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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4.3항쟁의 시 <한라산> 필화 1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이산하는 1960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영일상옥초등학교, 상옥중학교 중퇴 후 부산토성중학교(편입․졸업),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본명은 이상백이다. 필명 ‘이산하’는 ‘이 땅’ 혹은 ‘이강토’라는 뜻으로 지어 사용했다고 한다. 1982년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1987년 제주4․3사건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으로 구속되어 필화를 겪는다. 출소 후 10년 간 절필했다가 1998년 <문학동네>에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했다.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문학동네), 산사기행집 <적멸보궁가는 길>(이룸), <피었으므로, 진다>(쌤앤파커스), 편역서로 <체 게바라 시집>(노마드북스), <살아남은 자의 아픔>(노마드북스) 등 여러 권의 시집과 저서가 있다.

1. 사건 원인과 경과

이산하(李山河)는 1987년 3월 25일 발간된 사회과학전문 부정기간행물 <녹두서평> 1집에 제주4․3사건을 다른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구속되어 필화를 겪는다. 이 시는 1,300행의 미완의 서사시로 미국과 역대정권에 의해 철저히 은폐돼 온 제주4.3사건을 격정적인 언어로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써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987년 4월 발행인 김영호가, 이어서 편집장 신형식이 검거, 구속된다. 이산하도 즉시 수배됐으나 도피, 1987년 11월 11일 구속된다. 검찰은 제주4․3사건을 다룬 ‘한라산’은, “남한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사회로 규정하고, 무장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하며, 폭동을 진압한 정부의 조치를 ‘무차별한 주민학살극’으로 묘사․비방하는 한편,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깃발)를 찬양하는 등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이산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1988년 2월 27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김영호는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에 집행유예 5년, 신형식은 징역 1년 6월과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87고단3707; 항소심판결 87노66943). 고은 시인은 재판부에 낸 의견서를 통해 “민족의 자주통일에 대한 하나의 자기요청적 산물인 ‘한라산’이 획일적인 냉전사관에 의해 재단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변론했으나 이산하는 1심과 2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87고합1481).

‘녹두서평사건’은 안영도·홍성우 두 변호사가 맡아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산하는 김영호와 신형식보다 늦게 구속됐으므로 ‘한라산’은 이 사건의 일부로 포함되어 심리됐다.

1심은 위 두 변호사가 맡아 진행했지만 문제는 2심이었다. 수감 중 자신의 사건을 담당할 변호사를 구하지 못한 이산하는 선임을 포기하고 직접 항소이유서를 작성하여 법원에 제출한다. 그 서면은 자필로 작성된 편지지 4쪽 분량의 짤막한 내용이다. 이산하는 그 이유서 마지막을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써서 제출한다.

1988년 5월 28일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공식 출범하기 전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도 활동하던 ‘인권변호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산하가 ‘한라산필화사건’을 맡을 변호사를 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산하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구속된 시점이 1987년 11월 11일로, ‘대선 한 달 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변호사 없이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특히 기대하고 있던 문인들의 법정증언까지 거절당하고, 차가운 겨울 감방에서 거듭된 단식투쟁으로 그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산하는 변호사 없이 자신이 직접 항소이유서를 썼다.

1989년 10월 3일 이산하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된다. 이듬해 1990년 이산하는 ‘한라산’을 완성하기 위해 2년 간 제주도에 머문다. 현장을 둘러본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악할 수 있나”라며 충격을 받고 절필을 선언한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거기서부터 시를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조사하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다보니 너무나 참혹하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는다. 이산하의 절친 하응백은, "산하야, 이제 역사와 세상이 네게 행한 악행을 잊어버리고, 이쪽 세상으로 오는 다리를 건너거라"라며 그에게 다시 습작할 것을 권유한다. 1999년 늦여름 그는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내놓으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한편 2003년 6월, 시학사는 판금된 상태에 있던 ‘한라산’을 단행본 시집 <한라산>으로 출간한다. 이 시집은 <녹두서평>에 실릴 당시 불가피하게 ‘자기검열’로 삭제한 부분들을 모두 되살려 낸 ‘복원판’이다. 이 ‘복원판’ <한라산> 저자후기에서 이산하는 ‘복원’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출판사측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한 발 물러서더라도 4․3의 진실은 알려야 한다고 판단해 작품을 완화시키기로 했다.”

이산하가 고백한대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데올로기의 마지노선’을 넘어버렸다는 <한라산>도 실은 ‘자기검열’을 거친 작품”이었다. ‘자기검열’로 삭제된 내용을 복원한 탓(혹은 덕분)에 전체적인 흐름에는 거의 차이가 없지만, <녹두서평>에 실린 ‘한라산’과 ‘복원판’ <한라산>은 내용의 많은 부분이 차이가 있다. 이처럼 <한라산>은 ‘복원’돼 독자들이 구해 읽을 수 있지만 여전히 ‘법적으로는’ 판금 상태이다. 2003년 시학사에서 발간된 <한라산>은 ‘복원판’일 뿐 ‘시인 이산하’와 <한라산>의 권리는 아직도 ‘복권’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채형복 교수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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