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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개량이라는 비판을 두려워 말자김창현 진보대통합 연대회의 부대표의 '대중정당론'에 대한 반론
  • 윤현식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
  • 승인 2016.10.0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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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 진보대통합연대회의 부대표가 <현장언론 민플러스>에 기고한 "성찰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 연재에 대해 윤현식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이 반론을 보내왔다. 이번주 기고는 김 부대표가 연재 3편 '합법적 대중정당답게 자리잡지 못했다'의 내용에 대한 반론이다. [편집자 주]

김창현 진보대통합연대회의 부대표(이하 김 부대표)의 세 번째 기고글의 주제는 ‘합법적 대중정당론 – 의회주의, 합법주의’였다. 이 긴 글의 주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노동자 민중을 의식화 조직화하고 광범한 대중투쟁을 정세를 뒤흔들고자 노력 … 진보운동 역량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정당의 주된 임무

이 결론은 앞의 두 글에서 김 부대표가 제시했던 겸허한 자세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김 부대표의 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말고, 만들어 놓고 주도하면서 동원하려 들지 말고 주인을 섬기는 자세, 이것이 21세기 첨단의 시대정신임이 분명하다. - ‘1부. 노동중심성’편

민중에게 복무하기보다 가르치려 들고 민중을 주인으로 세우기보다 써먹으려 들며 끊임없이 자리를 탐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진심으로 돌아본다. - ‘2부. 패권주의’ 편

“민중을 함부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과 “노동자 민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것이 대립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함부로”라는 수식어에 집중한다면, 그건 아마도 소위 운동권들의 오만함을 경계하는 의미일 것이다. 운동권의 ‘품성론’이다. 그런데 “의식화 조직화”는 교양과 학습이 전제된다. 다시 말하면,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의식화 조직화”가 가능한가? 그냥 모범을 보임으로써? 천만의 말씀이다.

‘개량’이라는 비판이 두려운가?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데, 제도권 내에서의 정당활동은 대중추수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동시에 의제선도라는 고유의 활동을 중단할 수도 없다. 전자와 후자는 상호 보완하면서 수정 강화하는 관계이다. 정당은 끊임없이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고 대중의 경험적 이해관계를 당의 활동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대중’의 의미에 관해서는 필자의 반론글 1편, “노동중심성의 본질에 대한 또 다른 성찰”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대중의 이해를 반영하는 의사를 형성하여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촉발해야 한다.

문제는 이 상관관계가 단지 ‘품성론’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김 부대표가 제출한 앞의 두 글 역시 진보좌파정당의 ‘품성론’ 차원에서 논의를 전개하는데 이 세 번째 글은 그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보니 제도권 정당의 기본적 책무와 원리에 대한 논의는 자꾸만 구성원들의 ‘품성’ 수준에서 겉돌게 된다.

김 부대표가 혼란을 거듭하는 이유는 제도권 정당의 합목적적인 활동양식에 대한 방향을 몰라서가 아니라, 진보좌파정치세력이라는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이 개량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그리하여 김 부대표는 끊임없이 진보좌파정당이 가져야 할 ‘품성’에 파묻힌다.

나는 지난 진보정당의 활동을 돌아보며 의회주의, 합법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스스로 비판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을 통해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고 광범한 대중투쟁을 촉발시켜 정세를 뒤흔들고자 하는 노력은 사라지고 선거공간을 통한 대중동원에만 온갖 열과 성을 다한 것이 사실 아닌가? … 기성의 보수정당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그 길을 걸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정당으로 발돋움 하고 난 직후의 상황을 돌아보자.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자는 이야기를 하고, 탄핵정국에서 솟구친 대중들의 분노를 등에 업고 열린우리당이 원내 다수당이 되면서 4대 악법 개폐를 이야기했다. 그때 민주노동당이 취했던 태도는 무엇이었던가?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듣더라도 국가보안법 철폐에 당의 사활을 걸자”며 하루에도 몇 번씩 당직자들에게 국가보안법 철폐 집회시위에 ‘필참’ 문자를 날렸다. “선거공간을 통한 대중동원에만 온갖 열과 성을 다한 것”이 아니라 김 부대표가 중요하게 여기는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고 광범한 대중투쟁을 촉발시켜 정세를 뒤흔들”기 위하여 당력을 총동원했다.

그해 연말, 진보정책의 아이콘이었던 고 이재영이 ‘진보누리’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당의 역할, 즉 민생과 직결된 사안에 대한 당의 정책적 정치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 글을 어떤 부지런한 조선일보 기자가 발견해서 조선일보에 보도를 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가열차게 해야 하는 시기에 투쟁의 취지를 흐리고 동력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했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의 선봉에 민주노총과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당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국민연대의 한 관계자와 설전을 벌인 일이 있는데, 이 사람 하는 이야기가 가관이었다. “왜 조선일보에 이용당할 이야기를 하나?”

▲ 사진출처: 민주노총

해보지도 못한 의회주의

제대로 꼴을 갖춘 정당이었다면, 정당에 대한 ‘품성’적 예의조차 망각한 저 두 단체의 항의서한에 대해 점잖게 반박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때 오히려 당은 고 이재영에게 양 단체에 사과를 하라고 종용했다. 고 이재영이 진보누리에 올렸던 글의 핵심은 다른 게 아니었다. 국가보안법폐지운동과 동시에 민생문제에 대해서도 진보정당다운 의제설정과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 이재영은 그 글로 인해 최고위원회에 불려가 ‘꾸지람’까지 들어야 했고, 사과를 하라는 강압까지 받아야 했다. 바로 그 당시, 즉 시도 때도 없이 당직자들에게 집회참여의 ‘필참’ 문자를 날리고 고 이재영에게 꾸지람과 사과요구까지 했던 민주노동당의 사무총장이 바로 김 부대표였다.

지금 김 부대표는 민주노동당 이래 진보정당의 상황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의회주의와 합법주의를 반성하고 있다. 그런데 위 사례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 속에서도, 당적 차원에서 의회주의와 합법주의가 제대로 성립이나 한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제도권 정당의 역할과 운동단체의 역할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김 부대표의 글에서는 이러한 혼동에 대한 성찰이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김 부대표는 과거의 문제를 엉뚱하게 반성하면서 스스로 혼동에 파묻히고 있다.

자주평화통일운동만 해도 그렇다. 반미자주화 투쟁, 혹은 연방제 통일 투쟁 등은 고도의 목적의식적 투쟁으로 대중적 관심을 의도적으로 끌어내지 않는 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투쟁이다. 진보정당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그 이전보다 이런 목적의식적 투쟁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표되는 일만 하려는 속성이 생긴 것이다. 어느 순간 당은 민생문제, 그러니까 교육, 의료, 세금, 복지 등을 찾아다니는데 급급했다.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원외정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정당이 감히 내놓지 못하는 “민생문제, 그러니까 교육, 의료, 세금, 복지 등”에 관한 진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하고 이를 현실화시킨 능력이었다. 그런데 정작 원내정당이 되자마자 한 일은 “반미 자주화 투쟁, 혹은 연방제 통일 투쟁 등”에 경도된 일군의 ‘패권주의세력’이 당의 강점이었던 진보적 민생정책역량을 2선으로 밀어낸 일이었다.

김 부대표의 성찰은 이렇게 앞뒤를 혼동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제도권 정당정치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배제한 채 자기 정체성의 과시를 정당활동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생각하면서 ‘품성론’적 차원에서 개량화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과정에서 벌어졌던 ‘코리아연방’ 공약은 김 부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반미자주화 투쟁, 혹은 연방제 통일 투쟁 등은 고도의 목적의식적 투쟁으로 대중적 관심을 의도적으로 끌어내”고자 한 전형적인 투쟁이었을 터다. 그런데 이렇게 하자면 결국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해야 하고, 대중에게 ‘코리아연방’이 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자민통에 적극적인 ‘대중’ 이외의 대중들은 이런 식으로 ‘함부로 가르치려’ 드는 행위에 반발했다. 자, 그때 김 부대표의 입장에서 그 같은 상황을 어떻게 돌파했었던가?

“고도의 목적의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김 부대표는 “의회의 압도적 다수가 민중진보진영이 아닌 바에 어떻게 밀려오는 자본과 정권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라며,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고 광범한 대중투쟁을 촉발시켜 정세를 뒤흔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회에서는 수가 모자라서 안 되니 밖에서 하자는 게 김 부대표의 생각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보정당이 “정세를 뒤흔들” 정도로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이유는 “의회의 압도적 다수가 민중진보진영”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정당을 만들고 정당활동을 하는 거다. 따라서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게 진보정당의 당연한 역할이고 이를 통해 원내 다수를 점유하고 궁극적으로는 집권을 해야 하는 거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중적 관심을 의도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민생문제, 그러니까 교육, 의료, 세금, 복지 등”에 대하여 더욱 철저하게 자기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아니면 여전히 김 부대표의 정치적 정체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철두철미 “반미자주화 투쟁 혹은 연방제 통일 투쟁 등”을 전면에 내걸고 “고도의 목적의식적 투쟁”을 관철해야 할까?

필자 역시 “고도의 목적의식적 투쟁”을 하기 위한 의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제 철폐, 자본주의 타도, 사회주의 건설과 같은 “고도의 목적의식적 투쟁”의 의제는 필자 나름의 사상이자 이념이며 이러한 목적의식을 달성하기 위한 나름의 고민과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러나 정당정치를 통해 이러한 이념을 달성하는 건 나의 이념을 구호로 내놓고 그 외에 모든 행위를 개량이나 우경화로 치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누구는 말을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공공연히 사상과 정견을 드러내지 못해서가 아니다. 경험적 대중의 이해와 추상적 대중의 이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정당정치에서 선명성을 드러내는 건 구호가 아니라 내용이다.

따라서 개별 활동가의 ‘품성론’ 차원이 아니라 정당정치 본연의 원리에 충실하여 진보정당의 활동을 평가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당정치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의회주의’와 ‘합법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먼저 정당정치가 뭔지에 대해서부터 합의해야 한다. 그 합의는 정당정치의 기본적인 원리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도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제도권 정당을 하는 이유는 뭘까? 현재의 제도적 구조 안에서 선출직 공직자를 다수 배출하여 의석의 점유율을 높이면서 더 나가 집권을 목표로 하고, 정당의 이념과 강령을 제도화하여 현실에서 실현하여,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정당의 이념과 강령이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로 유지되게 하고자 함이다. 이게 제도권 대중정당이 혁명지하전위당과 구별되는 차이다. 둘 사이의 차이가 단지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어 있느냐의 여부로 갈리는 게 아니다.

입장의 과잉 vs 기초의 상실

정치학개론의 첫머리에나 나올법한 기초적인 상식을 다시 거론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특히 진보좌파쪽에서 정당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 기본적인 원리를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 입장은 난무하는데 그 안에서 정작 정치는 없고 내용은 허공에 떠버린다. 공허한 구호가 남발되고 아스팔트 투쟁으로 세상을 변혁하자는 결기는 넘치지만 정작 정당의 기본적 활동에 대한 이해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정당원리의 기초를 강조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고정적인 비판의 칼날이 있다. 개량주의, 의회주의, 합법주의가 그것이다. 조금 더 나가면 출세주의, 명망가주의, 대중추수주의라는 별호까지 붙는다. 이 부정적 뉘앙스의 각종 주의들이 향하는 지점은 필연적으로 우경화가 될 것이라는 게 이들 비판의 결론이다. 지금 김 부대표의 태도가 바로 이 비판자들의 대표적인 태도다.

그러나 고 이재영이 오래 전에 날카롭게 갈파했듯이, 이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개량주의자가 되지 않고 영원히 혁명가로 남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현실의 변화를 위한 어떠한 실천적 대안이 없이 구호만으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권 정치구조 안에서 정당을 하고자 한다면, 개량주의라는 비판에 당혹해하거나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념과 강령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 제대로 개량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대중들의 경험적 이해에도 복무하는 동시에 추상적 이해를 제시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의회주의는 필연코 개량화·우경화로 끌고 간다”는 김 부대표의 단정적 발언은 그래서 일면의 진실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합법주의에 경도된 자유주의적 정당론에서 드러나는 의회주의가 ‘헌법 안의 진보’라는 체제투항적 발상으로 이어진다면, 합법주의를 비판하는 김 부대표의 입장에서 의회주의는 사회운동에 종속된 형태로 등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이 나름의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간과한다. 또한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역동적 상호관련성을 왜곡한다.

개량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사회운동세력의 올곧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제도권 정당 내부의 개량화와 우경화에 브레이크를 거는 힘이 사회운동 안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보정당이 제도권 안에 들어가 있는 이상, 이미 그 자체로 사회운동세력으로부터 개량화·우경화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더 많은 비판을 받기 위하여

그런 의미에서, “탄압을 받아 민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민심을 잃어 탄압받았다”는 김 부대표의 절절한 반성이 나름의 의미를 갖기 위해선 지지율에 목매지 말자거나 명망가주의, 출세주의를 배격하자는 당위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러한 ‘품성론’은 결국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의지로 해결하자는 방향으로 흐를 뿐이다.

오히려 정당은 개량주의나 우경화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단호하게 제도권 내에서 정당이 추구하는 목적을 완수해야한다. 100명의 명망가 중에 99명이 명망가주의와 출세주의에 빠져 배반의 칼을 들이밀지라도 계속해서 명망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게 정당의 역할이다. 이들을 통해 줄기차게 지지율을 올려가기 위하여 목을 매야 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다. 이건 진보정당만이 아니라 보수정당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의회주의와 합법주의를 비판하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달라지는 게 아니다.

윤현식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

 

윤현식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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