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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극 소령,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해군통신학교 교장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2)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대한민국 해군 복무기록 병적표에 있는 사진이다. 전술손 유족 제공.

앞서 한국전쟁 전과 후 숙청당한 군인들을 모두 남로당의 세포들이었다며 숙군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소개했다. 이제 이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 군 수뇌부가 저지른 오류의 합리화 시도는 아닌지 숙청당한 군인들의 삶을 마산형무소사건 희생자 해군통신장교 전호극(全浩極, 1913년 추정) 소령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에 대한 판결자료와 복무기록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아니라 딸 전씨가 해군 본부에서 직접 찾은 것임을 밝혀둔다.

출생 성장

전호극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양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문환이고 모친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전호극의 제적등본은 없다.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 전씨는 부친의 출생년도를 1913년이라고 기억했다. 1921년생이었던 작은 아버지 전호철로부터 형이 여덟 살 더 많아 자신을 업어서 키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족보에는 1919년인 기미년에 태어나 1950년 병인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해군 병적표에 태어난 해는 1921년이다.

이후 행적에 대해 딸 전씨가 전해 들은 말과 복무기록에 따르면 1934년 3월 문진소학교 6년을 마치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 4월 동경시립중학교 4년을 졸업, 1943년 4월 통신전문학교 무선과 3년을 졸업했다.

딸 전씨는 어머니로부터 부친이 일본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항일운동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병적표에 따르면, 동경통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 3월21일 동경중앙전신국 외체과에서 근무했으며, 1945년 8월27일 이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해방과 귀국

전호극, 조소순 부부는 일제에서 해방되자 귀국선을 탔다. 철저하게 일본을 미워했던 전호극은 귀국선에서조차 일본의 허락을 맡고 승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승선권을 찢고 거칠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배에서 내릴 때까지 배안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도착한 고향 함경남도 북청은 전호극을 반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북한 정권은 그가 영어책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연행했고 감옥에서 풀려나자 바로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전호극은 먼저 홀로 서울로 내려와 통신회사에 취직했다. 병적표에는 1945년 11월16일 경성중앙통신 무선과에 근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경성중앙전신국에서 무선전보업무를 취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청에 남아있던 아내 조소순은 갓난아기였던 전술손을 업고 1946년 12월경 시동생 전호철과 함께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막상 처자식을 만난 전호극은 기뻐하기는커녕 “왜 자식을 낳았냐”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격동기를 헤치며 살아갈 자식들의 미래를 염려했던 것이겠지만 힘들게 남으로 내려 왔던 아내에게는 상처로 남았다.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은 자식을 남기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해군 입대

전호극은 1946년 2월15일 입대했으며 군번은 80058이었다. 입대 후 3월1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4월 통신분대장, 7월1일 해군사관학교 교관을 겸임했다. 1946년 12월1일 중위, 1947년 5월1일 포항기지에서 대위로 진급한 뒤 1948년 6월1일 포항 대동함기장에서 진해특설기지로 전속되었으며 1948년 8월15일 소령으로 진급하여 시설과에서 근무했다. 좋아하는 운동은 축구였고 취미는 독서였으며, 담배는 피웠으나 술은 마시지 않았다. 언어능력으로 일본어와 영어가 가능했고 만주 목단과 일본 동경에서 살았다고 적혀 있다.

딸 전씨는 부친에 대해 해군사관학교 역사자료실에는 설립 당시 해군통신학교를 만들었던 5명 중 한 명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진해기지 통신분대 단체 사진이다. 앞에서 둘째 줄 왼쪽에서 네 번 째가 전호극 소령이다. 복장으로 보아 교관 장교임을 알 수 있다. 1947년 9월1일 해안경비대의 사병교육대가 승격되어 각 분대는 학교로 승격되었다. 통신분대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촬영 시점은 그 전일 것이다. 딸 전씨 제공
▲사진에 “1946년 7월4일 민병증씨 송별기념”이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뒷줄 네 번째가 당시 소위였던 전호극이다. 민병증은 1945년 8월 21일 손원일, 정긍모, 김영철, 한갑수 등 4인과 함께 ‘해사대’를 결성했다고 한다. 딸 전씨 제공.

가공된 것으로 보이는 조직 <해상의용군>에 동조했다며 숙청되다

1948년 11월 전호극은 소령진급 후 4개월 미처 지나지 않아 병조장 이항표가 주도한 반란단체 <해상의용군>에 동조했다며 연행당했다. 아내 조씨는 달빛이 환하게 비출 때였다고 기억했다. 까만 지프차 두 대가 관사로 들어왔고 차에서 내린 까만 양복의 사나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전 소령은 아무 말 없이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아내가 본 전 소령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전 소령 등은 진해특설기지사령부에 설치된 군법회의에서 1948년 12월 7일 군사재판을 받았다. 피고인들은 진해특설기지 병조장 이항표, 소령 전호극 등 37명이었다. 피고인들을 소속 기지별로 보면 진해기지가 2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부산기지 3명, 군산기지 5명, 목포기지 6명이었다. 계급별로 보면 소령 1명, 대위 4명, 소위 3명, 병조장 8명, 일등병조 6명, 이등병조 3명, 삼등병조 4명, 일등수병 8명으로 전 소령이 이들 중 최고위급 장교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 계급은 일본 해군의 계급 명칭을 그대로 쓴 것이라고 한다. 병조장은 상사, 상등병조는 중사, 일등병조는 하사, 이등병조는 병장, 일등수병은 상병, 이등수병은 병이며 그 밑으로 견습수병이 있었다.)

이들의 받았던 범죄 혐의는 <국방경비법 제21조 위반>이었다. 제21조는 탈옥 등에 대한 규정으로 “심판 전후 또는 판결언도 전후를 불구하고 정당한 허가에 의하여 석방되기 전에 금족을 탈금 또는 감금에서 탈옥하는 여하한 장교든지 군법회의 판결에 의하여 파면 또는 타 형벌에 처함. 장교를 제외한 기타 군법적용자로서 차종 범죄를 범하는 자는 군법회의 판결에 의하여 처벌함."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범죄행위는 1946년 11월부터 1948년 8월 중순까지 해안경비대에서 <해상의용군>이라는 부정단체를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과 <해상의용군>의 조직과 계획을 알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판결자료는 <해상의용군>을 “정당한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반란 조직으로 규정했다. 주동자는 병조장 이항표, 대위 이건, 일등병조 홍문학이었다. 군법회의는 이들이 직접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그리고 나머지 군인들은 반란에 동조했거나 알면서도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저질렀던 반란행위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 주장도 없었고 입증 자료는 더더욱 없었다.

총살형이 선고된 군인은 병조장 이항표 한 사람 뿐이었고 무죄 2명도 있었다. 전호극에게 선고된 형량은 징역 6년이었고, 이후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항표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에 살펴볼 예정이다.

마산형무소사건으로 희생되다

6년 징역형이 확정된 전호극 소령은 강제 예편된 뒤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 재소자가 되었다. 형무소 내에서는 해군에서 숙청당한 장교들 20여 명이 같은 방에 있었다고 한다. 전 소령과 함께 잡혔던 군인들을 포함해 36명의 해군 관련자들이 1950년 7월5일 진해해군헌병대에 의해 끌려 나가 마산 앞 무인도에서 총살당했다. 이들은 모두 마산형무소 <재소자 인명부>에서 명단이 확인된다. 반면, 전 소령의 경우 <재소자 인명부>에서 끌려 나간 날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날 나간 것으로 보기 어렵다.

같은 고급 장교로서 함께 수용되어 있었다는 이상규 소령과 같은 시기에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명적표에 따르면, 이상규 소령은 7월24일 마산육군헌병대에게 끌려 나가 인근 산에서 총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산이 어디였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의문

나는 이번 군법회의 판결자료를 보면서 ‘미리 내려놓은 결론에 끼워넣기 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가 연행된 시점은 재판 시작 직전이거나 이미 시작된 뒤였을 가능성이 있다. 판결결과 중 형무소 수용기간에 포함되는 통산기일이 가장 짧게는 85일, 가장 길게는 128일까지 있었다. 판결언도일이 1948년 12월7일이었으므로 피고인들이 연행당하거나 체포당한 때는 적어도 6개월 전인 1948년 5월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5월은 5.10선거나 2척의 함정 월북사건이 벌어진 때였음에 주목해야 한다. 전호극의 경우 구금일수 산입일이 86일이므로 연행 일을 1948년 9월 중순까지 앞당겨 볼 수 있다. 한편 딸 전씨는 전 소령이 진해관사에서 연행된 때는 1948년 11월경이었다고 한다. 다른 피고에 비해 전 소령만 구금일수 산입일이 적었고 실제 연행되었다고 주장하는 날이 여순사건 이후이다.

다음으로 이 사건의 경우 무죄 판결난 군인조차 석방하지 않고 학살했다는 것이 눈에 띤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전호극 소령 외에도 마산형무소 재소자였던 대위 이항수, 일수 차근주가 1950년 7월 5일 진해해군헌병대에게 끌려 나가 총살당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대위 이항수는 1948년 12월 해군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판결받았으며, 일수 차근주는 같은 날 징역 6개월로 판결 받았다.

이 사건은 법률로부터 인권을 보호받지 못했던 숙청 군인들의 참상과 당시 숙군의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풀려났어도 어차피 국민보도연맹사건 등으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당시 군대 내에서 도대체 어느 정도나 이런 현상이 만연되어 있었는지 철저히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구 선생과의 관계도 해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딸 전씨는 전 소령이 연행된 뒤 김구 선생으로부터 3개월 동안 생활비를 받았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는 전 소령이 김구 선생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끌려간 것이었으며 얼마 뒤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게 된 것으로 보아 군부 내 김구 선생을 지지한 장교들을 제거한 후 암살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순사건과 어떤 관련성이 있었는지도 규명되어야 한다. 군법회의 판결자료에 따르면 이들이 받은 혐의인 <해상의용군>의 활동은 1946년 11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이므로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딸 전씨는 해군박물관 담당자와 전화통화에서 ‘전호극이 통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학생들 몇 명이 여순사건에 가담했고 이 때문에 체포당해 1949년 9월 21일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억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 조씨로부터도 ‘통신학교 학생들 중에 몇 명이 여순사건에 가담했기 때문에 네 아버지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전호극 등 37명에 대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 7일 열렸고 판결심사장관의 조치가 내려진 날은 1949년 5월 5일이었다. 모두 여순사건 이후의 일이었으므로 여순사건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명예회복의 길

딸 전씨는 지금도 아버지가 밉다고 한다. 통신회사 잘 다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걸 공연히 해군에 입대해서 당신의 목숨도 빼앗기고 처와 자식까지 고통스럽게 살게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우리말을 못했던 모친 조씨는 불쑥불쑥 남편이 생각날 때마다 단편적으로나마 딸에게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하지만 딸은 희생자를 미화시키려는 의도라고 생각해 이를 믿지 않았다. 국가가 사람을 죽일 때는 그 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딸은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회한으로 남아있다.

전호극 소령이 남로당에 의해 포섭당한 좌익 군인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해상의용군>이 좌익조직이었다는 증거도 없었고 좌익활동을 한 사실도 확인된 것이 없었다. 1950년 7월과 8월, 생명에 관한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의 보호를 받았어야 할 마산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 학살당했고 이 사실은 지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졌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 조작되거나 유인된 것이었다면, 또는 고문과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것도 바로 잡아야 한다.

*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

신기철 소장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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