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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를 물리친 평양 투쟁사대주의와 패배주의 역사관 청산을 위하여 두 번째 글
  •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집행위원장
  • 승인 2017.12.0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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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고등학교 교과서였을까? 《제너럴셔먼호》 이름을 들은 기억이 나고, 다음은 평양에서였다. 대동강 변에 《프에블로》호 옆에 《셔먼》호 투쟁 승리기념비가 있었는데, 미국 정찰함 《프에블로》호를 쳐다보느라 《셔먼》호 사건을 해설하는 강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국 배가 불에 탔다고? 사고가 있었나? 평양 민중들이 물리쳤다는 말은 아무래도 과장인 듯...’ 이게 솔직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이 사건이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설마 이 사건을 시작으로 신미양요에서까지 미국을 물리쳤다고? 그런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우리는 왜 알지 못했을까!

▲《셔먼》호 격침 지도

《제너럴셔먼》호의 만행

1850년대부터 산업자본주의에 접어들은 미국은 중국 동북부에 식민지 침탈을 위한 전진기지로 조선 침략의 길을 열려고 했다. 남북전쟁에서 악명을 떨친 《셔먼》호를 보내면 조선이 굴복하리라고 여긴 것 같다. 무장한 함선이 들이닥치면 황인종들이 놀래서 굴복하리라고 믿었을까? 아니면 큰 함선의 외양과 신기한 서양 물건에 혹해 조선 특산물을 싸들고 오리라고 여겼을까? 이처럼 무장한 상선으로 위장한 《셔먼》호는 조선을 침탈하려는 미국의 첫 포석이었다.

미군 장교 프레스톤의 개인무역선으로 등록한 뒤 1866년 6월 천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군함인 《셔먼》호를 상선으로 위장, 영국 목사 토마스까지 채용한 뒤 7월7일 대동강 앞바다에 나타났다. 정체불명의 이양선이 나타나자, 조선은 관리를 보내 ‘국적과 대동강에 들어온 목적을 밝히라’고 하였다. 《셔먼》호 선장 프레스톤은 자기들은 특정 국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서양 사람들로 평양으로 가려한다고 했다. 불법 입국자들이 허락을 구할 생각은 않고, ‘평양 산천은 어떤가? 당신네 나라 보물이 어디에 많은가’라고 거드름을 피웠다. 또 “우리나라 사람 7명이 왜 당신네 나라에서 죽었는가!”고 프랑스인처럼 굴면서, 총을 내보이며 위협하였다.

그들은 대동강을 올라가며 온갖 협박과 대포사격 등 군사행동, 약탈, 납치 살상을 감행한다.

“종이, 쌀, 금, 인삼, 털가죽 같은 조선 특산물을 서양 옷감, 유리그릇과 바꾸자! 거부하면 수도까지 가서라도 장사를 한 다음에야 돌아가겠다.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 평양으로 갈 것이다” 12일 평안감사 박규수가 중군 이현익 등을 보내 담판을 시도하지만 “교역 후 돌아가겠다. 부식이 떨어졌으니 내놓으라”며 생떼를 썼다. 중앙의 승인을 받은 후 주겠다고 달랬으나 이마저 거절하며 “평안감사를 만나야겠다. 군함 8척이 조만간 서울 근처에 올 텐데, 중국도 제압할 수 있으니, 조선 같은 작은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라고 행패를 부렸다. 15일은 보트로 만경대에 상륙, 만경대에까지 올라 지형을 정찰하다가 중군 일행의 저지를 받고 쫓겨났다. 18일, 한사정(쑥섬과 양각도 사이)앞에서 불법적 수심 측량을 막으려던 중군을 납치하고 수행원들을 죽이는 만행을 벌렸다. 다음날인 19일 중군 이현익을 돌려받기 위하여 회담이 열렸지만 자신들을 평양성에 들여보내 준 이후에나 석방하겠다며, 대동강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쌀 천석과 많은 양의 금, 은, 인삼 등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회담 직후부터 총칼로 위협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회담 직후 평양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인 사격, 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20일에는 《셔먼》호를 양각도 서쪽 여울목에 정박시키고 어선들을 납치,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평안 감영은 ‘양식을 약탈하고 총질을 마구 하니 7명이 피살되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들의 만행은 점점 극렬해졌지만, 조선 관리들은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달래기에만 급급했다. 낡은 무기로 어찌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다.

▲평양 대동강변에 세워져 있는 ‘미제침략선 《셔먼》호 격침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열렬한 애국지사이신 김응우 선생을 비롯한 평양시민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던 미제침략선 《셔먼》호를 천팔백육십육년 구월 이일 대동강 한사정여울목에서 격침하였다. - 천구백팔십육년 구월 이일”

분노한 평양 민중들의 손으로 《셔먼》호 격퇴

이러던 차에 19일 아침부터 평양 민중들이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앞을 다투어 전력 분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정황을 평안감사 박규수는 의정부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이때 성안의 백성들이 강변에 모여들어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라>고 높은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사리를 명백히 하겠다고 대답하자.... 백성들이 돌멩이들을 마구 던졌으며..... 적들은 도망쳐서 자기들의 배가 있는 데로 돌아갔고, 양각도 아래까지 물러가 정박하였습니다.》

평양 민중들의 기세에 놀라 프레스톤 일당이 갈팡대는 사이, 퇴역군인 박춘권은 단신으로 《셔먼》호에 올라가 억류되어있던 중군을 구출했다. 이때부터 평안감사 박규수도 민중들의 기세에 힘을 얻어 공격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안감영의 중세기적인 무기로 근대적인 군함을 소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민중들은 《셔먼》호 격멸을 위한 창발적인 전법을 제기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대동강에 불배를 이용하여 《셔먼》호를 태워버리는 화공전술이었다. 22일 프레스톤 일당은 불배들의 공격을 받게 되자, 《셔먼》호 주위에 쇠 그물을 씌워 불이 선체에 닿지 못하게 한 다음 점차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썰물 상태라 《셔먼》호는 여울에 걸려 움직일 수 없어, 이틀 후에나 빠져나와 좀 더 뒤로 후퇴한다. 확신을 얻은 평양 민중들은 결사대를 조직하고 《셔먼》호가 다시 여울목에 걸린 기회를 이용, 24일 대대적인 화공전을 펼쳤다. 배들을 총동원하여 연결하고 나무를 싣고 유황을 뿌린 다음, 불을 붙여 상류로부터 띄워 보냈다. 동시에 온 성의 민중들과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힘을 다하여 공격하였다. 배에 불이 옮겨 붙자 토마스와 중국인 조능봉이 뱃머리에서 생포되어 모래사장으로 끌려나왔다. 그들에게 희생된 유가족 등 성난 군중에 의해 뭇매를 맞고 칼에 난자당하는 등 처참하게 죽었다. 불길에 휩싸인 《셔먼》호는 창고에 적재되어 있던 화약이 폭발함으로써 대동강에 수장되고 말았다. ‘토마스와 조능봉 이외 13명은 총에 맞아 죽고, 4명은 불에 타죽으며, 1명은 이틀 전 교전 때 총에 맞아 죽었다, 모두 20명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소나무 황성환 저)

정부가 속수무책일 때 분연히 나선 평양 민중들의 투쟁에 대하여 평안감사 박규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성 안팎 군대와 백성들이 한결 같이 격분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명령이 없이도 모이고 북이 울리지 않아도 다투어 전진하며 탄환과 화살을 마구 쏘아 그 기세가 서로 어울려 죽음을 돌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기어코 침략자를 쳐 없애고 말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곧 성의 방어를 맡고, 끝내 불배를 떠내려 보내는 전술로 씨도 남지 않게 몽땅 격멸해 버리었다, 이것은 모두다 이들 군대와 백성들이 용감성을 발휘하고 정의에 불탄데서 나온 것이며 처음부터 나의(박규수) 지휘와 절제가 정확했기 때문은 아니다.》(《환재집》)

미국의 첫 침략을 물리친 《셔먼》호 투쟁의 역사적 의미

평양 민중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적 무기로 무장하지도 않았고 훈련된 군인도 아니었지만, 외세의 횡포를 응징하겠다는 결심과 대동강의 특성을 잘 아는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슬기로운 전술 덕택이다. 승리를 해놓고 보니 그런 전술이야 너무 쉬운 듯 보이지만, 사실 그 큰 외양선과 근대식 무기에 짓눌리지 않고 외세의 침략에 분노하고 떨쳐나선 평양 민중들의 서슬 퍼런 결심이 없었으면 조선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셔먼》호 투쟁은 조선 민중들에게 침략자와는 끝가지 싸워야 한다는 결심과 자신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힘입어 위정척사론자를 비롯한 양반들도 조정에 국방대책을 강화하라는 상소를 연이어 제출하였으며 조정도 대책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대원군은 해안 방비와 감시를 강화하기 위한 《령》을 공포하는 것과 함께 각지의 성곽과 보루를 보수 정비하고 무기를 제조하도록 하였으며 군사통수체계도 새로 정비하게 된다. 동시에 서양 상품의 밀수행위를 철저히 금지시키고 외세의 길잡이로 적과 내통하는 반역자들을 적발 청산하는 조치도 강화하였다. 포수들을 모아 화포병을 조직하고, 연해지방에 민보, 호병제도를 실시하는 등의 조치들도 이때에 발표된다. 이것은 날로 노골화되어 가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에 일정하게 기여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그해 12월 《와츄세트》호를 보내어 《셔먼》 사건을 진상조사한다며 제멋대로 조선 해안에 들어와 해안선을 측량하고 약탈을 하였다. 《와츄세트》호 일당은 미국에 돌아가 전면적 조선침공을 하자고 주장했고, 미국은 전면전을 벌이기 전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일으키며 탐색전을 벌린다. 그것이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1868년 《셰넌도어》호를 대동강으로 보내 《셔먼》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 사이 충남 행남도로 《차이나》호를 보내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무덤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다. 조선의 실권자 대원군을 굴복시켜 강제적으로 개항을 받아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하고 국제적인 분노만 일으키게 된다. 『독일인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의 조선침략의 일환이었다.

협박과 공포로 조선을 개항시키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은 1871년 신미양요 사건을 일으킨다. 80여문의 각종 포들을 장착한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인을 출동하여 조-미 전면전을 벌린 것이다. 그러나 《셔먼》호 투쟁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조선은 외세의 침입에 대한 준비를 강화한 결과,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조선을 자신들이 어찌해볼 수 있다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신미양요에서 조선의 치열한 투쟁에 대하여 정리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다. 다음번 글에서 미국이 국제적이 분노를 촉발한 파렴치한 범죄행각이었던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신미양요로 넘어가려고 한다.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집행위원장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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