대해야 한다. 상대편이 요구를 접수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대해야 한다.’(《폐리 일본 원정소사》)

일본은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다카를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모리야마 시게루와 함께 7척의 함선에 800명의 병사로 <친선>과 <협조>로 가장한 예속 조약을 강압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다. ≪조선교재시말≫에 의하면 태정대신 산죠는 첫째, 운양호 사건의 책임을 조선측에 넘겨씌우고 배상금을 받아낼 것. 둘째, 현재 조선정부가 완전한 국교단절을 선포하고 있지 않은 이상, 외교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할 것이며, 조선측에서 이에 순응할 때에는 운양호 사건에 대한 배상금 청구를 대신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 또 조선이 청에 보고해야 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 경우, 군대를 한양에 주둔시키고 강화성을 점령하겠다고 협박하라고 했다. 미국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의도였다.

조선의 백성과 유생들! 일본의 본질을 꿰뚫어보다

일본 함대가 부산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일본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끝까지 싸울 열의로 들끓었다. 《일동기유》에 의하면 ‘일본은 서양의 앞잡이이며 귀신이고, 못된 도깨비이며 침략자이며 간첩’이라고 하였다.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목적도 ‘영호의 좋은 성게알, 관해의 명주실, 호서의 쌀과 모시, 관동. 관북의 금, 은, 철, 범가죽, 곰열, 사슴뿔은 모두 일본이 탐내고 있는 것들이다. 그들의 말은 엿처럼 달고 그들의 얼굴은 지난날에 알고 있는 것처럼 반가운 빛을 띠고 있으나 그 진상을 추측하기 어렵다’라고 당시의 여론을 전하였다.

반일 기세는 일본이 강화도에 진입하자 점점 높아지더니, 정부의 투항적 태도가 전해지자 폭발했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항간의 여론은 떠들썩하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백성들은 일본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각 도의 포수 840여명이 양화진으로 왔으며 군수물자와 지원 물품 헌납이 쇄도하였다. ‘항간에서 떠들썩하게 전해지기를 정부가 화친을 요구할 의향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통분해하며 온 나라가 뒤숭숭하였다.’ ‘백성들의 의향은 모두 한번 싸우겠다고 하는데... 한통의 격문을 돌려서 사방에서 모여들게 한다면 조그마한 오랑캐를 짓조기기는 마치 천근의 무게로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고종실록》)

전, 현직 관리들도 상소를 올렸다. 전 정언 최병대는 ‘...밖으로는 경기의 연해에 이양선이 정박하여 있다고 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봐도 장수를 임명하거나 사람을 보내어 요해를 방어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무사할 것이라고 믿어서 그런 것입니까?’(《승정원일기》)

사간 장근호도 ‘추악한 무리들이 강화도에 들어왔는데 상륙한 놈이 400명이나 됩니다.... 방어요충지에 도적을 들여놓았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이 13개조로 된 조약을 약속하여 결정하자고 하는 것은 더욱 망칙한 일입니다.... 조정 관리들은 날마다 의정부에 모이지만, 처리대책을 세웠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현재의 급선무는 군영의 제도를 엄격하게 단속하고, 인재를 뽑아 시급히 요충지를 방어하게 한다면 외국배를 소탕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다치지 말라‘는 세마디로... 좋은 대책으로 삼겠습니까? 속히 비장한 지시를 내려 보내어 군사와 백성을 불러일으켜 성에 의거하여 한번 싸운다면 위험한 것을 안전하게 바꿀수 있습니다.’(《고종실록》)

그러나 겁부터 먹은 조선정부는 신헌을 접견대관으로, 윤자승을 접견부관으로 하여 강화도로 보냈다. 1876년 1월17일부터 강화부의 연무당에서 본 담판이 시작되었다. 구로다 일행은 ‘운요호가 조선의 영해를 지나가는데 조선에서 먼저 포격을 가하였다’면서 자위적 조치에 대해 시비하였으며 ‘포사격을 한 관리들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며 내정까지 간섭하려 들었다. 구로다는 전권을 갖고 왔다면서 준비해온 13개 조항의 조약 초안을 내놓으며 체결을 요구하였다. 신헌은, 자신은 일본 사신의 접대만을 명령받았을 뿐 독단적으로 처리할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조약 없이도 300년 동안 통상을 해왔는데, 갑자기 왜 조약이 필요한가고 반문하였다. 무역이 확대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니, 예전처럼 부산에서 교역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였다. 구로다는 조약을 맺는 것은 국제관례라며 10일 동안 회답이 없으면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회의는 이틀 동안 진행된 후 일단 휴회로 들어갔다.

1876년 1월20일 고종은 전현직 대신들과 대일정책을 의논하였다. 김병학은 일본인들이 ‘비록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말은 하지만, 모든 사실은... 불화를 일으키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전부터 개화를 주장해 왔던 박규수도 ‘일본이 수호하자고 말하지만 병선을 끌고 왔으니 그 정상을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수호하려 왔다고 하니 우리가 먼저 칠 수는 없지만, 뜻밖의 일이 있으면 군사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은 섬나라가 어찌 감히 와서 경계를 엿보고 방자하게 위협 공갈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지극히 분합니다.’라고 일본의 횡포한 만행과 정부의 무능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 일본과 타협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다시 보고가 오면 결정짓도록 하자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위정척사론자들은 정부의 매국정책을 규탄하는 상소투쟁을 전개했다. 최익현은 1월23일 50여명의 유생들과 상소문을 올렸다. “화친이 그들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겠지만, 겁이 나서 화친을 받아들인다면 당장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후에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사치하고 괴상한 노리개들이지만 우리 물건은 백성들의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므로 통상을 한 지 몇 해 못가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들은 비록 왜인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지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불순한 학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셋째 이유입니다....”

고종은 이홍장의 권유도 있고, 민비는 이미 일본과 개항을 밀약한 처지였지만, 정부에서 원만히 합의하여 조약체결을 결정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민비 일당은 1월24일 신헌에게 “조약을 결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매번 정부에 번거롭게 공문을 올려 보내는 것은 날짜를 오래 끌게 되므로 책임지고 간 사람이 자기 결심에 따라 잘 처리하라”며 사실상 ‘묻지 마, 조약 수락’을 지시하면서 책임을 전가하여 버렸다. 25일 신헌은 조약 체결 동의 성명서를 일본 전권대신에게 보냈다. “외교 문건이나... 교환하는 데서는 마땅히 300년의 옛 규례에 의거하면서 큰 문제는 귀국 정부와 우리 정부 사이에, 작은 문제는 귀국 외무성과 우리 예조사이에 동등하게 주고받음으로써, 영원토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입니다. 혹 조약을 새로 정리할 것이 있다면 두 나라에 다 편리하도록 강구할 것이요,... 충분히 의논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협박으로 이루어지는 교섭이 호혜평등할 수는 없었다. 강화도 조약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다음번 칼럼에서 다룬다.

개항과 쇄국의 논쟁이었나? 자주와 투항의 대립이었나?

▲ 박규수(왼쪽), 민비 추정사진(가운데), 신헌(오른쪽)

역사서들은 대체로 개항은 시대적 흐름이며 불가피했다는 투이다. 불평등 조약이긴 했지만, 그것은 만국공법조차 모르는 조선조정의 무능 탓으로 돌린다. 물론 조선이 언제까지 쇄국을 고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력을 앞세운 만행에 백기투항하듯이, ‘조일수호조규’ 협의 자리에 앉는 것은 개항 여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박규수(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평안감사)는 개화파의 거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일본이 무력을 앞세우고 우리를 협박한다면 우리도 군사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뒤에 미국 등 서양 열강이 있어 우리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전형적인 패배주의이다. 당시에도 고종과 민비만 일본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민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은 이 사건 불과 5년 전에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물리친 경험이 있다. 당시 강화도를 지키던 군사들은 죽어가면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싸웠고, 미국은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지 못한 채 조선의 투혼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갔다. 조선 민족은 그런 민족이다. 자주가 먼저다! 자주를 중심에 둔 개혁이 개방보다 먼저다! 얄팍한 자기 이권을 위하여 일본과 결탁한 민비 일당을 몰아내지 못한 조선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민비 역시 결국은 자기의 목숨조차 보존치 못하고 일본인의 칼에 비명횡사했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 현실의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의미이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교훈이다.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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