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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를 아시나요?[박경순의 고구려사] (2) 고구려 건국연대 조작은 고대판 식민지 근대화론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8.02.13 14:36
  • 댓글 3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와 연표에 의하면 고주몽이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37년(갑신년)이다. 우리 역사학계 역시 고구려 건국 기원전 37년 설을 아무런 의심 없이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구려의 건국 연대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이래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도마 위에 올랐다.〈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에서도 기원전 37년 건국설과 모순되는 기술들이 다수 발견된다.

〈삼국사기〉권 22 고구려 본기 끝에 실린 사론에는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어 있었다”라고 기술돼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진(秦)나라 때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뜻이 된다.〈당회요〉권 95 고구려조에는 〈고구려비기〉를 인용하면서 고구려가 “천년에 미치지 못한다”고 기술돼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보장왕 27년(668년) 2월조에 쓰여 있는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년이 된다”는 기록보다도 훨씬 더 이른 시기로 잡은 것이다. 〈후한서〉고구려 전에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켰을 때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현도에 속하게 했다”고 쓰여 있다. 이것은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켰던 기원전 108년 당시 이미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과 같이 〈사기〉나 〈한서〉를 비롯한 중국 측 자료들이 갖고 있는 자체 모순을 파고들고,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나라 역사 편찬자들의 사대주의적 입장에 대해 잘 알고 비판적 관점과 안목으로 사료들을 재검토 해보면 고구려 건국 연대가 왜곡됐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 환룡호(고구려의 고력 묘지군이 매몰되어 있는 인공호수)

고구려 건국 기원전 37년설은 의도적 역사왜곡의 산물

진나라 때(기원전 221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고구려를 왜 기원전 37년에 세워졌다고 했을까? 후기신라의 역사편찬을 맡은 관리가 신라를 내세우기 위해 고구려 역사 첫머리를 깎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 왜곡 시도는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권 6 문무왕 10년(670년) 7월조에는 고구려왕의 서자 안승을 책봉하면서 공의 태조 증모왕(주몽왕)이 나라를 세운지 “장차 800년이 가까워 온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벌써 중국의〈후한서〉나 〈삼국지〉를 참고하면서 고구려 건국이 한 무제의 고조선 침략 이후라는 관점에서 써놓은 것으로, 이때부터 벌써 고구려 건국 연대를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때에는 감히 기원전 37년설(고구려 존속기간 705년설)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 후 7세기 말에 와서는 고구려 건국 연대를 근 100년 더 끌어내렸다. 후기 신라의 역사편찬자들은 신라정통설을 조작하기 위해 신라의 개국연대를 끌어 올려 기원전 57년으로 만드는 동시에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그보다 더 늦은 것으로 조작해 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기원전 37년설은 고착되지 못하고 있었다. 기원전 37년설로 고착된 것은 고주몽이 나라를 세운 연대의 간지가 갑신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고구려의 역사가 의도적으로 왜곡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고구려의 역사에 ‘구려’의 역사를 합쳐 계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구려의 역사에서 재탄생한 국가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를 구려의 개국 시점부터 계산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부당하다. 구려의 개국 시점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기원전 3세기가 아니라, 그보다 1000년 정도 앞선 기원전 14~15세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려의 개국 시점부터 계산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삼국사기〉보장왕 27년 2월 기사에는 “고씨가 한 나라때부터 나라를 세운지 900년이 된다”고 말함으로서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부터 계산한 것이라는 점이 명백히 나온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광개토왕릉비에 의해 의도적으로 깎아내려졌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져 있다.

고구려 건국 연대 조작의 결정적 증거

광개토태왕릉비 1면 제4행에는 “세자 유류왕에게 유언으로 지시해 도리로써 잘 다스리도록 했다. 대주류왕은 나라의 기초를 이어받았고, 17세손인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게 됐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광개토왕이 고구려 왕실의 17세손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에 있는 고구려 왕 계보를 세대수로 계산해 보면 광개토태왕은 12세손으로 돼 있다. 양자 사이에는 5세대가 차이가 난다. 이 차이에 대해 구구한 변명들이 난무하나, 둘 중 하나는 틀렸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틀렸을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대의 기록, 직접 당사자들의 기록이 정확하고 진실에 더욱 가깝다. 특히 왕의 계보문제야말로 당사자들의 기록을 더욱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두 자료사이에 차이가 나는 점은 당대의 직접적인 기록이 정확하다고 보고 여기에 맞춰 풀어나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광개토왕은 추모왕(고주몽)의 17세손이 맞으며, 〈삼국사기〉고구려 왕 세대 서술은 잘못돼 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5세대의 왕 계보를 빼버린 것이다.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사이의 불일치는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작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작은 후기 신라 역사편찬자들에 의해 일찍이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부터 시작됐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쓸 당시 〈구삼국사〉를 참고 했을 것이며, 여기에서부터 이러한 조작된 사실이 기술돼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역사를 올바로 세우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당시만 하더라도 고구려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서술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작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로서 부끄럽게도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기존 역사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앞뒤와 아퀴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순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기사의 모순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유리명왕 33년(14년) 조에는 무휼(후의 대무신왕)을 태자로 삼으면서 군사와 국가에 관한 일을 위임했다고 밝혀져 있다. 대무신왕(무휼)의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인데, 기원전 17년에 사망했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무휼이 태자로 될 때 나이는 적어도 31살 이상이 돼야 맞다. 그런데 대무신왕(무휼) 즉위년조에서는 그가 태자로 될 때 나이가 11살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을 보면 11살 때 태자가 된 대주류왕과 31살 때 태자가 된 대무신왕이 서로 다른 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두 왕을 한명의 왕으로 만들어 놓고 두 왕 때 일어났던 일들을 짜깁기 해놓았다. 그래서 이처럼 뒤죽박죽 모순된 기사들이 나오게 되었다.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에 관한 사실이다. 대무신왕 15년(32년) 11월 조에는 갈사왕의 손녀(대무신왕의 차비)가 낳은 왕자 호동의 활약상이 기록돼 있다. 일반적으로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아이가 다자라 청년으로 되려면 3세대이니까 최소 60년이상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10년전인 대무신왕 5년(22년) 4월조에 부여 금와왕의 막내아들이 갈사국들 세웠다는 기사가 적혀 있으니, 10년만에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아이가 다 자라 20세의 청년을 되었다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갈사왕이 왕이 되기 수십년 전에 그의 손녀가 있었고, 그 손녀가 대무신왕의 차비가 돼 호동을 낳았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지만, 당시 고구려 부여 관계를 보면 별로 타당성이 없다.

이처럼 〈삼국사기〉초기 기록에서는 5세대 왕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 고구려 본기의 앞부분의 몇 명의 왕을 빼버리고 그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 중 빼놓을 수 없었던 몇몇 사건과 사실들을 유리명왕기 대무신왕기 등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초기 5세대 왕들이 고의적으로 누락됐다.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누락된 5세대 왕들을 국내외 여러 사료들을 통해 밝혀냈다. 이렇게 밝혀낸 5세대 왕들을 차례로 넣어보면, 추모왕 – 유류왕 – 여를왕 – 대주류왕 – 애루왕 – 중해왕 - 유리명왕으로 된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은 어디까지나 왕위 상속이 부자계승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어떤 왕조이든지, 왕위계승이 부자로만 이어지지 않고 형제계승으로 이루어진 사례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5세대 5명의 왕들 외에 또 다른 왕들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누락된 왕 대수는 최소 5세대 5명으로부터 5세대 7~8명에 많으면 10명에 이를 수 있다.

▲ 오녀산성 성벽

고구려 건국 연대는 기원전 277년

그렇다면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언제일까?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밝혀낼 수 있는 잣대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삼국사기〉권 22 고구려 본기 끝에 실린 사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어 있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기원전 221년) 고구려가 이미 존재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꽤 큰 나라로 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주몽의 출생, 즉위, 사망 연대의 간지(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한 것)를 중요한 잣대로 삼아야 한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조작한 후기 신라 역사편찬자들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러한 간지만은 고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추모왕의 출생, 즉위, 사망연대의 간지는 어떤 역사책이나 다 동일하게 계해년, 갑신년, 임인년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221년보다 앞선 어떤 갑신년에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을 것이며, 그 대상으로 기원전 277년과 기원전 337년을 후보로 올려놓을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337년을 건국기년으로 잡으면, 매 세대당 재위기간이 너무 길어 비합리적이며, 기원전 277년을 건국기년으로 잡으면 매세대당 재위기간이 51.6년으로 유리왕부터 동천왕까지 5세대 왕의 매세대당 재위기간 53.4년보다 짧아 합리적이다. 따라서 기원전 334년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에 건국됐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는 〈고구려 비기〉를 인용해 고구려가 “천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 〈당회요〉권95 고구려조의 기록에 비추어 봐도 적절하다. 이처럼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에 건국되었다.

고구려 건국 연대의 역사적 중요성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37년이 아니라, 그보다 240년 빠른 기원전 277년이다. 기원전 37년 건국과 기원전 277년 건국은 24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적 차이에 내재돼 있는 중대한 역사적 의미의 차이를 밝혀내야 한다. 그것은 한사군 설치 이전이냐, 이후이냐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우리역사학계에서는 한사군 설치이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됐으며, 여기에는 한사군 설치로 인한 정치적 문화적 충격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즉 중국의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은 중국 문물의 한반도 유입의 통로역할을 했고, 이러한 문물의 영향으로 한반도 각 지역에서 문명화의 흐름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들이 한반도 고대국가 형성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고대판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러한 역사관의 뿌리는 일제 식민사관에서 시작됐다. 일제는 한사군의 설치는 우리나라 역사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변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277년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고구려의 정치와 문화의 기원을 중국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는 논거가 사라진다. 고구려가 건국될 당시 중국은 전국 칠웅이 다투는 내전의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우리나라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발전 수준 역시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흔히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철기문화의 중국기원설 역시 사실과 다르다. 우리나라 철기문화는 중국과 관계없이 기원전 2000년기 말부터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창조돼 발전해 온 것으로,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면 강철생산단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면 온갖 철제 농기구들이 대량으로 생산됐다. 이처럼 삼국형성의 원동력으로 얘기되고 있는 철기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형성발전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우리겨레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되고 발전된 토착문화이다.

고구려 건국 연대 기원전 277년은 고구려의 정치와 문화의 기원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고구려의 탄생은 그 어떤 중국 문명의 전파와 영향과 관련 없으며, 오로지 우리나라 자체의 역사 발전의 법칙과 경로에 따른 자생적인 것이다. 고구려 시대 더 나가 삼국시대의 정치와 문화의 원형은 토착적인 것이며, 경제와 문화의 원동력 역시 자체의 힘으로 독창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고구려는 구려의 계승국으로 고구려의 모든 것들은 구려 사회 발전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것들이다. 더 나가 구려의 모든 정치 문화제도가 고조선에서 형성된 한반도 고대문명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고 볼 때 고구려의 모든 것 역시 고조선으로부터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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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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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태영 2018-02-19 15:41:27

    문성재가 쓴
    한국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
    꼭 사 보세요.   삭제

    • 신수억 2018-02-19 05:25:30

      고구려 건국일을 김부식의 BC37년이 아닌 BC277으로 바로 잡습니다.
      특히 선비(후에 거란 (요)를 아우르고 말갈 (부여계열)을 아우르니
      조선이 북해(발해)근처에 있었다는 역사서를 기초할 때 우리 민족의 형성은 대륙의 아우르다 여러 부족으로 이합집산 하였다고 이해 합니다.
      결국 중국사가의 이간질로 동이 선비 읍루 숙신 말갈 여진 등등으로 명칭만 제멋다로 표기하였다.   삭제

      • 나태영 2018-02-18 16:28:29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입니다.
        비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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