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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최초의 국상, 명림답부 이야기[박경순의 고구려사](9) 명림답부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8.06.0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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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기록들을 비롯한 문헌기록들은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외적들에 의해 무참히 소각, 약탈,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고로 고구려의 관직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동아시아에서 중세 초기 가장 발전된 선진강국을 누리었던 고구려의 역사자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우리의 민족사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 전기 중앙 관직으로 대보, 좌보, 우보, 국상, 대신, 중외대부, 평자, 부장, 부마도위, 기실, 문하배 등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에서는 최고위직 중앙관직으로는 처음에는 대보가 맡다가 다음에는 좌보, 우보가 맡았었다. 그러다가 166년 좌, 우보 대신에 처음으로 국상 1명을 두었는데, 이는 최고관직을 일원화함으로써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구려 초대 국상으로 임명된 사람은 명림답부이다. 명림답부가 국상으로 임명되는 과정에는 격동적인 정변의 역사가 깔려 있다.

▲ 일제강점기 시절 국내성 사진

수성의 왕위 쟁탈(146년)

2세기 중엽 왕권을 둘러싼 왕족과 귀족들의 내분이 벌어졌다. 이는 태조대왕의 장기집권이 낳은 필연적인 후과였다. 태조대왕은 왕위에 오른 지 67년(75세)이 되던 121년 11월 노환으로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됐다. 그 해는 후한의 침공이 있었던 해로, 후한과의 투쟁에서 그의 친아우였던 수성이 출전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것이 계기가 돼 태조대왕은 친아우 수성(51살)에게 군국의 중요한 일을 맡기면서 국가통치의 실권을 넘겨주었다. 그는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후 오만방자해져서 독단을 일삼았다. 태조대왕은 그의 독단을 제어하려는 뜻에서 123년에 패자 목도후를 좌보로, 고복장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도록 했다.

관나부 우태 미유, 환나부 우태 어지류, 비류나부 조의 양신 등 정권욕에 사로잡힌 수성의 측근 세력은 “처음에 모본왕이 죽자 태자가 똑똑치 못했기 때문에 여러 관료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려 했으나 재사가 자기는 늙었다고 하면서 아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형로제급(형이 늙으면 아우가 뒤를 잇는 것)하게 하자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위하려는 뜻이 없으니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고 수성을 부추겼다. 수성은 “맏아들이 반드시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은 천하에 떳떳한 도리인데, 지금 왕이 비록 늙었지만,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 그러자 미유는 아우가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다면서 괘념치 말라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좌보 목도루는 수성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로 정사에서 물러났다.

그 후 몇 해 지나 138년 3월에 수성은 질양(질산남쪽)에서 사냥을 하면서 장난과 놀음에 빠져들었다. 7월에는 또 기구에 나가서 닷새 동안 사냥하고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후의 신대왕)가 충고하기를 “화나 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형이 왕의 아우라는 가까운 친족으로서 모든 관료들의 윗자리에 있으니, 지위도 오를 만큼 올랐고 공도 성대하니 마땅히 충의의 마음을 갖고 예의로써 양보하고 자기를 이기도록 해, 위로는 왕의 덕을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몸에서 부귀가 떠나지 않고 화단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지 않고 낙을 탐내고 근심걱정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나는 형이 위태롭게 보입니다”고 했다. 그러나 수성은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146년(태조대왕 94년) 7월에 왜산 아래에서 사냥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대왕이 늙어도 돌아가지 않고 내 나이는 말년에 가까웠으니 더 기다릴 수 없다. 좌우 제인들은 나를 위해 도모하기 바란다”고 말하면서 왕위를 찬탈할 의지를 표명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는데, 한 사람만이 그를 반대했다. 수성은 반역 모의가 탄로날까 두려워 그를 죽여버렸다.

146년(태조대왕 94년) 10월 우보 고복장이 왕에게 “수성이 장차 반역하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죽여 버리소서”라고 청했다. 그러자 왕은 “나는 이미 늙었다. 수성이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장차 왕위를 물려주겠노라. 그대는 번거롭게 생각하지 말라”고 답했다. 이에 고복장은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인자하지 못하니 오늘 대왕의 선양(전대왕이 후대왕에게 자신이 생존시에 왕자리를 자진해서 물려주는 것)을 받으면 내일에는 대왕의 자손들을 해칠 것이라고 간했다. 그러나 왕 146년 12월에 수성에게 왕 자리를 내주고 자신은 별궁에서 살았는데, 그 때 나이가 100살이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수성(차대왕)은 두 달 뒤 147년 2월 우선 자신의 최측근인 관나부 미유를 벼슬등급을 패자로 격상시키고 좌보(우보를 잘못 기재한 것)로 임명하고, 3월에는 우보로 있던 고복장을 사형에 처했다. 이 때 고복장은 사형을 통고받고 장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슬프고 원통하구나! 내가 전날에 선왕의 근신이었으나,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지켜보고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왕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된 것이 한스럽구나. 이제 새 대왕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백성에게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보여야 옳을 것인데, 정의를 버리고 충신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가 이처럼 무도한 왕 밑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고복장이 이 말을 남기고 죽자 7월에 좌보 옥도루가 나이와 병을 핑계로 퇴직하였다. 이에 대왕은 환나부 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삼고 벼슬 등급을 대주부로 올렸다. 10월에는 양신을 중의대부로 삼고 벼슬등급을 높여 우태로 삼았다. 148년에는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을 죽였다. 그의 아우 막덕은 겁에 질려 자살해 버렸다. 이처럼 수성(차대왕)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하나의 정변이었다. 그 때까지 정권 안에서 소외되어 있던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귀족들이 차대왕(수성)을 등에 업고 정계에 진출해 권세욕을 채우려한 퇴행적인 정변이었다.

▲ 국내성 성벽

명림답부의 정변

차대왕(수성)은 왕이 된 다음에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등 횡포한 짓을 일삼았다. 차대왕이 왕위에 오른 지 거의 20년이 흐른 165년 3월에 태조대왕이 사망하니, 그의 나이 119살이었다. 그해 10월 연나부 출신 조의 명림답부가 왕(차대왕)을 죽이고 산골에 숨어 살던 그의 아우 백고를 데려다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다. 신대왕은 77살에 즉위했는데 정치를 개혁하고 대사령을 실시했으며 차대왕의 태자 추안이 스스로 나타나자 그를 관대히 대우해 양국군(나라를 양보한 군) 칭호를 주고 구산뢰와 루두어 두 곳을 봉토로 주는 등 대화합정책을 펼쳐 나라를 안정시켰다.

신대왕은 화합정책과 함께 조정의 관직체계도 대폭 재편했다. 재상격인 좌우보 제도를 없애고 국상제를 도입해,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벼슬등급도 가장 높은 패자로 올려줬으며, ‘지내외 병마사 겸 령 양맥부락’이란 벼슬도 겸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명림답부를 비롯한 신진귀족들에 의거해 국왕중심의 봉건 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신대왕과 명림답부가 실시한 정책은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함으로서 고구려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명림답부의 정변은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되돌리는 진보적 성격을 띠었다. 국내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고 봉건 통치 질서를 바로 잡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국력은 강화됐고, 후한의 침공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천추릉

명림답부의 청야수성전술과 좌원대첩

국상에 오른 명립답부는 신대왕을 도와 국왕중심의 정치체제를 강화하는데 앞장섰으며, 나라의 국력과 방위력을 강화하는 데도 힘썼다. 신대왕 4년(168년) 12월 고구려는 선비족과 협동으로 후한의 유주(하북성), 병주(산서성)를 들이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169년 현도태수 경림이 고구려에 침략해 수백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가 계속됐다. 169년 전쟁에 대해서는 중국 측 기사에서 여러 가지 혼란을 보이는 등 마치 고구려가 패전해 항복한 것처럼 기술해 놓았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172년 후한 세력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에 고구려를 친 것으로도 잘 잘 수 있다. 168년~169년 전쟁에서 후한이 패배했기에 그에 대한 보복으로 후한을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169년 침입해서 별 소득이 없었던 후한 세력은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침공을 준비해 172년 11월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에서는 한나라 대군을 맞아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 여기에는 크게 나가서 길목을 지켜 싸우면 대승을 할 것이라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뉘어 대립했다. ‘나가 싸우지 말고 지키자’고 주장한 사람은 국상 명림답부였다. 그는 “한나라의 대군을 맞서 기세가 높을 때 맞서 싸우면 병력이 많은 적군이 유리할 것이니, 예봉을 꺾을 수 없어 패배할 우려가 높다. 군사가 많은 편은 싸우는 것이 좋고 군사가 적은 편은 지키는 편이 마땅하다. 이것은 군사상식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나가 싸우자는 주장을 반대했다. 또한 한나라 군사들이 천리 길에서 군량을 운반하고 있으니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참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을 비우고 기다리면 적들은 반드시 한 달을 못 넘겨 기아에 시달리고 피로해져서 돌아갈 것이다. 이 때 우리가 강한 병사들을 앞세워 전투를 펼친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청야수성전술).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청야수성전술을 채택해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고수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군사들은 굶주리게 되자, 소득 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명림답부는 수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퇴각하는 한나라 군대를 쫓아가 좌원에서 커다란 전투를 벌였다. 명림답부의 직접적 지휘아래에서 펼쳐진 좌원벌 전투에서 한나라 대군은 크게 패전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10만대군이 하나의 전투에서 한 마리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섬멸됐다는 것은 전쟁사에서 일찍이 있어보지 못한 위대한 승리였다. 국왕은 크게 기뻐해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명림답부는 나이 99살에 정변을 일으켜 폭군 차대왕을 죽이고, 신대왕을 즉위시켰으며, 그 이듬해에는 국상겸 지내외병마사를 역임하고 양맥부락을 통치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는 172년, 105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사를 이끌고 좌원벌 전투를 지휘해 한나라군을 섬멸해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후에도 고구려 국상을 지내다, 179년(신대왕 15년)에 11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 국왕이 직접 찾아가 통곡을 했으며, 죽은 후에는 7일 동안이나 업무(정사 보는 것)를 중단했다. 또 그의 식읍이 있었던 질산에다 예식을 갖춰 장사지내게 했으며 묘지기 20가를 두게 했다. 그는 고구려의 명장이었고 진보적 정치가였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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