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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와 자주적 민족애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14)
  •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2.2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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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앞에서 봉건적 민족 개념을 극복하는 부르주아 민족 개념을 말했습니다. 이제 그 부르주아 민족 개념의 한계도 아울러 말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세계화의 시대입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발전하는 시대이죠. 이런 시대에서 민족 개념에 집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 아닐까요?

답 :

1) 부르주아 민족 개념의 한계

앞에서 봉건적 민족 개념은 민족의 규모, 양에서 이미 최대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부르주아 민족 개념은 봉건 민족 개념을 질적으로 발전시켰지요. 부르주아 민족 개념은 민족 내부의 다양한 차별을 철폐했어요. 이제 민족(nation)은 국민(nation)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민족 개념도 한계를 지닙니다. 남녀 차별, 지역 차별 등 차별의 철폐가 불완전했어요. 특히 자본가와 노동자, 소유자 계급과 일하는 계급, 지배층과 민중의 차별은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부르주아 단계에서 민족은 위선의 언어였습니다. 소유자 계급은 우리가 모두 한 민족이라고 말하지만 억압과 착취에 신음하는 민중은 그 말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부르주아 민족 개념의 한계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처음엔 타 민족의 제국주의적 억압에 대항하여 출현했습니다. 방어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방어적 민족주의는 쉽게 침략적 민족주의로 전환했어요.

방어적 민족주의와 침략적 민족주의, 양자는 동전의 이면입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신성동맹에 대항한 애국적 공화주의는 나폴레옹 시대 침략적 민족주의로 전환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가혹한 전쟁 배상 정책 때문에 등장한 독일의 민족주의는 히틀러의 등장 이후 곧 유럽을 침략하는 이데올로기로 전환했지요. 이런 가운데 파시즘도 출현했습니다. 파시즘은 자주 민족 내부의 착취를 감추기 위해 외부에 적대감을 전가했습니다.

2) 자유주의와 폭력

이런 한계 앞에서 부르주아적 민족 개념조차도 버려야 할 때가 왔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대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제 모든 사회적 관계는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합의(계약)론입니다. 여기에 굳이 민족 개념이 낄 자리는 없다는 거죠.

또 다른 주장은 세계화라는 현실입니다. 세계화를 통해 상호 이익이 되는 국제관계가 출현하고 심지어 민족국가를 넘어서 도시와 도시, 지역과 지역이 서로 연결되는 지구화 시대에 도달했다는 거죠.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우선 계약국가론부터 보죠. 자유주의자는 흔히 평등한 개인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계약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계약될 수 없는 것도 있으며, 계약 자체도 취약하죠. 계약의 기초는 욕망인데, 욕망은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으면 조금 전에 합의한 계약도 위반하고 맙니다. 이런 계약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주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을 보면 자유주의의 한계가 단번에 드러납니다. 미국은 자유로운 계약의 나라입니다. 미국에서 자주 총격사건이 나는 것은 미국 사회의 근본에 폭력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자주 일어나는 총격 사건은 이 감추어진 폭력이 가끔씩 휘장을 걷고 속살을 언뜻 내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합의만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때 자주 폭력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합의론과 계약론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정의는 항상 합의를 기초로 하니,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합의는 그 한계상 합의를 넘어선 원리를 요구합니다. 만일 폭력이 아니어야 한다면 민족애와 같은 심리적 토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자유로운 합의가 오히려 민족애를 요청한다고 주장합니다. 헤겔은 계약과 민족애 두 가지를 국가의 두 기둥으로 보았죠.

3) 기만적인 세계화

더구나 세계화는 기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관계는 호혜적 평등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제국주의적 지배관계였다는 거죠. 과거 제국주의가 자본의 직접투자(식민지 공장 건설)였다면 이번에는 금융자본의 간접투자(증권, 채권, 부동산 투자)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체제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전개된 세계화를 통해 세계는 호혜평등으로 발전하기보다는 극심한 불평등으로 양극화되었습니다. 한 나라 내부에서만 양극화된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양극화되었죠. 상대적으로 본다면 날이 갈수록 서구는 부를 쌓고, 나머지 세계는 가난해졌습니다.

지역의 통합을 이루려는 야심으로부터 출발한 유럽 체제조차도 독, 불과 같은 중심국가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과 같은 주변국가로 양극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를 탈출하려는 시도가 일찍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최근 세계화가 위기에 빠지면서 다시 노골적인 민족이기주의가 등장했어요. 미국 트럼프가 미국 제일주의를 주장하니, 일본에서도 일본 제일주의 정당이 출현합니다.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럽을 탈출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민족 단위가 현재까지 인류가 도달한 기본 단위라는 것을 재인식하게 해 줍니다. 여전히 세계는 민족을 중심으로 움직여 나갑니다. 그러면서도 생산력이 세계화되는 추세에 따라 국제 교역은 앞으로도 후퇴하지 않고 더욱 발전하겠죠. 그러니 국제간 평등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게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 지난 9일 강원 평창올림픽플라자에서 열린 평창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이 공동입장하고 있는 모습.[사진 ; 뉴시스]

4) 민족애의 발전

이런 시점에서 민족 개념을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애란 모두가 한 배에서 나온 동포라는 데서 나오는 일체감입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같은 지역에 살면서 생겨난 향토애가 중첩되었습니다. 이를 흔히 조국애라고 말하죠. ‘조(祖)’는 조상을 의미하고, ‘국(國)’은 여기서 법적 국가가 아니라 나라 곧 향토(land)를 의미합니다.

부르주아 민족 개념은 이런 조국애를 경제적, 정치적 이익 개념으로 더럽혔습니다. 그 결과 부르주아 민족 개념의 한계가 등장했죠. 부르주아는 민족을 경제적, 정치적 이익에 종속시키려 합니다. 이런 경제적, 정치적 이익은 결국 부르주아의 이익이었지요. 부르주아의 이익을 곧 민족의 이익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부르주아는 혈연관계와 향토에서 생겨나는 민족적 일체감을 이렇게 자기 이익에 종속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적인 이익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조국애로서 민족 개념은 정치경제적 이익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물질적인 조국애, 정신적인 조국애를 상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이런 정신적 조국애를 자주적 민족애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5) 자주적 민족애

여기서 자주성이란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자주성은 욕망을 충족하는 쾌락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행위하는 데서 즐거움을 가지는 존재입니다. 이런 자주적 존재의 최고 형태가 사랑입니다. 민족 성원이 상호관계 속에서 자주적으로 관계할 때 그것을 자주적 민족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주성이 상호관계의 기초가 될 때 혈연적 관계와 향토애에 기초한 자연적 민족도 부르주아적인 오염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족애로 발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점은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도 출발점은 종을 재생산하는 단위였습니다. 그러나 공동생활을 통해 가족애가 발생하게 되죠. 이런 가족애조차 봉건 사회나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물질적 이익 개념에 오염되었어요. 그 때문에 가족 내부에 억압과 차별, 가족 사이의 배타성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족도 점차 새로운 가족으로 발전합니다. 순수한 가족, 정신적 가족이 출현하죠. 가족애는 전적으로 자주적 사랑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가족애가 자주적 가족애로 발전한다면 민족애도 이제 이런 자주적 민족애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경제적 이익에 기초한 민족애가 이렇게 자주적 민족애로 발전하면 자연적으로 부르주아 민족애의 문제도 극복되지 않을까요? 이제 내부적으로도 차별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주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개인의 자유와 민족애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국제적으로도 자주적인 관계가 형성될 겁니다. 서로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제국주의적으로 지배하는 관계가 호혜평등의 국제관계를 이룰 겁니다. 이런 호혜평등의 관계를 국제주의라 한다면 자주적 민족은 국제주의적 민족입니다.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는 서로 합일해야 합니다.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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