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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열, 형무소서 희생당한 민주혁명가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4)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해방 직후 남원건국준비위원회 건국군 차장이었던 이현열 선생은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탄압과 정면 충돌했다. 해방 후 촬영한 사진들에서는 머리를 짧게 깎았던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이계성 유족 제공]

1945년 8월 식민지 조선에 살던 민중들은 해방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해방을 기뻐할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날수록 미군정의 독재가 강화되고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로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시대의 혁명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현열(李鉉烈, 1912년생)은 해방 후 남원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건국군 차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응조 전북경찰국장을 폭행했다며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석방 후 다시 양남식 살인사건과 관련되었다며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8일 대전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에서 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출생과 성장

이현열은 1912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전주지방법원의 판결문에는 동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했고, 특기한 경력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아들 이계성(1939년생)씨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이현열은 18세 때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했는데 주로 늦은 밤 전봇대에 벽보를 몰래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1929년 12월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 전국의 청년학생들이 참여했으므로 아마 이와 관련된 활동이었을 것이다. 이후 활동 대부분은 여운형 선생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해방과 건국군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귀향 군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군에서 활동했다. 공식 직책은 차장이었지만 부하들은 대장이라고 불렀다. 한편, 판결문은 남원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의 간부로서 ‘조선의 완전독립은 공산주의 사회화’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남원 인민위원회는 면사무소나 주재소를 장악하고 미군정에 세금이나 소작료를 내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한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후 일제통치기구를 장악하고 스스로 재원을 마련해 운영했던 지역 자치기구였다. 미군정이 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니 ‘미군정에 세금을 내지말자고 선동’한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신념에 대해서는 이와 관련된 증언이나 입증자료를 제시하지 않아 당시 조선공산당과 조직적으로 연계시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이계성씨는 어머니로부터 부친이 해방 직후 읍내 청년들과 귀향 군인들을 규합하여 ‘남원 건국군’을 출범시켜 치안활동을 책임졌고, 사매면에 건국군 훈련소를 두었다고 들었다. 해방 직후 밤늦게 돌아온 아버지가 권총을 장독에 숨기는 모습, 앞뒤가 뾰족한 모자를 쓴 미군과 검은 옷을 입은 경찰이 집안을 뒤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건국군의 실체와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판결문은 건국군이라는 명칭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19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발행한 <해방조선>에서도 남원에서 건국군이 습격당했다고 적고 있어 남원지역에 있어서 건국군이라는 명칭이 분명하게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건국군의 실체를 의심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정과 충돌한 남원의 군사조직을 국군준비대로 보았다. 이는 건국군의 성격을 좌익계로 보았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국군준비대에 광복군 등 우익계열의 인사들도 참여했었음을 돌아본다면 이를 좌익계열만의 조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역과 해당 지도자의 성격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건국군이 1945년 12월 김구 선생, 이승만, 이시영 등 귀국한 항일운동가들 앞에서 행진했다는 당시 언론의 보도내용으로 보아도 이것이 좌익계열의 군사조직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하여튼 미군정은 1945년 11월13일 법령 28호를 발표해 국군준비대 등 당시 미군정에 등록되었던 30여 개의 사설군사단체들을 불법화하고 조선국방경비대로 단일화했다.

미군정의 남원인민위원회 해산 시도와 저항

▲남원 건국군 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로 보인다. 선생은 뒷줄 오른쪽 끝에 있다. 이계성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뒷줄 왼쪽 끝에 서 있는 이가 경북대 의대 교수였던 김대수 박사이다.[사진 유족 이씨 제공]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며 인민공화국을 부정한 미군정은 당시 대의기관이자 행정기구였던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막고 해산시키려고 했다. 1945년 11월15일 미군정은 인민위원회 해체를 목적으로 일제 경찰출신인 전라북도 경찰국장 김응조(1909년생, 한국전쟁 당시 수도사단 22연대장) 등 20여 명의 경찰에게 남원 인민위원회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여러 명의 미군이 이끈 무장 경관들은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경찰서 경찰관들과 함께 인민위원회, 건국군, 청년동맹 등을 공격했다.

경찰 일행은 남원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창한 등 5명을 체포하고 문서를 모두 압수한 뒤 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남원 사매면에서 건국군의 훈련 상황을 시찰하던 이현열은 이 소식을 듣고, 진정현 등 4명, 건국군 훈련소 대원 12명과 함께 서둘러 화물차를 타고 남원읍으로 향했다. 이들이 왕치면 갈치리 율치에 도착했을 때 남원읍에서 전주로 돌아가던 김응조 일행과 마주쳤다. 오후 5시30분이었다. 체포한 5명은 이미 전주로 떠난 뒤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응조 일행을 발견한 건국군은 길을 막고 승용차를 포위했다. 이현열은 차 안에 있던 김응조에게 “오늘 검거한 간부를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고 김응조와 수사부장 김봉조는 이에 시위대를 위협하기 위해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이들의 행위는 화가 나 있던 시위대를 더욱 자극했다. 권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할 수 없음을 깨달은 일행이 권총을 차안에 내려놓았고 시위대가 이를 빼앗았다.

잠시 뒤 오후 6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박종명을 비롯해 남원 인민위원회 위원 등 20여 명이 율치의 대치현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제 4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김응조를 차 밖으로 끌어내고 길 위에서 몰매를 때렸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김응조는 얼굴과 가슴에 치료 1월, 김봉조는 치료 3일에 해당하는 상해를 입었다.

얼마 후 김응조 일행이 구타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북도경에 전해졌다. 충돌 후 김응조 일행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음 날인 11월16일 추가로 미군들이 진압을 나와 폭행사건과 관련된 주동자 16명을 추가로 검거해 구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다시 주민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11월17일 성난 주민 1천여 명이 남원경찰서로 몰려가 “불법탄압 반대”, “피검 지도자 즉시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미군이 총을 쏴 박병갑(18), 김철웅(33) 두 사람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는데, <해방조선>에는 한성배도 포함시켜 모두 3명이 숨졌다고 적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946년 6월7일 이현열과 남원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박종명이 전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결과 두 사람에게는 징역 6개월형이 선고되었고 본형에 산입되는 미결구류일은 30일이었다. 이로 보아 두 사람은 6개월 가까이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다가 1946년 4월이나 5월 초에 연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46년 충돌이 계속되다

1945년 11월 남원 인민위원회가 미군정의 공격으로 더 이상 지방 정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고 반면 독립촉성국민회 등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우익계열의 청년단체들이 활성화되었다. 이승만 계열의 청년단체들은 인민위원회나 민주청년동맹 회원 출신들에 대해 테러 행위를 저질렀고 이에 대해 인민위원회 측은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의 대응활동을 벌였다. 양쪽의 활동은 점차 격렬한 물리적 충돌로 나타나게 되었다.

1946년 8월15일 새벽 남원읍 시장 일대에 유인물이 뿌려지고 벽보가 붙었다. 내용은 “파쇼 경찰을 배제하고 인민을 위한 민주경찰을 확립하라”, “남조선도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는 것이었고, 뿌린 사람은 민주청년동맹원들이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조선민주청년동맹 남원군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장기수 김대수 박사는 이 활동 때문에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 연행당했다고 한다. 경북대 의대 교수였던 그는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백만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본 것으로 유명하다. 월간 《말》지 1991년 6월호에 남원의 당시 분위기에 대해 “4, 5명만 앉아서 이야기를 하여도 포고령 위반으로 잡혀가곤 했지요. 나도 사람들과 모임을 하다가 두 번 끌려갔어요. 20일, 한 달 구금되었지요.”라고 증언했다. 당시 끌려갔다 하면 보통 한 달 정도를 재판 없이 구금당했음을 알 수 있다.

1946년 한 해는 이현열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남원경찰서를 거쳐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청 총무부장 양남식이 피살되다

이현열이 석방되었던 1946년 11월 이후 정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현열은 1947년 2월 조선민주청년동맹 남원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취임했고 3월 2일 남로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앞의 김대수 박사가 민청 위원장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두 사람이 함께 활동했을 수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 남로당은 지하화되어 있을 때였고 본인이나 동료들의 자백 외에 이 조직에 가입되었다는 입증이 불가능했으므로 이는 고문에 의해 얻어낸 자백일 것이다.

1947년 4월28일 대한독립촉성회 남원청년연맹 총무부장 양남식(25세)이 전종순, 박평, 양현식에 의해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현열, 전종순, 최학철 등 수십 명의 청년들이 무더기로 연행되어 재판을 받아 실형을 살았다.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현열은 대법원까지 항소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자신이 모르는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며 살인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이 사건의 직접 살해범 박평은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살해공범 전종순은 좌익 계열의 활동 정보를 양남식에게 제공해 왔던 프락치였으므로 여러 의문점이 남는다. 사건의 구체적 전개는 남원경찰서 프락치였던 전종순에게서 시작되었는데, 판결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간략히 일지로 대신해 본다.

1947년 1월 만주에서 조선독립동맹원으로 활동하던 전종순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38선 이북의 밀파간첩으로 오해를 살까 염려했다.

1947년 2월 10일 전종순은 독립촉성국민회 청년연맹간부인 양남식을 방문했는데 그의 고발로 남원경찰서로 끌려가 미군 CIC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미군은 전종순에게 다시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가지 말고 경찰당국과 청년연맹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협력할 내용은 경찰서장과 청년연맹 총무부장 양남식에게 좌익 측의 정보를 제공할 것, 제공할 때 직접 하지 말고 남원 산동면 김영일이라는 자에게 연락을 취할 것 등이었다.

1947년 3월 전종순의 프락치 활동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남원군내 좌익계열의 지도자 70여 명이 검거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놀란 관련 인사들은 3월 23일 긴급히 모여 대책회의를 열고 행동대원들을 조직하여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조직적으로 대응할 것을 결정했다.
3월29일 임남호 등 5명으로 유격대를 조직했다. 재판부는 이를 경찰 등 우익요인 암살부대로 여겼고 이현열은 ‘자위조직으로서 우익테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3월31일 저녁 8시 이현열은 경찰의 프락치로 활동하고 있던 전종순을 처음 만났다. 다음 날 5인 유격대 중 하나인 임남호와 함께 만나기로 한 뒤 헤어졌다.

4월1일 아침 공교롭게도 임남호가 남원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에 따라 이현열, 임남호, 전종식 3인이 만나기로 한 이날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저녁 8시 이현열은 전종순에게 임남호의 검거사실을 전달하면서 내부에 경찰 측 프락치가 있는 듯 하니 주의하라고 일렀다. 이날 이후 이현열의 5인 유격대 활동은 중단되었다.

4월7일 새벽 1시20분 200여 명의 시위대가 운봉지서를 습격하였고 경비 중이던 경찰관 5명이 발포하여 1명이 사살당했다. 이어 남원경찰서에서 출동한 기동부대가 주민 31명을 체포했다고 한다.(출처, <동아일보>, 1947년 4월9일)

4월16일 남원읍 금리에 사는 박평이 이현열을 찾아왔다. 이현열은 내부프락치로 인해 임남호가 임실경찰서에게 검거되었고 이 때문에 유격대를 해산하게 된 사연을 말했다.

4월21일 이현열, 박평, 전종순이 만났다. 전종순은 한 사람을 더 소개하기로 했다.

4월22일 이현열, 박평, 전종순, 양현식이 다시 만났다. 재판부는 다시 유격대를 조직하기로 했다고 보았지만 이현열은 새로운 유격대 조직 사실을 부인했다.

4월27일 저녁 전종순, 박평, 양현식이 만났다. 세 사람은 남원읍 금리 청년연맹회관 앞을 지나면서 양남식이 회관 안에 있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세 사람은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남원읍 금리 명지여관으로 갔다. 전화를 받은 양남식은 늦은 밤이라 외출하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이에 전종순은 다시 “중대한 정보를 줄 테니 내일 아침 6시 금암봉 옛 신사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고, 양남식은 이를 수락했다.

4월28일 새벽 5시30분 전종순이 일본도, 박평과 양현식은 각 권총을 갖고 약속장소인 노암리 금암봉에 도착했다. 이어 양남식이 도착하자 양현식이 권총을 겨누고 온 몸을 수색했다. 먼저 박평이 “너는 어찌하여 우리 좌익을 탄압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양남식은 “좌익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고, 박평은 “이놈아! 다 알고 있다.”라고 하면서 갖고 있던 권총을 양현식에게 건내 주고 전종순이 갖고 있던 일본도를 넘겨받아 양남식의 목과 얼굴, 가슴 등을 여러 차례 찔러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해방 후 두 번째 검거와 재판

1947년 5월13일자 <동아일보>는 “진범 이모”가 1947년 5월3일 전주에서 체포되었으며 얼마 뒤 주천면에서 공범 2명이 검거되었다고 보도했다. 박평 등 세 명은 28일 양남식을 살해했을 경우 일단 주천면 은송리로 모이기로 했었으므로 언론에 주천면에서 체포된 것으로 나오는 공범 2명은 전종순과 양현식으로 볼 수있다. 박평은 잡힌 적이 없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건 후 가장 먼저 잡힌 사람이 “진범 이모”라는 것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현열의 관련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직접 살인자 3인 외에는 없었다.

양남식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은 1948년 1월6일 열렸다. 피의자들이 잡히고 무려 8개월이 지난 뒤였다. 피고는 이현열, 임남호 등 9명이었으며, 이들이 받은 범죄혐의는 살인, 살인예비, 포고령 제2호 위반, 법령 제5호 위반, 살인교사, 협박이었다. 특이하게도 박평과 양현식은 피고인 명단에 없다. 박평은 체포되지 않았다하므로 기소유예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양현식의 경우는 의문이다.

1948년 5월18일 대법원은 <1948년 형상 제43호> 판결문에서 이현열과 전종선의 상고에 대해 기각판결을 내렸다. 검찰은 집단적 폭력살상 파괴행위가 계속 발생되고 있으므로 무기징역이 약하다며 엄중처단을 요청하며 상고했다. 반면 이현열은 유격대는 우익테러에 대비하기 위한 청년조직으로 우익단체 간부의 행동을 조사하던 중에 발생한 사건이었고, 전종순이 양남식에게 매수당했으며 양남식의 죽음은 유격대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재판 결과 이현열과 전종순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후

이현열이 끌려가고 남은 가족들은 탄압을 피해 남원 산동면 부절리나 운봉면 이늘리, 전남 곡성 등으로 흩어져 피신생활을 했다. 아들 이씨는 부친을 면회하기 위해 전주나 대전으로 떠나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련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6월28일부터 대전형무소의 정치범 학살이 시작되었다. 미 25사단 CIC는 7월1일 1400여 명이 총살당했다고 보고했다. 장기수부터 총살했을 것이므로 이현열은 학살이 시작된 초기에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원에서도 인민군 점령 직전 남원경찰서 유치장 등에 갇혔던 국민보도연맹원 등 주민 100여 명이 7월20일 5사단 헌병대에 의해 고죽동 야산에서 집단희생당했다. 국군 수복 후에는 국군 11사단의 토벌작전으로 이어져 다시 수 백명의 주민들이 주거지에서 학살당했다. 이현열의 동생 이병용도 형이 좌익이었다는 이유로 이 시기에 잡혀 1951년 3월 9일 산동면 대상마을에서 2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쟁점

이현열은 미군정기 1946년 5월경 남원 인민위원회 사건과 1947년 5월 3일 양남식 사건에 연루되어 두 차례 재판을 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 1950년 7월초 학살당했다. 형무소에서의 죽음이 대한민국의 반인도적 범죄였음이 확인된 지금 그가 겪었던 두 차례의 재판은 과연 적법했을까? 첫 번째 재판의 경우 인민위원회의 해산과정에서 있었던 미군정의 발포행위는 민중학살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이에 대한 저항행위는 비무장 시위군중의 자위권 발동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두 번째 재판의 경우는 살인사건의 교사범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형량도 무기징역으로 최고형을 선고받아 앞의 사건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 이 사건 역시 관련자들의 자백이 가장 큰 증거였을 것이다.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제기될 만한 의문점을 정리해 본다.

나는 전종순의 프락치 활동이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이현열의 연행과 관련되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당시 언론은 1947년 5월3일 연행된 이현열이 이미 주모자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박평 등 직접 살인자들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이현열이 진범이었다는 정보를 남원경찰서가 언론에 제공했다면 이는 사전에 이미 사건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종순의 프락치 활동이 이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런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사사건기록 등 관련 자료들이 현재 확인되진 않지만 아마 이현열이 직접 살인을 교사했다고 자백한 사람은 전종순이 유일했을 것이다. 함께 양씨 살인을 모의했다는 박평과 양현식은 재판정에 서지 못했다. 결국 프락치 전종순의 자백이 이현열을 살인교사범으로 몰아 간 유일하고 결정적 증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대법원까지 함께 갔던 것으로 보아 자신도 무척 억울했던 모양이다. 이는 1958년 조봉암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중간첩 양명산이나 1974년 육영수의 저격범 제일교포 문세광을 생각나게 한다. 이들은 나중에 진술을 번복했지만 이미 사태를 뒤집을 수 없었다.

이현열의 유격대가 살인을 모의했는지 여부도 검토되어야 한다. 이현열이 자위조직으로서 꾸렸던 유격대는 1947년 4월1일 임남호의 연행으로 해체되었다. 그 뒤로 만들었던 청년들의 모임은 운봉면 시위를 준비하기 위한 조직으로 양남호 살인 사건과 무관했다. 이현열은 양남호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4월21일 이현열, 박평, 전종순의 만남에서 오고 간 이야기 중 경찰서장과 총무부장의 살해에 대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고, 더 확대해 본다면 유격대의 임무 중 암살에 대한 검찰의 주장은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1947년 4월28일 남원의 청년 양남식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혹한 고문과 공작을 통해 가공된 거짓 증거로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인 이현열에게 누명을 덮어씌운 것이었다면 이 역시 인권을 유린한 용서받지 못할 국가범죄에 해당할 것이다.

▲2015년 2월23일부터 대전시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현장 일부가 발굴되었다. 사진은 2월 27일 발굴 5일째 모습으로 발굴지 단면으로 유골들이 보인다. 필자도 4일 동안 발굴에 참여했다.

계속되는 아픔

전쟁이 나고 남원을 점령한 인민군측은 희생자의 부인이라며 여성동맹위원장을 시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두 달 뒤 온 가족이 지리산으로 쫓겨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한겨울 동상에 걸린 어린 딸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잘라 불구의 몸이 되어야 했다. 빨치산이라기보다는 도망자였던 그들이 그해 겨울을 나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아들 이씨는 2000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활동에 참가했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시위와 서명운동, 철야농성에 참가하여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럼에도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끝낼 무렵인 2010년이 되어서야 어렵게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부친 이현열의 죽음이 불법이었음을 인정받았다.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씨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도 대전 낭월동에는 부친의 것일지 모르는 유골들이 여전히 묻혀 있다. 부친이 당했을 억울한 누명도 벗겨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아들 이씨가 꼭 하고 싶은 일은 남은 유해의 발굴과 부친의 누명을 벗기는 일이다.

그는 양남식 살인사건의 진실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자료를 아직까지 찾고 있다. 재판의 기초자료로 쓰였을 수많은 참고인들의 진술조서와 진술서들이 담겨 있는 형사사건기록이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 조금의 숨김도 없이 관련된 모든 자료를 공개해야 할 것이다.

▲2013년 9월10일 아들 이계성씨가 대전형무소 사건 희생자 위령비 옆에 섰다. 비석 아래는 물론 이씨가 서 있는 곳 전후좌우 그리고 사진을 찍는 필자의 발밑에도 모두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다.

*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

신기철 소장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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