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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국의 꿈을 담은 추억의 노래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20) 정난이 : 제7광구 (1980)
▲ 197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영일만 인근에 석유가 매장돼 있다고 발표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최고 에너지원은 화석원료였다. 석탄으로 시작된 화석원료의 사용은 20세기 들어오면서 석유로 대체되었고 석유는 지금까지도 인류 최대의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는 소위 말하는 오일달러라 불리며 석유 판매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최대의 석유 생산량은 자랑하는 중동은 전 세계의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석유의 사용량은 늘어가고 산업생산에서 석유의 의존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각 국가들은 자국의 석유량을 늘리기 위해 자국의 영토와 영해를 개발하거나 타국의 석유 생산 가능지역에 수많은 돈을 퍼부으며 석유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영일만 인근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온 국민은 우리도 이제 산유국이 됐다는 기대감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밀탐사도 하지 않은 채 발표한 해프닝으로 끝난다.

1974년 시작된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세계경제는 유가상승으로 인한 생산비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계속됐고, 서방의 일부 선진국들도 석유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화가 막 시작된 한국의 타격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장기 불황속에서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1975년에는 물가상승률이 24.7%나 상승하였고, 무역수지는 18.9억 달러의 적자를 보게 됐다. 당시 수출 총액이 100억 불도 안 되는 상황에서 18.9억 달러의 적자는 매우 컸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석유대란을 타계하기 위해 1974년 5월, 장기 에너지 종합대책을 수립·발표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1973년부터 경제성장과 수출신장의 한계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돌파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974년에는 국민투자기금을, 1976년에는 한국 수출입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경제적 체질개선과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한민국은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을 펴오다 1978년 제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경제에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정부는 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 가격 인상에 영향을 받아 1979년 3월 9.5%의 국내유가 인상조정을 시발점으로 1981년 11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총 337%의 석유 가격을 인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도매물가는 1980년 38.9%, 1981년 22.5%를 기록하는 큰 폭의 상승률을 나타냈다.

경제성장률은 1979년 6.5%에 그쳤고, 19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1979년 42억 달러, 1980년 53억 2000만 달러나 되었다. 제1차 석유파동 이후 100억 달러를 상회한 외채는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국제수지 적자폭의 증대로 200억 달러를 넘게 되자 외채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위기대응 능력 배양, 해외 자원개발 및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에너지 절약 이라는 큰 틀에서 에너지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된다. 이와 함께 근해의 대륙붕 개발을 끊임없이 시작하게 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들에게 희망의 노래로 불렸던 곡이 정난이의 ‘제7광구’였다.

제7광구는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정한 구역이다. 제주도 남쪽과 일본 규슈 서쪽에 위치한 대륙붕으로 그 면적은 8만㎢에 이른다. 박 전 대통령은 그 해 6월 그곳이 한국령임을 공식 선포했다. 이로 인해 외교 분쟁도 있었다. 일본이 자국 영토와 가까운 곳이라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974년 한국과 일본은 각각 50%의 지분으로 공동 개발키로 합의했다. 이후 양국은 1979년부터 1988년까지 7개 공을 시추했지만 기대한 소득을 얻지 못했다. 또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탐사를 했지만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양국의 노력은 끊어질듯 하면서도 이어졌다. 10년 후인 2001년 공동탐사를 재개해 2004년까지 3~5개의 유망 구조를 확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산유국의 꿈은 잠시 접고 지금은 해외 탐사를 통해 또 다른 산유국의 꿈을 꾸고 있지만 정난이의 제7광구에 나오는 검은 진주에 대한 꿈은 과거가 아닌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꿈을 꾸게 한다.

최현진 담쟁이기자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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