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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선 이기고, 전쟁에서 패배한 고조선[새로쓰는 고조선역사] 고조선-한 전쟁의 교훈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7.12.05 10:02
  • 댓글 3

연나라 진개의 고조선 침공으로 2000리 영토를 빼앗겨, 요양하까지 밀렸다. 진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는 급속히 약화됐고, 고조선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펼쳐 패수(대릉하)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패수를 경계로 삼은 후 약 200여 년 동안 중국(연, 진, 한)과 큰 전쟁은 없었다. 중국 한 무제는 고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고조선–한 전쟁 전야의 정세

한나라는 건국 이후 복잡한 내외정세로 고조선을 침공할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 기원전 180년에 한 문제 때에 이르러 나라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한나라의 신하(장군 진무 등)들은 고조선을 치자고 건의했으나, 한 문제가 반대해서 성사되지 못했고 수십년간 평화적 관계가 유지됐다. 그러다 기원전 128년 서쪽 변방지역의 넓은 땅과 28만여 명의 주민을 거느리고 있던 고조선의 변방 후왕 예군 남려가 만조선을 배반하고 한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한 무제는 쾌재를 부르며 예군 남려가 관할하던 고조선의 변방지역에 창해군을 둔다고 선포했으며(〈한서〉권6 무제기 원삭1년 가을) 여기에 수많은 무력을 파견했다.

고조선 영토에 대한 한나라의 부당한 침공은 고조선 주민들을 격분시켰다. 고조선의 군대와 주민들은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을 반대해 적극적인 투쟁을 펼쳐 심대한 군사적 타격을 가했다. 한나라는 수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내고 창해군 설치에 심각한 난관이 조성됐다. 〈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의 기사들은 기원전 128년 창해군을 설치하기 위해 한나라가 소모한 군사적 손실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결국 한나라는 고조선 군대와 주민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기원전 126년에 창해군 설치 기도를 완전히 포기했다(〈사기〉 권 112 평진후 조보열전).

한 무제의 창해군 설치 책동(기원전 128~126년)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변으로 됐다. 이 사건으로 고조선은 군사력과 투쟁력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한 무제는 고조선 침공야욕을 포기하지 않았고 소규모 침공 전투들을 벌였다.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이 노골화되자, 고조선의 왕실과 지배층들은 고조선의 부수도 왕검성(오늘날 랴오닝성 개주시)에 머물면서 한나라의 침략을 저지하는 방어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고조선–한 전쟁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고조선 침공을 결심하고 전쟁 명분을 찾으려고 섭하를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섭하는 고조선 왕에게 한나라에 투항할 것을 권고했으나, 고조선의 우거왕은 단호히 거절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섭하는 국경선인 패수에 이르자, 갑자기 돌변해 자신을 바래다주던 고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 장새(장성 방어시설)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한 무제는 외교 관례를 무시한 섭하를 처벌하기는커녕 요동군 동부도위로 임명했다. 고조선의 우거왕은 한나라에 이러한 행동에 대한 단호한 보복조치로서 군대를 동원해 불의에 요동군 동부도위를 습격해 살인자 섭하를 처단하고 돌아왔다. 우거왕의 섭하 처단 행동은 고조선이 한나라를 무서워하지 않을 만큼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것, 나라의 자주와 존엄을 수호하는 데서는 추호의 양보를 하지 않았으며, 필요하다면 단호한 군사적 조치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한 무제는 섭하 처단사건을 구실로 기원전 109년 가을 육군과 수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고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한나라의 침략 무력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누선장군 양복의 지휘 하에 있던 수군만 5만명 정도였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봐, 최소 10만명은 넘었다. 수군을 지휘한 누선장군 양복은 기원전 111년 남월 정복 전쟁 수훈자이다. 그는 기원전 109년 가을 수군을 제(오늘날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향해 출발시켰다. 여기에서 수군이 발해를 건너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 수군이 동해(우리 측에서 보면 황해)가 아니라 발해를 건넜다는 것은 도착지가 수도 왕검성(오늘날의 평양)이 아니라 부수도 왕검성(오늘날의 랴오닝성 개주시)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군사기술이나 과학기술 발전을 놓고 볼 때 5만명의 대군이 황해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것은 당시 고조선-한나라의 전투장소가 수도 왕검성(평양)이 아니라, 부수도 왕검성(개주)이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좌장군 순체는 요동(만리장성 동단 끝 안팎)과 연, 대(베이징 부근) 지방의 군대를 긁어모아 패수(대릉하)를 건너 고조선을 공격했다. 한 무제는 여러 해 동안 양복과 순체를 비롯한 장군들이 북쪽의 흉노와 남쪽 남월과의 전쟁에서 많은 전투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에 고조선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 큰 오산이었다. 고조선 군인들과 주민들은 한나라의 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고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한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어전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전쟁은 한해가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고조선-한 전쟁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뉜다. 첫째 단계는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의 수륙병진공격을 좌절시킨 시기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강화교섭 시기이며, 세 번째 단계는 한나라 침략군의 내부 알력과 모순을 이용해 왕검성 포위공격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해 투쟁한 시기이며, 넷째 단계는 왕검성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 결전을 벌인 시기이다.

▲ 고조선-한 전쟁 지도

첫째 단계, 전쟁초기 한 무제는 양복의 수군과 순체의 육군을 보내 수륙병진공격으로 부수도 왕검성을 조기에 장악하려 했다. 이에 맞선 고구려 군은 부수도 왕검성과 국경지대인 패수 계선에 역량을 집중배치해 적 육군의 공격을 좌절시킴으로써 수륙병진기도를 분쇄하려 했다. 초기 전투에서 고조선 군은 양복의 해군 무력을 완전히 격파했으며, 순체의 육군 진출 역시 패수 계선에서 저지함으로써 한나라의 수륙 병진 전략은 파탄 나 버리고 고조선에게 유리한 전황이 만들어졌다. 한 무제는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일선 지휘관을 처형했다.

둘째 단계, 수륙 양군이 모두 패하게 되자 한 무제는 외교적 방법으로 만조선을 굴복시켜 보려고 위산을 사신으로 파견해 강화교섭을 시작했다. 한 무제는 위산을 내세워 군사적 위력을 시위하면서 고조선의 항복을 설교하려 했다. 이에 대해 고조선 측은 태자로 하여금 1만여명의 군대와 많은 무기, 5000필의 말과 군량을 갖고 군사적 위력을 시위하면서 주동적으로 강화교섭에 나갔다. 한나라의 강화교섭 책임자인 위산은 고조선 태자 일행의 군사적 위세에 눌려 무장해제하고 강화회담 장소에 오도록 요구했다. 고조선의 태자 일행은 이러한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화담판을 포기해 버렸다. 이로서 양측의 강화담판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파탄 나 버렸다.

셋째 단계, 한나라는 강화담판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역량을 수습해 공격해 들어왔다. 때마침 겨울철이라 패수가 얼어있어 도하에 성공했다. 패수 도하에 성공한 한나라 군대는 곧바로 열수를 건너 왕검성으로 몰려와 포위했다. 이와 함께 양복의 수군도 왕검성 남쪽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전투과정을 놓고 보면 패수와 왕검성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 군대는 왕검성 포위에는 성공했지만, 수군대장 양복과 육군대장 순체 사이의 갈등과 알력으로 인해 오랫동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전쟁 상황을 알게 된 한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해 누선장군 양복을 체포하고 수군을 육군대장 순체의 지휘아래 재편했다.

넷째 단계, 양복의 군대를 장악한 순체는 침략무력을 총동원해 왕검성을 다급히 포위 공격했다. 하지만 왕검성 방위자들의 완강한 투쟁으로 전쟁은 장기화됐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만조선 상층부 일부에서는 반역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상 노인, 상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협 등이 은밀히 도망해 적진에 투항했다. 투항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완강한 투쟁력은 약화되지 않았고, 왕검성 공략을 둘러싼 적아간의 싸움은 기원전 108년 여름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되자 니계상 참은 자객을 시켜 우거왕을 살해하고 적진으로 도망갔다. 이 때 왕자 장을 비롯한 일부 왕족들과 고위관리들도 투항했다. 국왕이 살해되고 고위관리들이 투항해 방위력이 약화됐지만, 고조선 군민들은 성기 장군을 지휘자로 내세우고 성을 방위하기 위한 항전을 계속했다. 성기 장군을 그대로 두고서는 왕검성을 점령할 수 없다고 타산한 순체는 투항자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내 고조선 군민들을 회유 기만하는 한편,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성기 장군을 살해했다. 성기 장군을 잃은 고조선 군민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통일적인 전투지휘의 부족으로 더 견디지 못하고 성은 함락됐으며, 그로써 만조선 왕조는 붕괴됐다.

고조선-한 전쟁의 결과와 교훈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에서 고조선 군민들은 영웅적인 투쟁력을 과시했으며, 한 무제의 초기 전략전술적 기도를 무력화시켰다. 적장이었던 좌장군 순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고, 누선장군 양복은 신분이 떨어져 서민으로 강등됐다. 위산, 공손수 역시 처형당했다. 즉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 당시 여기에 관계했던 고위관리와 장군들이 모두 처형되거나 서민으로 강등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 무제의 전쟁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부의 변절자 배신자들로 인해 부수도 왕검성과 만조선 왕조가 무너져 표면적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 승리를 통해 거둔 수확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전쟁 결과를 보면 한 무제는 만조선의 서북쪽 일부 지역에 기원전 107년까지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을 설치했을 뿐이고, 만조선의 대부분 지역은 고조선 군민들이 고수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 전 지역과 고구려를 완전 장악 지배하려던 한 무제의 전쟁 목표에 비춰볼 때 매우 초라한 결과에 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한사군 위치도

고조선의 부수도 왕검성과 만왕조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유민들은 고구려 사람들과 연대해서 한나라 침략군이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강하게 투쟁했다. 그 결과 한나라 군대는 압록강 하구 북쪽, 본계 무순계선 동쪽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만조선이 붕괴된 후 한나라 침략군에 점령당하지 않은 만조선 지역에는 황룡국, 안평국, 낙랑군, 예맥소국 등 여러 소국들이 형성됐다. 이들 소국들은 훗날 고구려 영토로 편입됐다.

이처럼 고조선 사람들은 완강한 투쟁력을 과시했지만, 고조선-한 전쟁에서 고조선이 패배하고 만 왕조는 붕괴됐다.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한나라가 너무 강하고 고조선이 약체의 나라라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분명 역사책들, 특히 권위를 자랑하는 사마천의 〈사기〉에 명료하게 나와 있듯이 고조선은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이것은 고조선–한 전쟁을 이끌었던 한나라 측 장수들 대부분이 전쟁패배 책임을 물어 사형되거나 서민으로 강등됐다는 사실이 명확히 증명해준다. 당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군사력은 대등한 상태였고 전투력 역시 고조선이 높았으면 높았지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전쟁에서 패배했는가? 그 원인은 한마디로 고조선 통치집단 내부에서 나타난 변절자들의 투항 때문이다. 이는 한나라 침략군의 우두머리들인 순체 위산 공손수는 사형당했고 양복은 서민으로 강등됐지만, 변절자들인 조선 상 노인, 상 한음, 니계상 참 등은 다 제후 벼슬을 받았던 것으로 명확히 드러난다. 기원전 109~108년 고조선-한 전쟁은 투쟁대열 내에서 통일단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열 안에서 투항분자, 변절자들이 생겨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겼다.

고조선–한 전쟁을 한마디로 총평하면, 고조선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서 패배했고, 한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 목표 달성에서는 실패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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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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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태영 2017-12-10 17:14:01

    사기 조선열전은 고조선이 아니라 위만조선을 다루었습니다.   삭제

    • .밝 누 리. 2017-12-05 15:46:35

      .
      이 글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1. 번 조선은 고조선을 이은 북부여 해모부 단군의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였다는 것입니다.
      2. 사대주의자들이 지나支那의 사서를 그대로 우리 역사로 만든 것에 대한 지적이 없습니다.

      <만.한 전쟁> 한나라가 제 맘대로 만든 소설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우리 역사로 채용한 삼국사기가 소설을 이었고.. 다시 북부여 해모수 단군을 배제한 이 글의 내용이 또 한 번 소설이 되었니다.

      "비단 할아버지에 거적 자손"
      조상의 얼을 바로 이어 받아야 합니다.



      .밝 누 리.   삭제

      • 오종홍 2017-12-05 11:37:54

        위만조선 위치, 왕검성 위치, 한사군위치 특히 낙랑군위치 모두 틀렸어요.
        어디서 보고 저렇게 그린 것인지요?

        식민사관 중독이 이렇게 지독하군요. 저건 조선총독부 가르쳐 준 식민사관입니다. 국내주류식민사학이기도 하구요.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검색해보세요.

        당시 중국1차사료는 모두 지금 하북성 난하하류 갈석산일대로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지요. 사기 조선열전, 한서 지리지,열전 등..

        북한평양일대서 나왔다는 한대 락랑유물 일제조선총독부가 날조한 것으로 이미 판명났구요.

        더 궁금하면 mukto@naver.com 로 연락주세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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