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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노동자의 한이 서린 '아리랑'강제징용 역사기행 참가기(3) 야하타 제철소, 무궁화당과 휴가묘지
  • 이현주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2.0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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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마지막 날 야하타 제철소로 향했다.

▲제철소 앞에서 배동록 선생님을 뵈었다. 한복차림으로 나오신 선생님은 '강제징용 2세'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스스로를 ‘역사의 증언자’라 칭한다고 하셨다.
▲제철소 앞에서 설명을 시작한 배동록 선생님. 선생님은 기무라 선생님 못지않은 고령임에도 엄청난 체력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셨다.

배동록 선생님은 강제징용의 역사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큰 목소리로, 바삐 움직이시는 듯했다. 일본을 찾는 기행 참가자들에게 보여주려고 늘 챙겨 다니시는 짐도 많았다. 가족사진부터 신문기사 스크랩, 어머님의 야하타 제철소 사원증 등 여러 가지였다.

야하타 제철소에서 생산한 철은 전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약 6천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이곳에 강제징용되어 일했다고 한다. 배 선생님의 어머니께서는 본인의 사원증을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증거물로 사용될 것이라며....

일본에서는 야하타 제철소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주요시설로 소개하고 있지만, 실상은 침략의 발판이 되는 기지로 사용된 곳이다. 배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힘이 센 사람이었다면 ‘이 제철소를 당장 부숴버리고 싶다’고 소리 높여 말씀하셨다.

바닥을 둘러보니 균일한 모양의 벽돌이 아닌 어딘가 이상한 곳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1901’이라는 숫자를 바닥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1901’이라는 숫자는 바로 야하타 제철소가 세워진 해를 지칭하는 숫자였다. 그만큼 일본 스스로 야하타 제철소 설립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어마어마한 군수물자 생산에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으로부터 노동자를 강제징용했다. 선생님께서는 야하타 제철소가 아시아 침략의 발판이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전후 산업화의 초석 역할을 했다는 점만 부각시키고 있어 억울하다고 강조하셨다.

신칸센의 레일도 이곳 제철소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약 6천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강제노동을 했지만 제철소 어디에도, 강제징용을 설명하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없다며 선생님께서는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조선인들에게 폐철광석을 옮기는 일을 많이 시켰다고 한다. 성인 남성 중에 평균이상의 체격인 필자조차도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겁고 큰 돌덩이를 어떻게 옮겼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상당히 고되고 힘든 중노동이었을 것이다.

▲ 선생님께서 일본인 한분을 반갑게 맞이하며 우리에게 소개해주신다. “이토 간지”라고 성함을 알려주시고는,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사죄하는 뜻으로 1톤짜리 돌을 밀고 끌며 부산에서 광주를 거쳐 판문각까지 종주하셨던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알려주신다. 아침 일찍부터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의 사죄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오셨다고 한다.
▲ 배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는 어르신들. 일본의 사죄에 대해 생각하는 의식 있는 일본인들이 이렇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았다.
▲ 야하타 제철소를 떠나기 전 기행 참가자들과 함께.

다음으로 찾은 곳은 ‘무궁화당’이라는 곳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장소다.

▲ 무궁화당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고 계신 배 선생님.

무궁화당 ‘추도문’

지난날의 전쟁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과 외국인이 일본각지로 강제 연행되어 왔습니다. 여기 지쿠호에는 15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탄광에 끌려와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지쿠호의 발전과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반도가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반세기 이상이 경과되었습니다만, 지금도 지쿠호의 여러 곳에는 많은 유골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유골을 수집하여 납골당에 안치하고 추도하자」는 호소에 공감한 사람들이 정재를 내고 각 자치체의 협력을 얻어서 여기에 추도당을 건립하게 된 것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함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불행한 과오를 두 번 다시 범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담은 이 추도당과 국제교류광장은 일본과 코리아 양 민족은 물론 모든 인류가 항구적인 평화를 희구하는 발신지로서의 의의를 새롭게 하고, 세대를 넘어서 지켜나가려는 약속과 기원입니다.

2000년 12월

제일 지쿠호 코리아 강제연행 희생자 납골식 추도비 건립 실행위원회

두 번이나 강제 연행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배래선 선생님께서 지쿠호의 각 사원들에 방치되어 있던 동포의 유골을 모으기 시작했고, 지쿠호 지역 재일교포와 뜻을 같이하는 많은 일본인들의 힘이 더해져 1996년 ‘지쿠호 코리아 강제연행 희생자 납골당 추도비 건립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무궁화당은 이즈카시의 공식 후원으로 공원묘역 한 곳에 만든 조선인 납골당으로 2000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118기의 유골을 모셔놓았다고 한다.

일본 우익정치인으로 유명한 아소 전 총리 집안이 소유한 지쿠호 탄광에서 혹사 당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선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기행이 계속될수록 어두운 마음이 드리운다. 납골당 내부에 짧게나마 방명록을 기재하고 나왔다.

무궁화당 외부에는 역사회랑이 있다. 간토대지진, 보타야마 사진, 징용선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고 있었다. 1932년 여름, 지쿠호 탄광에서 일어난 쟁의활동에 대한 부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지쿠호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부당한 차별을 견디지 못해 기업측을 상대로 저임금, 장시간노동, 오오나야제도(감시 및 수용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투쟁에 나섰다고 한다. 지쿠호 여러 탄광에서 벌어진 쟁의는 3주일에 걸쳐 계속 되었으며 몇천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하천에 모여서 노숙투쟁을 해가며 싸웠다고 전한다. 엄청난 억압 하에 대단한 결의를 갖고 투쟁한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당시 일본의 진보단체가 조선인 노동자를 지원했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장소는 휴가묘지였다. 휴가묘지는 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묘지인데, 세 종류의 무덤이 있다. 일본인의 묘지, 애완동물(개, 고양이)의 묘지, 그리고 조선인의 묘지다. 세 종류의 묘지가 전혀 다른 모양새다.

▲ 화강암으로 뒤덮은 묘지가 바로 일본인의 묘지다. 한국의 묘와 양식이 달라 이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큰 정성이 들어간 것은 확실하다.
▲ 성인 남성 허벅지 크기만한 돌이 있다. 무엇이 쓰여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이 개와 고양이의 묘지라고 한다.
▲ 이것이 바로 우리 조선인 노동자의 묘지다. 강제징용당한 것도 억울한데 그 흔적이 겨우 이런 작은 폐광석 돌이라니....

배 선생님께서 ‘신세타령가’를 불러 주셨다. 탄광 노동자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노래라고 한다. 배고픔을 하소연하는 모습이 뮤지컬 공연과도 비슷했지만 그 분위기는 슬펐다. 그리고 재일 조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방과후 음악을 가르치는 데미 선생님께서 우리 일행 앞에서 ‘아리랑’을 불러주셨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장소에서 들으니 구슬프기 이를 데 없었다.

3박4일간의 역사기행을 마치며 느낀 소감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는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나, 그 피해로 앞서 저지른 일본의 만행이 상계될 수 없다. 전쟁이란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야만적 행위다. 일본은 과거를 뉘우치고 피해를 입은 나라, 개인 모두에게 사죄해야한다.

역사기행 동안 힘들었다. 젊은 사람이 체력적으로 힘들어 할 일정은 아니었지만, 아프고 슬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힘듦이 있다. 힘들지만 꼭 기억해야 할 역사.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직접 와보고 함께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현주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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