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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희망을 주는 사람 배우 권해효조선학교 돕는 몽당연필 활동을 중심으로
  • 진행 권미강기자 · 정리 이명주 기자
  • 승인 2016.12.13
  • 댓글 1

시인이 시를 통해 말한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며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인 사람. 그래서 ‘사람 속에 들어 있’고 ‘사람에서 시작’되는 희망을 주는 사람.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딱 어울리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즐겁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배우 권해효.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분명 배우인데 학교 앞 마음 착한 문방구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랄까? 악한 기운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그는 데뷔한 지가 꽤 오래된 중견배우다. 그가 맡은 역할은 대부분 착하고 정의로운 배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보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준다. 그래서인지 방송 MC를 보는 그가 한 말은 대부분 신뢰가 간다. 가끔 들리는 내레이션도 그렇다.

하지만 단지 신뢰 가는 외모와 목소리를 가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인 배우로서도 충실했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따뜻한 일들을 실천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배우가 소위 진보적인(?) 행보를 한다는 것은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공인이기 이전에 국민으로서 갖는 자신의 생각조차 마음대로 내보이기 껄끄럽고, 자칫 블랙리스트 예술인으로서 낙인이라도 찍히면 여러 가지 직업적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건 일련의 사례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배우로서도 당당했지만 한 개인으로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할 일과 목소리를 내온 사람이다. 그렇다고 어떤 정치적 목적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이기를 원하는 보편적인 인간애를 지니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단단한 몫을 해내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부조리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 그가 특히 목소리를 높여온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청산되지 못한 역사였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을 1위 시위를 통해 보여줬고 수요집회에도 참석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일어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당시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지 못한 상처에 대해 아파했으며 그 마음을 보여준 곳이 자라나는 미래세대를 위한 조선학교다.

한국사회에 ‘조선학교’를 알리고 일본시민단체와 함께 조선학교가 처한 차별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비영리민간단체인 ‘몽당연필’의 대표를 맡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를 몽당연필 까페에서 만났다.

* ‘몽당연필’ 대표로 열심히 활동하시는데?

- 살면서 직함을 갖은 적 없는데, 90년대 중반 전교조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참여했던 청소년여름방학 캠프가 계기가 된 ‘청소년 희망’이라는 단체가 있는데 거기 이사를 오래 했다. 매년 문화캠프를 하는데 여기서 분리된 중고등학교 청소년들 지원하는 단체, 일종의 문화예술 방과 후 교실이라고 볼 수 있는 청소년예술문화센터가 있는데 거기 이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다. 원래 도종환 선생이 이사장하다가 국회로 간 후 내가 하고 있다. 그리고 몽당연필 대표도 겸한다.

* 조선학교와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 조선학교란 걸 실제 처음 만난 건 2002년이다.

* 어떤 계기가 있었나?

-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 간 여러 민간차원의 교류가 많았는데 남북여성 그리고 통일운동하다 고초를 겪은 남북청년학생 통일대회가 금강산에서 있었다. 거기에 참가했다. 북측에서 500명, 남측에서 450명, 해외 몇 백 명 모였다. 많은 숫자였다. 남측에서도 공연단 꾸리고 북측 공연단도 오고 그래서 합동공연을 했다. 나는 당시 공연단 사회자로 참여하게 됐다.

* 우리나라 분단 때문에 배우나 공인 활동하는 분들 아무리 김대중 정부 때라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2002년이었으니 공동선언 2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우리시대에 통일이 가능할 거라는 희망 같은 게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통일시대 첫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때 남북청년 만남도 있었지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건 재일조선대학생들이었다.

*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

- 막연한 표현이긴 한데 눈빛이 다르다고 할까? 남북 청년들을 보면 느낌이 다소 달랐다. 북이란 사회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북측 대표 청년 대학생 대학원생들은 사상적으로 조직된 그런 사람들이라면, 반대로 남측 청년은 자유롭지만 한편으론 필요이상의 희망을 갖고 있던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일본에서 온 청년들은 특별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헤어지는 날이다. 2박3일 일정 끝나고 헤어질 때 남북 청년들은 딱히 안 울었다. 오히려 “서울에서 보자”, “형님 서울에서 보시자우”이런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순간 통곡하는 사람들이 바로 조선학교 청년들이었다.

쟤네가 왜 저렇게 울지? 그때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는데. 불과 20분 거리 육로를 놔두고 배 타고 돌아서 속초로 들어오는 배 안에서 이메일을 보고 있을 때, “이제부터는 이메일 소통하면 이적단체 통신된다”라고 친구가 말하더라. 그 부조리를 생각했고 일주일 동안 그 우는 모습이 아른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2004년 ‘겨울연가’(주인공인 배용준의 대학 선배로 나왔다)를 하며 일본에서 쇼 비즈니스나 연예 비즈니스 등으로 일본을 갔다가 문득 조선학교 아이들이 생각나서 학교를 방문했다. 그러던 차에 대학시절에 친했던 영화 ‘우리학교’를 만든 김명준 감독에게서 ‘영화 만들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때 영화 ‘우리학교’를 통해 조선학교를 본격적으로 방문하게 됐다.

* 그때 조선학교 학생들의 통곡의 소리가 뭐였을까요?

- 일본사회 안에서 조선인으로 산다는 것, 조선학교 다니는 것은 스스로 마이너리티(소수)가 되기로 선택하는 일이다. 어릴 때 아이들이 조선학교에 입학하는 풍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 다 울면서 싫어한다. 다른 일본학교는 시설도 깨끗하고 돈도 안 내고 다니는데. 조선학교는 버스나 전철 타고 몇 시간을 간다. 엄마 아빠와 헤어져서 7살 나이에 기숙사 들어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조선학교 다니면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일본 안에서 차별 역사를 겪으며 말이다. 일본 사회생활 속에서나 집에 가서 엄마와도 일본말로 대화하는 아이들인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치열하겠나.

이 아이들은 차별의 근거가 분단이라고 믿고 있다. 나라가 일본에서 침략당한 연계선상에서 분단과 전쟁을 겪었으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지킨 동포들의 역사 속에선 통일에 대한 열망이 크다. 전 세계 어느 동포보다 크다.

이런 아이들이 통일에 대해 수없이 듣고 자랐는데. 대학생이 돼 남북 청년들이 모여 통일대회를 한다고 듣고 온 것이다. 이 순간이 그들에겐 얼마나 꿈같았겠나. 사방을 둘러봐도 다 우리말 쓰고 있고. 그런 게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정작 헤어지는 순간 우리는 남이든 북이든 돌아갈 집 있는데. 이 아이들은 다시 일본땅으로 돌아가는 셈이었으니 이런 복잡한 감정 아니었을까. 그 아이들에게 헤어짐이란 건 우리가 갖는 헤어짐과는 결이 달랐다.

* 어린 시절 7,8살 때 학교 들어간 아이들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계속 유지하며 대학까지 갈 수 있는지, 부모에게 반발할 수 있는데 말이다.

▲ 몽당연필 로고

- 그건 ‘케이스’마다 다르긴 하다. 그러나 조선학교 교육 방식 자체가 특별하다. 일본도 한국같이 경쟁교육 시키는 반면, 조선학교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가르친다. 일본 학교도 동아리 활동이 많지만 조선학교는 특히나 동아리 활동이 활발하다.

또 일본사회 안에서 조선학교가 받는 차별이 동포들이 겪는 차별의 역사와 같기에 이러한 차별이 결속을 부른다. 조선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겐 내가 동포사회 중심이라는 의식이 있다. 아시다시피 45년 해방이 됐을 때 일본 땅에 조선인 200만 명 있었다. 당시 한반도에 남북한을 합쳐서 인구가 2500만 안 될 때였다. 이건 공식적으로 일본정부에 의한 수치이고 비공식은 더 많다.

그중 못 돌아오고 일본에 남은 사람이 70만인데 당시 방 한 칸 제대로 없던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게 학교 만든 것이었다. ‘우리 애들 우리말 잊으면 안 돼’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에서 ‘불가촉천민’보다 더 낮은 대우 받았으니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런데도 자녀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것 보고 힘 받아 일하고 그런 동포 사회였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학교는 동포사회의 중심이 됐다. 아이들 역시 ‘우리 엄마 아빠가 여기서 살아내는 힘’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어린아이들에겐 버거운 무게감이기도 하다

* 몽당연필 활동하면서 일본 우리학교에 계속 다녔는데 어떤 활동을 했나?

- 본격적인 건 2011년 지진 뒤부터다. 그전엔 우리학교에 왔다 갔다 하던 음악가, 사진작가, 영화인들이 만든 임의 단체가 있었다. 책 보내기 하는 단체. 아니면 ‘조선학교’ 영화팬 모임 등등. 이 학교 저 학교 응원공연 다니고 그랬다. 음악 하는 사람들과 같이 콘서트를 열기도 하고. 때로 학교가 너무 힘들어지면 지역 학교 동포 모아서 ‘디너쇼’같은 것도 했다. 식사 티켓값 받아서 기금 만들어 보내고 그랬다. 그때는 ‘겨울연가’ 열기가 있어서 힘을 받을 때였다. 그러다 몽당연필이 만들어지고..., 내년 봄이면 만 6년. 세월 빠르다.

* 몽당연필 전엔 개인적으로 많이 도움을 준 건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줬다’가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다. 방문하거나 그런 기회가 있을 때 힘을 보탤 일 있으면 같이 하는 거다. 때로 자비를 털어 음악인 팀 만들고, 비행기비용이나 숙박비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 비용이 꽤 많이 들텐데. 최고 많이 들었던 경우는?

- 조선학교가 있는 학군이 있다. 학군들 중심으로 다니는데 한 번 갈 때 3500~4000 정도 비용이 든다. 작은 규모로 가면 절반 정도일 때도 있고. 지금은 회원들 회비로 충당한다. 필요에 따라 자비로 가는 경우도 있고 관심 있는 조직 단체들이 같이 하기도 한다.

* 그쪽에서 반응은?

- 기본적으로 반가워하고 고마워한다. 맨 첨엔 ‘당신은 어떻게 하다가 여기?’ 이런 분위기지만. 민주정권 10년 동안엔 힘이 있어 조선학교 방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촛불정국이 끝나고 MB 정권에서 한 민간인 사찰이나, 일종 협박이 있기도 했다. 조선학교 방문하는 것에 대해 ‘색’을 씌운다든지 등등.

* 못 간적도 있나?

- 그렇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합쳐서 3번 정도 된다. 민감한 얘기긴 한데. 조선학교란 것은 조총련 산하 교육기관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조선학교 구성 60%는 대한민국 국적자다. 그런 상태는 고려하지 않고. 국가보안법상 회합이라느니 잠입이라느니 고무 찬양 등 갖다 붙일 수 있다.

그런데 남북교류 협력법에 의해 민간차원에서 대북접촉에 대해선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가 된 지 오래다. 16대 국회 때 발의해서 만든 건데 한나라당에서 단서조항으로 넣은 것에 허가제가 아니고 신고제인데도 신고를 거부하거나 신고접수를 거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런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라고 알리면 방법은 두 가지다. 신고접수 뒤 ‘안 된다’라고 통보하거나 접수자체를 거부한다. 접수 신고 안 된 상태로 된 거고, 다녀오면 남북교류협력법 적용해서 과태료 물게 된다. 나는 과태료 내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서 민주노총 등은 벌금을 낸 적도 있다. 한 명 당 200만 원 정도씩? 웃기는 거다. 그래서 이번에 간 지역도 학생수 7명인 후쿠시마 원전피해지역 옆인 이바라기를 방문했는데 학교 안에 못 들어가고 교문 앞에서 애들 손잡고 사진 찍었다. 그 뙤약볕에 학교 놔두고 공원에서 만나기도 했다.

* 학교로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인가?

- 그렇다. 그런 식인 거다. 들어가면 이적단체의 공간에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다.

* 그럴 때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

- 아이들 입장에선 얼마나 참담하겠나. 우리를 적으로 취급하는 대한민국은 뭐고 우리를 찾아온 사람은 뭐지? 하는. 조선학교 졸업하고 한국에 대학 오는 친구들이 많다. 이 아이들은 조선학교 출신이라고 말도 못한다. 재미동포 등은 우리말이 어눌해도 ‘한국말 잘한다!’라고 칭찬한다. 그런데 재일동포가 한국말 어눌하게 하면 ‘쪽빠리’라는 등으로 놀린다. 우리 사회 속에서도 차별이 있다.

* 인터넷 검색해 보니 극우단체 카페 담벼락에 권 배우님 지칭하며 조총련, 빨갱이라고 하던데, 테러나 위협당한 적 있나?

- 그런 적까진 없다. 나는 SNS 안 해서 잘 모른다. 신경 끄고 산다.

에다가와 도쿄 제2초급학교(?)라고 있다. 쓰레기하치장을 학교로 만들어 50년 넘게 있던 곳인데. 2007년 극우 정치인 도쿄 도지사가 ‘학교 내노라’ 하는 거다. 당시 한국 사회 문화예술인과 시민단체들이 함께 했고 국회와 정부도 힘을 모아 그 문제를 해결했다. 일본 정부와 합의해서 저렴한 비용으로 사들이고 다 같이 그 교문 앞 벽을 꾸미기도 했다. 이 학교에 남과 북, 재일동포, 일본시민사회단체가 기여한 셈이다. 동북아 평화를 상징하는 게 된 거다.

* 1인 시위도 많이 하셨다. 세월호, 위안부 등. 자발적으로 이건 꼭 해야겠다 이유가 있나?

- 요청에 의할 때도 있고 자발적인 것도 있고 내가 관여한 단체에서 하는 일도 있다. 어떤 경우엔 사진이나 이런 게 찍히거나 나오고 묘한 순간도 있다. 작년 12월 28일 한일합의 됐을 때 사진이 한 장 돌기 시작했다. 내가 1인 시위한 사진. 그건 사실 그해 여름 찍은 사진이다. 겨레하나와 몇 단체들이 평화헌법과 관련해 아베총리에 대해 소녀상 앞에서 시위했던 건데 그 사진이 한일합의 때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럴 때면 ‘반정부는 평생 반정부로 가는 구나’싶었다. 아무튼 웃긴 일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에게 ‘고생했다’고 문자가 왔다. ‘날도 추운데...,’하며, 여름옷 입고 있었는데...

* 역사에 대한 재일 조선인에 대한 첫 마음은 언제였나?

- 20여 년 전 1991년 이장호 감독과 함께 영화 촬영을 위해 사할린에 갔다. 영화 줄거리는 조선 땅에서 명자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시절 아키코로 불린 소녀가 소련 사할린으로 가 쏘냐가 된 한 여성의 일대기를 그린 명작 영화다. 거기서 40일 동안 까레이스키 고려인들 삶을 보게 됐다. 남의 땅에서 우리 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는 까레이스키 고려인, 수많은 쏘냐들을 만났다. 바자르(시장)에서 일한다. 꽃 팔고 나물 팔고 김치 팔고하며. 내가 27살 때였는데 그때 느꼈던 것들을 돌이켜 본다.

* 그 후 조선학교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했다는 건가?

- 이 학교가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게 설명의 영역인가 고민하기도 한다. 나라가 힘이 없어 떠나야 했던 자국민들. 국가가 기만하고 모르쇠로 유기한 부분이다. 국가의 의무다. 물론 그곳에 시민권 갖고 살고 있지만 ‘자기의 뿌리가 여기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받아들이고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언급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30,40년 유신시대와 한국 사회에서 살아진 게 있다면 공동체의 생활이다. 한 공동체가 아이를 키워내고 서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것이 거의 완벽하게 없어졌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드는 생각은 세월호같은 비극을 볼 때면 ‘우리는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나, 우리는 원래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었나’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학교 아이들, 동포들 만나면 내가 치유 받고 온다. ‘우리가 원래 이런 사람들은 아니었구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어’하며 이 사회에서 살아갈 근거를 얻고 오는 셈이다. 함께 하는 삶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일반회원 40여 명이 방문단을 꾸려서 함께 가는데 그들도 그 힘으로 한국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 조선학교의 교육 방식이 어떤가?

- 조선학교는 우리 교육이 놓쳐버린 것, 잃어버린 것을 지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하루아침에 핀란드식, 덴마크식 교육하고 싶어도 어려울지 모른다. 한국 사회엔 견고한 일본식 잔재들이 있다. 교육이나 국가주의 그런 것들을 하루아침 깰 수는 없지만 과거에 좋았던 것들을 선별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학교는 이런 가능성, 즉 우리 교육이 가져야 할 가치, 우리가 놓쳐버린 것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본 전교조나 교육단체들도 조선학교에 방문해서 참관수업이나 심포지엄도 많이 한다. 조선학교에서도 역사와 우리말 빼곤 일본 교육방식 택한다. 그런데 일본 교사들이 보기에도 학생들이 다른 거다.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거다.

* 확실히 다른 게 뭘까?

- 일단 경쟁교육이 아니다. 2인1조 교육이다. 시험이 있으면 그 과목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한 조가 된다. 그렇게 서로 돕고 경쟁은 타 학교의 같은 학년 아이들과 하는 식이다. 모든 과목이 그렇게 진행된다. 그렇다보니 공부 잘하는 아이는 짝이 된 친구 성적을 올려주는 게 자기 목표가 된다. 그러면 꼴찌는 또 이 친구가 부끄럽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 경쟁이 아니고 서로 돕는 것을 강조하는 게 우리나라 대안학교랑 비슷한 건가?

- 우리나라 대안학교 대해 할 말 많지만. 대안교육 20년 넘었는데 문제 심각하다. 교육 갖고 단시간 성과 말하면 안 되지만 반성해야 할 것이 많고 대안 교육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 두 가지다. 크게 당연히 아이들이 교육혜택 받아야 하는 중학교까지 무상교육 된 한국 사회에서 학생 1인당 지급되는 예산이 있는데 대안학교는 공교육시스템에서 빠져나갔다고 지원되지 않는다. 교사의 역량도 문제다. 실제 대안이 없는 대안교육이 많다.

▲ 몽당연필 카페에 붙여진 조선학교 학생들이 만든 감사의 글

* 몽당연필이 6년 됐다. 학생들이 컸을 텐데. 한국에 찾아오기도 하나?

- 방문했던 곳에서 오는 아이들도 있고, 이야기를 듣고 오는 친구들도 있다. 바느질모임, 청년모임 등등에 참석하기도 하고 그런다.

* 조선학교 학생수는 얼마나 되나?

- 68개 학교 2천여 명 된다. 학생 수 0인 학교도 있고. 학생수 20인 미만이 절반 이상이다.

* 그런 학교들은 어떻게 되나?

- 곧 없어진다는 뜻이다. 한 학교에 초중고 다 있는 걸 한 학교로 묶었을 때 지역별로 한 때 학교 500개가 넘게 있었다. 통합을 해나가고 있는데. 점점 수가 줄어드는 이유는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다. 일본 정부로부터 어떠한 교육기관으로서 지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어서.

우리사회가 민주화 하던 시대에 가장 좋았던 시절은 미국 대통령이 조지부시. 그런가 하면 저쪽이 민주당이라든지 일본이 민주당이 했던 시절엔 이명박이 되고. 오바마 시절엔 등등. 끝없이 이렇게 되니... 한국에 20년 이상 민주정부가 있으면 해결될 문제였는데. 일본에 있는 모든 외국인 학교는 지원받는데 조선학교만 배제됐다.

* 우리 정부에 대해선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건가? 정권이 바뀐다면?

- 국회 차원에선 할 수도 있지만. 쉽게 얘기하면 이런 거다. 지역구 정치인에게 속된 말로 ‘돈이 안 되는 장사’라...

* 조선학교가 공식적으로 70주년이 됐다. 앞으로 몽당연필이 지속적 사업을 할텐데, 70주년을 맞아 업그레이드 된 후원 계획 같은 게 있는지?

- 지난 8, 9년 사이 한국 시민사회단체 좋게 얘기하면 ‘자생력 키우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정부의 말도 안 되는 정책에 흔들리는 일이 많았다. 만약 가까운 시일 내 민주정부가 들어선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이를테면 조선학교 자체에 일본 내 지위향상을 남과 북, 일본이라는 ‘삼각구도’ 안에서 조선학교가 평화의 상징이 되도록 할 수 있다.

남북일본 정부가 이 학교에 대해 지원하고 인정하는 일들. 이런 과정에서 보기에 이념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런 건 걷어내고 말이다. 일본에 이민 갔는데 우리 아이들 한국말 가르치고 싶어서 조선학교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재일동포 사회에서 힘이 될 테고.

조선학교 학생들이 두 차례 한국에 대규모 공연했었다. 이 아이들은 학교 안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 스포츠 활동을 한다. 예술경연대회 보면 기가 막히다. 몽당연필이 일본전역 다니며 조선학교 응원한다고 하는 것이었다면. 또 이들을 초청해서 한국 사회에 조선학교 모습 알려주는 공연하고 싶다. 특히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 시민들이 함께 하는 멋진 공연 보면 좋겠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같은 것 있나?

- 시코쿠 조선학교- 일본은 크게 섬 4개로 이뤄진 나란데 그 중 가장 작은 시코쿠 섬에 학교가 한 개 있다. 학생 10여 명. 그냥 다 같이 울었던 기억난다. 그런 순간들이 많이 있다.

* 함께 울었다는 건.

- 우리 어떻게 다시 만날까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고. 안타까움일 때도 있고.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2002년 금강산 가서 만난 대학생이었는데. 홋카이도 학교 학생식당에서 학부모와 교원들과 학생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 얘기를 잠깐 했는데 한 친구가 “내가 그때 금강산에서 만난 학생이에요“하고 나오더라. 반가웠다.

* 몽당연필 활동을 하면서 삶의 방향도 달라졌나? 배우로서 최고점에 가고 싶다라거나. 그런 생각도 했을 텐데?

- 인생이 묘하게 꼬인다고 생각한다. 인생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다. 지진이 안 일어났으면 이런 단체를 만들었을까? 어쩌면 어디선가 만나지 못할 사람도 만나게 되고 그런 기쁨이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부부는 ‘나이 들면 우리는 굶어죽진 않을 거야. 일본 가면 규슈부터 홋카이도가지 학교 있는 동포사회 한 군데씩만 들려도 1년은 먹고 살거다’라고 우스갯소리 하기도 한다.

▲ 수요집회에서 발언하는 몽당연필 대표 권해효

* 몽당연필 후원하거나 참여하려면?

- 몽당연필은 제일 재밌는 점은 이 안에 회원들이 정말 평범한 회사원, 직장인. 선생님 그런 구성원들이다. 연령도 20대, 50대 후반~60대까지 다양하다. 제일 좋은 건 살아가면서 나이 들며 새로운 친구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인데 나도 이 안에서 많은 친구를 만났다.

여기 참 재밌는 곳이다. 견뎌 내야하는 일은 있지만 싸워야 할 일은 아니고, 의무감만 갖고는 힘들다. 먼저 우리가 즐거워야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작지만 행복한 모임이다. 후원 하셔도 좋고 회원의 날 나와서 같이 소주 한 잔 해도 좋고. 우리는 강연도 하고 공연도 한다.

이 공간(카페)은 몽당연필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비영리 민간단체만으론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는 취지에서 운영하고 있다. 언제든지 회원들이 찾아와서 차나 와인 나누면서 강연도 하고 파티도 하는 열린 공간이다.

살면서 몽당연필에서 만난 사람들 수줍은 사람 본 적 없다. 시민 사회단체나 이런 영역에서 운동이나 동아리에서 뛰던 경험들이 많이들 있다. 많은 단체들, 활동가 중심 단체다. 우리는 회원 중심 단체라. 어쨌든 정말 평범하신 분들이다. 재밌다.

(몽당연필 카페 http://cafe.daum.net/mongdanglove)

 

권해효씨는 바쁜 와중에도 평소의 이미지대로 편안하고 정중하게 인터뷰에 응해줬다. 인터뷰 내내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카페에 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보냈고 아는 사람이 오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최근 ‘가려진 시간, ’스플릿‘ 등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개봉됐고 42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을 비롯해 오는 20일에 열리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시상식 등에서 사회를 맡았다.

특히 교토통신에서 나오는 월간지에 매달 ‘권해효와 함께 하는 쉬운 우리 요리’라는 코너에 김치찌개, 떡볶이 등등 간단한 요리 레시피 연재한 내용을 묶어서 낸 요리책을 낼 만큼 요리와 인연이 깊은 그는 책과 음식이 결합된 신개념 프로그램인 KBS 1TV '서가식당'에 공동MC로 참여하는 등 배우와 방송인으로서 다양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희망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꾸준하게 조선학교를 돕기 위해 몽당연필 대표로 본분을 다해가는 권해효, 그가 아름답다.

 

진행 권미강기자 · 정리 이명주 기자  kang-mom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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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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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6-12-13 20:16:20

    권해효 아저씨, 오랫만이네용? *^^***** 근데 머리만 하얘지고 얼굴은 그대로시네용?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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