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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마르크스(4) 레이거노믹스와 클린턴 시대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27)
  •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6.0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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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가 아니고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국제 분업체제입니다.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 등장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 즉 리버럴이죠. 이제 역사적으로 신자유주의와 리버럴이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려 합니다.

1) 68혁명의 실패

앞에서 68혁명에 가담했던 청년 지식인이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1968년에 이르자 전 세계 동시적으로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반전운동으로, 유럽에서는 반관료주의 운동으로 전개되었죠.

그 과정은 생략하죠. 68운동은 완강한 관료적 억압국가의 저항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한 시대를 소란하게 했던 68세대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근본원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역시 68혁명에 노동자가 가담하지 않았다는 데 있어 보입니다. 물론 프랑스만은 예외였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청년 지식인의 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무관심하거나 비판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당시까지 대부분의 노동자가 대규모 공장의 육체 노동자였으며, 이들은 전후 복지사회를 통해 물질적인 충족을 얻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은 청년 지식인의 물질적 욕구 이상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거꾸로 청년 지식인의 책임도 있어요. 그들은 대개 당시 대학생이었고 고급 기술관료층의 아들들이었으므로, 노동자나 흑인, 그리고 여성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노동운동과 흑인운동, 여성운동과 같은 민중운동과 결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자와 청년 양자에게 모두 책임이 있었던 거죠. 결국 청년들의 반관료주의 운동은 부분적인 인적 청산에 머물렀고 새로운 사회로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68혁명의 유산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 전반에 남아 있던 권위주의적인 억압이 사라졌지요. 68혁명은 여성과 흑인의 인권이 신장하고 문화적인 억압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겠습니다.

2) 레이거노믹스

68혁명이 끝나자 소란스러웠던 청년 지식인은 다시 사회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여피 세대’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단정한 옷을 차려 입고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합니다. 그들은 대개 고급 지식인이었기에 현실에서도 대개 성공적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386세대가 그런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역사는 항상 멈추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저항이 출현하죠. 역사는 끝없는 투쟁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70년대 초에 이르러 60년대에 확립된 경제적 성장과 복지국가는 그 토대로부터 무너졌습니다. 그 뒤 세계는 2단계에 걸쳐서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합니다. 첫 단계는 작은 정부의 실현이고, 두 번째 단계는 국제분업의 출현입니다.

전후 미국 중심 경제에서 60년대 독일 일본이 재빨리 성장했어요. 60년대 말 세계는 과잉생산으로 공황에 빠졌습니다. 여기에 70년대에 등장한 자원민족주의로 기업의 부담이 배가되었으니, 기업은 고율의 세금을 부담하지 못했습니다. 실업자가 증가했지요. 정부의 복지 부담이 증가했는데 월남전 및 냉전, 스타워(star war) 등 전쟁비용은 증가했습니다.

생산은 과잉인데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습니다. 원자재 가격이 앙등해 상품가격이 오른 탓도 있지만 통화를 증발해 군사비로 썼던 데 기인합니다.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이죠. 70년대 서구는 60년대 볼 수 없었던 어두운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실업과 인플레가 만연했어요.

80년대 초 레이건의 모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레이건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부지출을 기업을 지원하는 데로 돌렸습니다. 그는 작은 정부라 하면서 복지비용을 줄였으나 그 대신 스타워를 통해 군수산업을 키웠습니다. 거기에 그는 기업세를 대폭 인하했어요. 이런 지원으로 일시 기업이 부흥했습니다.

레이건 정부는 인플레를 줄이기 위해 또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값싼 외국의 생필품을 대량으로 수입했습니다. 독일과 일본이 고급 소비재를 수출했다면 한국, 대만은 경공업 제품을 수출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유무역을 확대했습니다.

레이건의 모험은 처음에는 성공했어요. 때맞춰 새로운 기술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포드테일러 시스템은 자동화 기술을 통해 이른바 유연축적 과정으로 변화했어요. 자동화 기술은 기업의 생산을 합리화했습니다. 이 기술은 소량 다종 상품의 기계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상품의 문화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냈지요. 상품은 문화화하였고, 문화산업이 출현했습니다.

자동화 기술을 통해 정보를 쉽게 획득하고 광범하게 축적함으로써 유통과 금융에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새로운 경제에서 산업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이동했어요.

3)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산업, 서비스산업, 자동화 공장 등의 출현으로 새로운 노동자가 출현했어요. 이 새로운 세대는 개인적인 판단과 고립된 환경에서 노동하는 가운데 매우 개인주의적인 방식의 삶을 살면서 선배 세대인 히피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모델을 보았습니다. 60년대 히피가 염세적이었던 반면 80년대 이들은 낙관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감각적 쾌락을 즐겼습니다. 금욕적 진지한 모더니즘의 문화 대신 가볍고, 즐거운 문화를 좋아했어요. 이들이 즐긴 문화는 지적이라기보다는 육체적이며, 엘리트적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인 문화가 바로 포스트모던 문화입니다. 마치 원나이트스탠드와 같은 문화가 확산되었습니다.

4) 신자유주의의 둘째 단계

앞에서 레이거노믹스와 당시 등장한 포스트모던 문화를 살펴보았습니다. 80년대 내내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했어요.

레이건의 실험과 포스트모던 문화가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서구 국가 대부분이 따라했어요. 80년대 사람들은 자주 유연축적 체제라든가, 정보기술 혁명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요즈음 4차 기술혁명에 대해 논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들은 낮이나 평일에는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밤이나 주말에는 홍대 카페 같은 데에 가서 몸을 흔들었지요. 당시 빠르고 경쾌한 춤, 즉 디스코 시대였어요.

그러나 레이건 및 서구의 실험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미국이 선도했던 새로운 산업을 독일과 일본이 재빠르게 추적했어요. 독일과 일본이 성장하는 가운데 미국의 기업은 다시 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잉생산의 문제가 다시 터졌습니다.

실업자는 다시 늘었고, 재정적자는 확대되었습니다. 냉전은 지나갔지만 남미와 이슬람의 도전을 막고자 서구는 군사비 부담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돈을 또 찍었죠. 인플레가 다시 등장했어요. 인플레를 막으려고 수입을 확대하니, 값싼 생필품이 독일과 일본, 한국과 대만에서 들어왔어요.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90년대 들어서 쌍둥이 적자로 다시 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90년대 초반 아버지 부시 정권 아래서 노골적으로 등장했어요. 여기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클린턴의 경제개혁은 이중적이었어요.

▲ 사진 : City Watch 홈페이지

5) 클린턴과 금융자본

우선 그는 레이거노믹스를 포기합니다. 기업세를 늘리고, 정부의 복지 지출을 늘리려 노력했어요. 복지모델이 다시 어느 정도 회복되었어요. 그러나 레이건의 작은 정부론이 워낙 강하게 살아남아서 그의 노력은 그저 약간 시늉을 내는 정도였어요.

여기서 클린턴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금융산업을 키우고자 1930년대 공황 이후 규범화되었던 투자은행과 저축은행의 분리법, 금산분리법을 폐지합니다. 금융산업의 무모한 확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던 거죠. 그리고 그는 세계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WTO 체제를 수립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그가 재임을 시작한 94~95년 일어난 사건입니다.

자유무역체제를 확립하면 미국의 제조업이 무너질 거라는 걸 그가 몰랐을까요? 그것은 미국의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미국은 세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니 세계의 정보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미국은 국제적인 증권과 부동산 등 투기적인 자본시장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였죠.

그 결과 클린턴 이후 미국은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서서히 국제적 분업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국제분업이 발전하면서 세계경제에서 점차 역할이 분리되었죠. 미국과 영국은 독일과 일본에 제조업을 내주고 금융자본 국가가 되었습니다. 독일과 일본에 이어 한국 등 신흥국가가 경공업 분야로 진출했습니다.

적어도 빌 클린턴 시대,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은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새로운 산업인 금융산업 덕분에 부흥했어요. 금융산업의 공격적인 자본투자로 전 세계의 증권과 부동산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미국민을 비롯해, 전 세계 중산층이 증권과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렸죠. 가만히 앉아서 배부른 신자유주의의 성공신화가 이때부터 출현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경제체제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그 끝에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가 등장했습니다.

결국 클린턴의 정책은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 작은 정부론을 극복하고 복지모델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금융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분업체제를 만들어냈던 거죠.

6)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등장

레이거노믹스를 반대하고 클린턴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끌어갔던 클린턴 지지자들이 바로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이른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였습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나 포스트모던 문화나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현실 긍정적이라는 점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차이도 있죠. 체제에 순응적이냐 아니면 체제 내적이자만 그래도 저항을 시도하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포스트모던 문화가 레이건 시대 낙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는 레이거노믹스의 작은 정부론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복지국가 모델을 부활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포스트모던 문화가 탈정치적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합니다.

포스트모던 문화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데 그쳤다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는 합의와 민주주의를 통해 상호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했어요. 그들은 국가가 철저히 민주화되기만 한다면 국가의 힘으로 복지를 확대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는 세계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습니다. 국제분업을 통해 상호 교류한다면 서로의 이익이 된다고 믿었죠. 글로벌리제이션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주문이었어요. 그들은 이런 국제분업이 금융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한 방식이라는 점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저항적이지만 체제내적인 저항에 그쳤습니다. 빌 클린턴과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시대 역시 한 1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 이념도 세계화되어,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이나 한국의 노무현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죠. 그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종말이었습니다.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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