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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다”강제징용 역사기행 참가기(1)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오카마사하루 평화자료관
  • 이현주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1.2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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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노동자겨레하나가 지난 1일부터 3박4일간 일본 규슈로 일제강제징용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일본 규슈지방에는 군함도(하시마섬)을 비롯해 나가사키 원폭자료관과 평화공원,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해가 모셔진 무궁화당과 휴가묘지 등 조선인 강제동원의 기록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배노동자들의 역사, 그 아픔을 배우고 기억하기 위해 역사기행에 참가한 이현주 사무금융노조 서울신용보증재단지부 부지부장이 기행 중 직접 촬영한 사진과 참가기를 보내왔다. 매주 화요일 3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조지 오웰은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라고 했다. 이번 역사기행을 다녀온 소감은 바로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3박4일 일정 동안 과거의 흔적을 현재에 찾아보고 알아내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가이드 선생님(직업이 선생님이고 연세도 많은 어르신이다. 나는 좋은 분들, 배울만한 분들은 꼭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버릇이 있다)들 덕분에 아프고 슬픈 우리 역사의 흔적을 훑어보았다.

▲첫날 뵌 기무라 히데토 선생님. 연세에 비해 너무 아이 같은 모습이었고, 맑고 선한 인상이셨다. 소년 같은 느낌이랄까. 나가사키 출신으로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시다가 퇴임 후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익히셨다고 한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먼저 들렀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기 전과 후의 모습을 상공에서 찍은 사진이 가장 먼저 보인다. 내부는 원형 내리막길을 빙빙 돌아 1945년으로 내려가게 만들어놓았다. 벽에는 평화의 상징인 종이학 수백 마리를 엮어 놓았다.
▲기존에 잘 형성된 도시가 원폭투하 후엔 사막과 같은 모습으로 뒤바뀌게 되었음을 선생님이 손짓으로 알려주신다.

많은 것들이 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인상 깊었던 것이 몇 가지 있다.
원폭투하시 열선, 폭풍, 방사선 피해가 발생한다. 전시관에는 동전들이 원폭투하에 의한 열로 인해 녹아 붙어 마치 엽전을 묶어놓은 것 같이 보이는 쇳덩이가 있다. 벽에 기대놓았던 사다리가 여름철 태닝한 것처럼 벽에 흔적을 남긴 모습도 있었다. 그만큼 열선이 세다는 증거다. 방사선 피해로 일반인에 비해 수십 배 비대해진 비장의 모습도 있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것들이 많이 전시되어 원폭투하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11시2분에 멈춰버린 시계. 원자폭탄 투하시각이 바로 11시2분이다. 시계 옆엔 이런 문구가 있다.

솟아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
이 구름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해주십시오.

자료관은 일본이 입은 피해를 중심으로 전시해놨다.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1944년, 16세 나이에 나가사키 미쯔비시 조선소로 강제동원되었다가 원폭피해를 입은 ‘이강녕’이라는 분에 대해 기무라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다.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였으나, 애석하게도 2006년에 사망하셨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사망자 이름을 검색할 수 있도록 컴퓨터를 준비해 놓았지만, 사전에 준비하지 못하면 자료관 방문시에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히로시마, 나가사키 모두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피폭자보다 조선인 사망자가 현저히 많았던 것은 초기에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피눈물 나는 역사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 기행 참가자들과 함께.

기무라 선생님께서는 “핵무기를 가진 나라의 지도자는 꼭 이 곳을 와 봐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가사키의 참혹한 모습은 ‘플루토늄 원폭의 성능을 확인해보고 싶은’ 장군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한다. 리더의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자료관 외부 아름드리나무 옆에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추모비 앞엔 생수병들이 즐비하다. 피폭시 열선에 의한 피해로 몸이 뜨겁게 달궈지는 느낌 때문에 피폭자 분들이 목 말라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 목마름에 대한 안타까움에 방문객들이 생수병을 놓고 간다고 한다. 예전에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중 화재에 의한 열로 죽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의 나라 땅에 강제로 끌려와 이렇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다니..... 그 슬픔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함께 기행을 떠난 동지들과 묵념의 시간.

추모비의 글

1910(명치43)년 8월22일, 일본 정부는 「일한병합조약」을 공포하여,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둠으로써, 자유와 인권, 귀중한 토지마져 빼앗기여, 생활의 수단을 잃은 많은 조선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일본에로 건너왔다.

그후, 일본에 강제연행으로 끌려와 강제노동을 당한 조선사람은, 1945(소화20)년 8월15일 일본의 패전당시에는, 실로 2,365,263명에 이르렀으며 나가사키현 하에도 약7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내무성 경보국 발표).

그리고 나가사키시 주변에는 약 3만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미쯔비시 계렬의 조선소, 제강소, 전기, 병기공장과 도로, 방공호, 군수공사장 등 토목공사장들에서 강제로동을 당하고 있었다.

1945(소화20)년 8월9일 미군의 원자폭탄투하에 약 2만명의 조선사람들이 피폭하였으며, 그중 약1만여명이 폭사하였다.

우리들 이름없는 일본 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명의 조선사람을 위하여 이 추모비를 건설하였다.

지난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제로 끌고와, 학대혹사하며, 강제로동 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에 맞아 죽게한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철폐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념원하며 마지않는다.

1979년 8월9일
나가사키 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옆엔 평화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과거 무라카미 형무소 지소가 있었던 장소였다. 공원 내에는 원자폭탄 폭심지가 있다. 남성미를 갖춘 동상이 오른손으로는 폭탄이 터진 상공을 가리키고 있고, 수평으로 들고 있는 왼손은 평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소풍 온 학생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평화기념상 옆에는 작가의 글이 있다. 삼십여 척의 강인한 남성이 평화를 상징하려 한다는 것은 모순되게 보였다. 스스로 힘을 갖추고 무장하여 평화를 갖겠다는 것으로 보여 순수하게 평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평화기념상 작가의 말

저 악몽같은 전쟁
소름 끼치는 처절함과 비참함
육친을, 남의 아이를
뒤돌아 보는 것 조차 견디기 힘든 심정
어느 누가 평화를 바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곳에 전세계 평화운동의 선구로서
이 평화기념상이 탄생했다.
신과 같은 성철
그것은 강인한 남성의 건강미
전체길이 삼십이여척
오른손은 원폭을 가리키고 왼손은 평화를
얼굴은 전쟁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여기 인종을 초월한 인간
때로 부처 때로는 신
나가사키가 시작된 이래 최대의 영단과 정열
이제 인류최고의 희망의 상징

1955년 봄날에
기타무라 세이보

다음은 우라카미 성당으로 향했다. 교회, 성당, 절 같은 곳은 신성한 불가침의 영역이어야 마땅하지만, ‘전쟁’이라는 무자비한 절차 속에 종교는 안중에 없었다. 우라카미 성당은 상당한 규모였다. 50톤짜리 종탑마저도 파괴될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다.

▲성당 앞 동상들이 참수당한 것처럼 두상이 사라져 있다.
▲우라카미 성당의 피폭 당시 사진과 현재의 모습.

다음으로 찾은 곳은 미쯔비시 병기 스미요시 터널 공장터였다. 전쟁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던 일본은 공습을 대비해 군수물자 생산처를 분산시키거나 지하로 옮겼다. 스미요시 터널은 어뢰를 생산한 곳이다. 총 6개의 터널이 있는데 1, 2호만 전쟁 당시 가동 중이었고, 3~6호는 터널 공사 중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흔히 오지 않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안내문에는 ‘터널공장 주변 거주자들 대부분이 조선인 노동자였다’는 문장이 있었다.

과학은 전쟁과 함께 발전한다는 말이 있다. 전쟁으로 첨단 기술을 시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수산업이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으로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산업발전의 역군이 된 미쯔비시가 못 마땅하다.

다음으로, 오카마사하루 평화자료관을 향했다. 앞서 돌아본 곳이 원폭으로 입한 일본의 피해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었다면, 오카마사하루 평화자료관은 달랐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에 대해 사죄와 보상이 필요함을 언급한다.

애초 설립부터 현재까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어 통상적인 기념관, 자료관에 비해 외관상 규모는 작다. 그러나 실제 들어가 보면, 겉만 번지르르하고 일본이 입은 피해만을 부분적이고 편향적으로 강조했던 평화자료관, 평화공원과는 달리 가해의 역사를 알리고,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하는 공간이다.

조선인의 원폭 피해부터 일본이 행한 중국, 한국 침략,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하시마섬 등을 두루 보여준다. 일본도 전쟁을 치르면서 핵무기는 아니어도 총, 칼, 대포 등으로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 무수한 인명피해를 가져다줬을 것이다.

▲ 오카마사하루 평화자료관 앞에서.

나는 예민한 피부를 가졌다. 군생활 중 화생방 훈련 한번에도 얼굴 등 피부 여러 곳에 수포가 생겼다. 한번 피부에 탈이 나면 일주일 이상을 고생한다. 그때 확실히 몸소 깨달았다. 살상용 화학탄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원폭피해를 온전히 인정받으려면, 본인들이 입은 피해와 함께 일본이 저지른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만행을 모두 균형감 있게 알려야한다. 그래야 인류 보편적인 이해를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 피해를 줬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인과관계가 맞다.

일본의 원폭 피해는 분명 참혹하다. 원폭 피해만 피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의 목숨과 노동의 가치는 모두 같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우리나라도 반성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사람답게 대우해줘야 함이 마땅하다. 이런 절실함을 깨닫는 기행을 하고 있다.

첫날 나가사키를 안내해주신 기무라 선생님 댁에 극우세력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협박전화를 일삼고, 집 앞에 죽은 쥐를 갖다 놓는다는 사실을 첫날 일정을 거의 마칠 때쯤 들었다. (선생님 본인께서는 전혀 그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고, 역사기행을 주관해주신 분께서 알려주신 사실이다) 입장을 바꿔서 나였다면 과연 선생님처럼 일본의 진실을 알리는 행동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어떻게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을 수 있지?’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이 같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해주셨던 선생님의 밝은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이렇게 일제강제징용 역사기행의 하루가 끝났다.

이현주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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