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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은 어떤 나라를 꿈꾸었나?[박경순의 고구려사] (4) 고구려의 건국 사상과 이념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8.03.1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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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려면 먼저 건국자의 건국 사상과 이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자인 고주몽의 건국 사상과 이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어 그 전모를 밝히기 어렵다. 하지만 한 단면을 찾아 볼 수 있는 설화가 있으니, 〈동국이상국집〉(고려 이규보의 문집)의 ‘동명왕편 및 서문’에 실린 송양과의 만남 설화이다.

비류왕 송양이 사냥을 나갔다가 왕(주몽)의 얼굴생김이 보통이 아님을 보고 초청해 자리를 같이하고서 말하기를 “구석진 곳에 살고 있다 보니 아직 어진 이를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우연히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나요?”라고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손자요, 서쪽나라 왕이라. 감히 묻건 데 군왕은 누구의 뒤를 계승한 사람이요?”라고 물었다. 송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선인의 후손으로 여러 세대 째 왕으로 있소. 지금 이곳이 너무 작아 둘로 나눠 두 사람이 왕이 될 수 없소.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안 되니 나의 부용국(후국)이 되는 게 어떻겠소?”라고 했다. 왕이 이르기를 “과인은 하늘의 뒤를 이은 후손인데 지금 당신은 신의 후예가 아니면서도 억지로 왕을 자처하고 있으니 만약 나에게 귀복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망하게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송양이 왕이 여러 차례 천손이라고 자칭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의심을 품으면서 그 재간을 시험해보려고 생각했다.

태양의 나라를 꿈꾼 주몽

주몽과 송양의 만남 설화가 시사해주는 바는 크다. 이 설화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꿈과 이상을 상징한다. 송양은 자신이 왕으로 되어야 할 이유로 ‘선인의 후손’을 내세웠다. 선인의 후손이란 단군선인의 후손을 뜻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주몽은 ‘천제의 손자’(천손)를 자처하고 있다. 천제의 손자와 선인의 후손 대결 국면이다.

이 대결의 의미는 무엇일까? 송양은 선인의 후손이라고 말함으로써 기존의 가치와 체제의 계승을 강조한 반면, 주몽은 낡은 것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혁명을 선택했다. ‘천제의 손자’란 하늘의 뜻을 받아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처럼 주몽은 구려를 물려받았지만, 낡은 것(노예제 사회정치체제)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나라를 지향했다. 이것이 주몽와 송양 만남 설화의 핵심 종자이며, 주몽의 혁명가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주몽은 태양의 나라를 꿈꿨다. 이는 고구려의 국호에서 잘 드러난다. 구려라는 국호는 ‘신성한 나라’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고’를 붙여 ‘고구려’라고 국호를 정했다. 여기에서 ‘고’란 ‘해(태양)’를 의미하는 고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란 ‘태양처럼 빛나는 신성한 나라’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처럼 주몽은 ‘태양의 나라’를 꿈꿨으며, 그것은 ‘천제의 손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주몽이 꿈꾼 태양의 나라란 제후국(부용국)이 아니라 당당하고 자주적인 천자의 나라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주몽의 이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백 년간의 피어린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동방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대한 천자의 나라를 세웠다.

▲ 고인돌 형태의 장군총의 배총

겨레의 통합을 꿈꾼 주몽

주몽이 꿈꾼 천자의 나라는 구려 5부에 국한된 조그마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겨레의 통합이 실현된 거대한 나라였다. 고구려를 세운 이후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한 그의 첫 사업이 바로 송양의 나라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당시 송양은 비류국이라는 소국의 왕이었다. 비류국은 혼강(비류수) 상류지역을 중심지로 해 동쪽으로 임강 일대까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고구려 5부의 동부와 북부 사이에 돌출하고 있어 5부 사이의 교통과 단합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비류국왕 송양은 주몽의 통합 노력에 힘으로 대항해서는 괴멸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고구려 건국 이듬해(기원전 276년) 6월 고구려에 투항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비류국왕 송양이 고구려에 투항한 이후 주몽은 송양을 다물후(다물국왕)로 봉하고, 그 땅을 다물도로 칭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물’이란 말의 뜻은 ‘옛 땅을 되찾음(고토회복)’이다. 주몽이 비류국을 통합한 후 다물도라고 칭한 까닭은 명백하다. 그것은 강대했던 구려의 옛 땅을 모두 되찾아, 겨레의 통합이 실현된 큰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물론 주몽 당시는 고조선 멸망 이전이기 때문에, 첫 고토회복 대상은 옛날 구려였다가 떨어져 나간 소국들이었다. 하지만 고토회복의 개념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고조선의 모든 옛 땅으로 확장됐다. 그리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은 이후에는 삼국 통일의 대업 실현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주몽의 꿈은 우리겨레가 하나의 나라로 통합된 새로운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꿈은 고구려의 중심적인 국가사상과 정책으로 정립됐고, 고구려의 모든 국왕은 신성한 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을 펼쳤다.

▲ 산성하 고분군

고구려의 소국 통합의 출발

고구려는 초기에 다물 정책에 따라 주변 소국들(옛날 구려에 속해 있다가 독립한 소국들)을 통합하는 사업에 힘을 집중했다. 비류국을 통합한 후 주몽은 기원전 272년(동명왕 6년) 10월에 오이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백두산) 동남에 있는 행인국을 쳐서 통합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또한 기원전 268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북옥저를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고구려가 통합한 북옥저는 함경북도 길주, 명천 이북 해안지방,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의 많은 부분, 러시아 연해주 남부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당시 북옥저는 목단강 중류지방까지도 차지하고 있었으나 고구려가 통합한 것은 북옥저의 남부지역에 그쳤고 북부지역은 부여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인국과 북옥저의 통합과 성읍화는 고구려가 처음부터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했다는 것을 뚜렷이 실증해 주고 있다. 행인국과 북옥저의 통합은 고구려의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강화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선 무산지방을 비롯한 풍부한 철광석 지대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제철 제강업을 발전시켜 군사력을 비상히 강화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됐으며, 연변지역에 산재해 있는 동광들을 장악함으로써 유색 금속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됐다. 또 내륙국가인 고구려에게 항상 부족했던 소금과 해산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함으로써 경제발전과 주민생활 안정에 큰 역할을 했다.

선비국과 양맥국의 복속

기원전 249년(제2대 유류왕 11년) 4월에 고구려는 서북방에 있던 선비국의 나라를 계략을 써 항복시켜 속국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는 이 기사가 유리명왕 11년(기원전 9년)에 있었던 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선비국 통합작전의 책임자인 부분노는 주몽과 함께 고구려 건국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선비국 통합은 유리왕 때가 아니라 유류왕 11년 때의 일로 봐야 맞다. 당시 정세를 고려할 때 이 선비국은 요녕성 철령, 개원 동쪽 시하, 청하 상류 일대와 산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험한 지세를 믿고 고구려에 적대적 입장을 취하면서 자주 침입해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고구려의 명장 부분노는 선비족이 용맹하기는 하나 지략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략을 썼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고구려는 약한 나라라고 선전해 경각성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왕은 선비국 수도 부근에 가서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유인해 성을 비우고 나오게 하고, 선비족 군대가 성을 비운 사이 부분노는 날랜 군사를 이끌고 성을 점령해 선비국 군대가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수도성을 빼앗긴 선비군대는 진퇴양난에 빠져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고구려는 선비국의 항복을 받아들어 후국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227년(여를왕 10년) 8월에 오이 마리가 거느린 2만명의 고구려 군은 서쪽에 있은 양맥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양맥국은 대량수(태자하) 중류지방에 있는 맥족의 나라였다. 당시 부여도 예, 예맥으로 불리기도 했고, 고구려도 맥, 예맥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양맥국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고구려와 같은 갈래 주민들이었다. 고구려가 겨레와 강토를 하나로 통일할 것을 자기의 기본정책으로 삼고 추진해 나가는 데서 양맥국의 지배층은 잘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군대를 보내 멸하고 속령화했다.

개마국과 구다국의 통합, 성읍화, 후국화

기원전 215년(대주류왕 9년) 10월에 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개마국을 징벌해 왕을 죽이고 그 땅을 고구려의 성읍(군현)으로 만들었다. 개마국은 오늘날 개마고원에 자리 잡고 있었던 소국인데, 왕이 직접 나가 징벌한 까닭은 이 나라가 고구려에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해 12월 개마국의 이웃에 있던 구다국의 왕은 자기도 개마국왕의 신세가 될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 고구려가 구다국에 대해서는 성읍화했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봐 구다국왕을 죽이지 않고 후왕으로 임명하고 그 나라를 후국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건국 후 수십년 사이에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국, 선비국, 양맥국 등 주변 소국의 통합에 성공하고 큰 나라로 성장했다. 이것은 주몽을 비롯한 당시 건국세력들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봉건제도에 기초한 새로운 나라 건설을 지향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려의 옛 땅을 다시 찾아 같은 겨레를 통합해 큰 나라로 발전하려는 강한 열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지향 아래서 국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세워 나갔으며, 왕권과 봉건적 통치 질서를 강화하고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건국후 50여년 동안 고구려의 무력은 2만명으로 늘어났으며 고구려 군대는 잘 무장되고 훈련된 정예 무력으로 성장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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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양 2018-03-14 15:26:48

    선인의 후예가 낡은 체제와 사고이고
    천자의 손자가 그 틀을 깬다고 적은것이 이해가 안되네요.

    고대부터 하늘을 숭배하는것이 다반사인데

    천손이라는고 이야기하는것이 더 낡고 정당성을 부여 받을려고하게 보이고
    선인의 후예가 현세적이고 전통을 지킬려고 저는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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